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4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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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단상] 봄에, 용서를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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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과 진달래가 활짝 피면 엄마 생각이 많이 난다. 엄마 생신이 그맘때이기 때문이다.

돌아가시던 해 봄, 엄마와 벚꽃 구경을 갔다. 꽃구름 환한 터널을 함께 걷고, 맛있는 밥도 먹었다. 이튿날 엄마는 곱게 갈아둔 찹쌀 가루를 익반죽해 진달래 화전을 부쳤다. 주위 사람들과 나눠 먹으라며 넉넉히 싸서 차에 실어주셨다.

엄마는 늘 그렇게 고향 집에 계실 줄 알았다. 그런데 그해 늦가을, 갑작스러운 뺑소니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셨다. 장례식장으로 가는 길, 나는 얼어붙어 있었다. 실감이 나지 않아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빈소에 도착해서야 성당에 먼저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해성사할 틈도 없었던 죽음이었기에, 장례미사를 해드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정신없이 성당에 찾아가 부탁했는데 연령회에서 곧바로 나와 연도를 해주셨다. 막막하던 순간에 교우들이 번갈아 바쳐준 위령기도는 말할 수 없이 큰 위로가 되었다. 엄마의 영혼에는 더욱 그러했으리라.

전통 구전 민요 가락의 위령기도는 한국 천주교회만의 장례문화로, 깊은 신앙과 공동체의 정성을 담고 있다. 그 힘을 온몸으로 느낀 뒤, 나 역시 위령기도를 즐겨 바치게 되었다. 사회적 참사로 세상을 떠난 이들의 빈소에서 교인들과 함께 연도를 바치며, 고유한 가락도 입에 익었다.

아무튼 예상치 못한 엄마의 죽음이 남긴 여파는 컸다.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보던 일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온갖 배신과 탐욕에 대응할 지식과 지혜가 그때 내겐 없었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는 말씀의 뜻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현실의 악에 대한 식별 없는 선량함은 어리석음일 뿐이었다. 그저 당하는 것과 알고도 감당하는 건 전혀 다르다.

그리고 또 하나, 그때 마음에 남은 화두가 ‘용서’이다. 붙잡힌 뺑소니 운전자 대신 그의 아버지가 찾아왔다. 그는 몇 마디 형식적인 사과를 건넨 뒤 곧바로 합의를 요구했다. 사고 직후 바로 병원에만 갔어도 엄마는 사셨을지 모른다. 그런데도 그는 애통한 피해자들 앞에서 자기 이익에만 급급했다.

그 와중에 동네의 한 할머니는 “고마 용서해주거라” 하고 말을 보탰다. 죽은 이의 억울함은 아랑곳하지 않는 듯했다. 고인을 애도할 시간을 갖기도 전에, 가해자의 참회와 사과도 없는데 용서 종용이라니. 그건 또 다른 폭력이었다.

예수님은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하셨지만, 이런 말씀도 하셨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관계 회복에 대한 가르침이지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라면 더욱 하느님께 용서를 구하기에 앞서 피해자의 마음을 풀어야 한다는 뜻이 아닐까.

사실 하느님께 비는 것보다 사람에게 사과하는 일이 훨씬 더 어렵다. 그래서 이근안 같은 고문 기술자도 목사가 되어 스스로 용서받는 길을 택했겠지. 지옥 같은 고통을 준 피해자들에겐 사과 한마디 없이.

엄마의 죽음 이후 겪은 일들을 적어보았으나, 내가 그들을 용서하고 말고 할 문제는 아니라 생각한다. 하여 오래전에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드렸다.

다만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하는 기도문처럼 살기 위해, 사람끼리 도리를 지키려는 노력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이 봄에 다시 물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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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6-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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