2026년 4월 15일
기획특집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교회 체질 바꾸려면 사람부터”… 사목교서 따라 꾸르실료 열었다

[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선한 목자 옆에 있던 착한 평신도, 장일순 요한 - (3) 원주교구, 평신도 중심의 교회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1970년경 원주교구 JOC 송년회 레크리에이션 중(우측 김영주, 서있는 여성은 막내 제수가 된 장만자).


지학순 주교 사목교서의 두 기둥

사제도 평신도에게 배워라

가난한 이들 속으로 들어가라


평신도 지도자 교육 나선 장일순

바티칸 공의회 문헌 번역해 강단 서고

비신자 청년까지 모아 원주그룹 구성


“올해 우리 교구의 활동 목표는 새로운 신학의 토대 위에서 사회정의의 구체적 실천을 조직·전개하고, 저소득층과 근로 계층에 속하는 절대다수의 가난한 대중 속에 들어가 그들이 바로 이 세상의 주인임을 깨닫고 자기의 마땅한 권리를 되찾아 생활과 현실을 향상·개선하도록 복음을 전하며, 실제에 있어 그들을 협동 생활로 조직 교양하여 구체적인 생활의 진보 속에서 그리스도를 육신화시키는 것에 있다.”


교회는 세상을 성화하는 전위대

지학순 주교는 1973년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를 찾자’라는 사목교서를 발표하였다. 1965년 원주교구가 설정된 이후 꾸준히 강조했던 사목방침을 압축해 적시한 교서였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밝힌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의 모범을 찾으려면, 당연히 들여다보아야 할 문헌이다. 지학순 주교는 사제들에게 “스스로 사목자로서의 고상한 품성과 일에 대한 열성을 함양하고 현대 세계에 관한 과학적 지식을 섭취하며 대중에 대한 조직 능력을 키우도록 노력하라”고 요청하면서 “본당과 공소를 모든 교우, 모든 민중의 협동 생활의 기지로, 공동체화의 터전으로 발전시키라”고 고무했다. 본당과 공소를 개방하여 신자들과 지역 주민들이 교회 안팎을 넘나들도록 하였다. 지학순 주교가 전하고 싶었던 복음은 신자들에게만 머물지 않고 원주 지역 전체 주민들에게 열려 있었으며, 교회가 그들의 현실 안에 깊숙이 들어가 생생하게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목교서는 단순한 선언에 그치지 않았다. 때마침 1973년 6월 10일 분도출판사에서 「현실에 도전하는 성서」(영역본, The Radical Bible, 1972)가 출간되었는데, 이 소책자는 사회정의와 인간의 해방에 초점을 맞추어 성서와 신학, 사회교리, 진보적 사회 활동가들의 글로 채워져 있었다. 지학순 주교는 1973년 7월 19일 자 공문을 통해 「현실에 도전하는 성서」를 대대적으로 신자들에게 보급하라고 지시했다. 그뿐 아니라 「복음 간추림 활용 방안」을 제시하며, 이 내용을 사목의 모든 분야에 적용시키고, “모든 교양 집회 및 수련회, 회의를 시작할 때 반드시 ‘복음 간추림’ 속의 한 구절 이상을 봉독, 해설 또는 토론한 뒤에 회의를 시작할 것”과 심지어 이 소책자를 휴대하고 다니며 암기하라고 주문했다. 이른바 “이 책자를 우리의 일상적인 호흡처럼, 피처럼, 또는 육신처럼, 매일매일의 이야기처럼 생활하도록 하라”고 전했다.

원주교구는 세상에 맞서는 하나의 전위대(前衛隊, Vanguard)처럼 움직였다. 미사마저도 노동 현장이나 집, 아니면 야외에서 틈나는 대로 봉헌하라고 전달함으로써, 성당만이 아니라 지역사회 전체가 거룩한 공간이라는 사실을 드러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사제와 평신도 사이의 평등한 동반자적 관계를 강조했다. 지학순 주교는 지침에서 “사제도 사회적 활동을 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도 지도자의 경험과 지식을 존중하고 겸허한 자세로 그들로부터 배워야 한다. 배우는 자세가 없이 권위만을 행사하려는 태도가 있는 이는 어리석은 것이다. 권위란 참으로 겸허하고 헌신적으로 봉사하며 덕을 베풀 때에만 생겨나는 위엄이지, 어디서 따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지학순 주교가 꿈꾸는 교회는 장일순이 꿈꾸는 세상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장일순과 김지하를 비롯한 원주그룹의 뒷받침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실험이었다. 이런 노력 때문에 1970년대에 원주교구는 협동운동의 전진기지이며, 민주화운동의 ‘해방구’이자 ‘피난처’가 되었다. 이 장엄한 복음 선포 사명을 지학순 주교는 이렇게 표현했다.

“사랑으로 뭉쳐 전진할 때 우리 교구는 세상을 성화하는 전위대로, 하느님의 기수로 빛나게 될 것이다. 모든 사제와 평신도는 옛날의 반목을 묻어버리고 공정한 비판을 동반한 사랑, 자 기 책임을 다하고 남을 존중하는 기풍으로 일치 단합하여 새로운 각오와 참신한 태도로 올해의 벅찬 활동에 임함으로써 우리 교구를 하느님의 활발히 번쩍이는 성으로, 정의의 불기둥이 솟구치는 광야로, 사랑의 광채가 가득한 꽃밭으로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1967년 서울 꾸르실료 교육 모습.


꾸르실료와 평신도 운동

원주교구는 처음부터 평신도의 리더십을 강조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서 평신도가 교회 안에서 주인의식을 갖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교구 사목위원회에서는 장일순·장화순·김영주 등이 강사가 되어 본당별로 순회하면서 새로운 신앙 의식을 고취시켰다. 그 후 사목위원회를 다시 ‘사도회’로 바꾸어 본당 운영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사제와 평신도가 함께 협의하여 실행하도록 독려하였다.

특히 장일순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인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과 「현대 세계의 사목헌장」, 요한 23세 교종 회칙 「어머니와 교사」 「지상의 평화」 등을 쉽게 풀어 신자들에게 가르쳤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신자 교육에 쓸만한 마땅한 교재가 없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도 아직 우리말로 번역되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장일순은 일본어로 된 문헌을 틈틈이 우리말로 번역하여,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교재로 만들었다.

지학순 주교와 장일순은 교회 체질을 바꾸기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이 평신도의 의식 변화라고 믿었다. 아울러 평신도 사도직 운동을 발전시키려면 평신도 지도자 양성이 시급했다. 원주교구 설정 당시부터 지학순 주교와 손발을 맞춰온 최창규·양대석·이학근·노세현 신부 등과 더불어 장일순은 꾸르실료에 기반한 평신도 중심의 교회 개혁운동에 참여하였다. 꾸르실료(cursillo)는 ‘복음화를 위한 단기 교육’이란 뜻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생활을 쇄신하고, 세상을 복음화하는 능력을 키우는 집중적인 지도자 양성 코스였다. 장일순은 1967년 서울에서 열린 제2차 꾸르실료를 수료한 뒤 원주에서도 22명의 평신도를 선발해 제1차 꾸르실료를 개최하였다. 이 교육에서 처음엔 장일순이 공의회 문헌을 중심으로 강의를 하고, 지학순 주교가 파견 미사를 봉헌하였다.

원주 평신도 운동은 꾸르실료를 기반으로 발전했는데, 본당 지도자 교육, 전 신자 교육에 이어, 청년·부녀자·농민·노동자들이 참여하는 ‘계층별 교육’을 실시하였다. 각 본당에 조직된 청년회와 부녀회는 나중에 가톨릭노동청년회와 가톨릭농민회의 인적 기반이 되었다.

평소 종교에 관해 일언반구도 없던 장일순이 이경국 등 가까이 지내던 청년들에게 입교하라고 권유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지학순 주교의 사목방침에 따라 자신과 손발을 맞춰 일할 청년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즈음에 이경국은 원동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교구 청년회장을 맡았다. 장일순의 대성학교 제자였던 김상범은 “너 웬만하면 성당 좀 다녀라. 앞으로 지역에서 일을 하기 위해서는 교회와 관계를 갖는 게 좋겠어”라는 말을 듣자마자 단구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1971년에는 김지하와 박재일까지 세례를 받으면서 실행력을 갖춘 ‘원주그룹’이 만들어졌다. <계속>

 


한상봉(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가톨릭평화신문 공동기획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6-04-15

관련뉴스

말씀사탕2026. 4. 15

루카 1장 66절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다.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