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작 열여덟번 째 시집 「봄비를 맞다」
‘두루 비추는’ 마음으로 빚은 시업
예술은 이기심 벗어나 거듭다는 것,
“가톨릭의 이름으로 큰 상을 받게 되어 영광입니다.”
시집 「봄비를 맞다」로 제29회 한국가톨릭문학상 운문 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황동규 시인(88·서울대학교 명예교수)에게 이번 수상이 주는 의미는 각별하다. 그가 삶의 신조로 삼아온 ‘두루 비추다’의 정신이 한국교회가 지녀온 정신과 맞닿아 있음을 새삼 돌아보게 했기 때문이다.
황 시인은 “수상 소식을 듣고 생각해 보니 가까이 지내는 문인과 예술인 거의 모두 직간접적으로 가톨릭과 연결돼 있음을 알게 됐다”며 “제 신조가 가톨릭 정신과 닮아 그런 사람들을 중심으로 사귄 것 같다”며 웃었다. 그는 “친분이 있는 이들 중 한국가톨릭문학상을 받은 지인 대부분은 인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사람들”이라며 다시금 “영광”이라는 소감을 밝혔다.
특히 그는 이번 수상을 계기로 조선 후기 신앙을 받아들였던 정약용과 정약전의 사회적 실천을 새롭게 짚어봤다고 했다. 그들은 비록 믿음 때문에 귀양길에 올라 더 이상 교회의 교리를 크게 내세우지 못했지만, 그 정신을 바탕으로 더 많은 사람을 이롭게 하려는 꿈을 실천해 나갔다.
황 시인은 “내 시도 마찬가지”라며 “다른 사람들의 삶을 더 풍부하게 만들고, 의미를 줄 수 있는 시를 쓰려 노력했다”고 말했다. 수상작 「봄비를 맞다」에도 이런 시인의 시적 태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자연과 인간의 삶을 벗어난 어떤 시적인 것을 말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깨달음을 찾습니다. 종교적으로 이야기하면 거듭남이에요.”
황 시인의 시는 자연이나 인간관계, 경험이나 느낌 등 일상의 삶 안에서 시상을 길어 올린다. 언뜻 SNS를 보듯 누구라도 편안하게 읽을 법한 일상의 이야기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삶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깨달음이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시인의 개인적 정서와 감정, 영감만을 노래하는 서정시와는 다른 황 시인이 추구하는 극서정시의 특징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죽음 또한 황 시인의 시에서 중요한 사유의 대상이다. 그는 시를 통해 “인간은 누구나 다 죽게 돼 있지만, 죽음의 공포를 미리 느끼기보다 벗어나자”고 초대하고 있다. 그 길이 바로 시를 통해 전하는 “삶의 깨달음”이다.
황 시인은 “깨달음은 누가 말해주거나 설교한다고 얻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얻는 것”이라며 “스스로 새로운 것을 찾는 깨달음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68년 시력(詩歷)의 그는 시 한 편 한 편을 새로운 깨달음으로 밝혀왔다. 그 비결을 묻자, 가톨릭신자가 아닌 그의 입에서 마치 성경 구절 같은 대답이 나왔다. “깨어 있어라.”
“어떻게 보면 사는 것 자체가 혜택이고 축복이에요. 그 축복을 제대로 받으려면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깨어 있는 것일까? 황 시인은 “인간이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인 모습을 벗어나는 것이 예술”이라면서 예술, 그중에서도 문학이 인간에게 주는 정신적인 가치를 강조했다. 삶이라고 하는 선물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스쳐 지나가는 일상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영감과 깨달음을 포착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는 이런 작업을 통해 삶에 의미를 부여해 준다. 이는 인공지능(AI)으로는 할 수 없는 인간만이 가능한 일이다.
황 시인은 “유행하는 여러 예술도 좋지만 문학, 특히 시에서 얻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고 AI는 줄 수 없는 것”이라면서 “한 인간이 자기 고통과 기쁨과 그런 모든 것을 겪으면서 만든 작품을 뛰어넘는 건 없다”고 말했다.
올해 88세의 황 시인은 점차 청력도 나빠지고, 거동에도 불편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시를 향한 열정과 필력은 여전히 ‘깨어’있다. 미수(米壽)의 나이에 발표한 시임에도 여전히 강렬한 생명력을 머금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는 “허리를 비롯해서 몸 상태는 나쁘지만, 머리는 또렷하다”면서 최근 발표한 <별다른 저녁도 아닌데>의 마지막 구절을 읊었다.
“세상에서 내 나갈 때 곁에 음악 주어지든 말든/시를 손보다 가게 해다오./실눈 감기 전/문자판 편 채, 아니면 손에 볼펜 쥔 채/미완의 시들이여 잘 있거라!”
늘 깨어 삶을 축복으로 받아들이는 그의 시 여정은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끊임없이 이어진다.
◆ 황동규 시인은
<소나기>로 널리 알려진 황순원 작가의 아들로 193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에서 영문학 석사를, 영국 에든버러대학에서 영문학 박사를 취득한 그는 1958년 「현대문학」에 <시월> 등의 시로 등단한 이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풍장」, 「악어를 조심하라고?」, 「오늘 하루만이라도」 등의 시집을 펴냈다. ‘국민 연애시’로 불리는 <즐거운 편지>를 비롯해 그의 시들은 많은 이의 사랑을 받아왔다. 현대문학상을 시작으로 이산문학상, 대산문학상, 미당문학상, 만해대상, 구상문학상, 호암예술상 등 여러 문학상을 수상했고, 2010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 수상작 「봄비를 맞다」
「봄비를 맞다」는 황동규 시인의 열여덟 번째 시집이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이후 4년 만에 펴낸 시집은 전작에 이어 그간 꾸준히 쓰고 발표한 시 59편을 모으고, 20년 가까운 삶의 자리에 대한 소회를 담아 산문 <사당3동 별곡>을 더했다.
황 시인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고립된 시간, 늙어가는 몸의 불편, 기억과 감각의 쇠퇴 같은 녹록지 않은 노년의 삶을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 안에서 생명력을, 그리고 새로운 깨달음을 길어 올린다. 시집의 첫머리 ‘시인의 말’에서도 “시집의 시 태반이 늙음의 바닥을 짚고 일어나 다시 링 위에 서는 한 인간의 기록”이라고 밝힌다.
시인은 쇠락을 단순한 상실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집 안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발코니의 식물과 계절의 빛, 산책길의 꽃잎과 참새, 비에 젖은 나무와 같은 사소한 풍경은 오히려 더 또렷한 생의 징후로 다가온다. 황 시인은 이 작은 움직임들을 놓치지 않으며 늙음과 고독, 무력감의 한복판에서도 여전히 삶은 반길 만한 것임을 보여준다. 그래서 「봄비를 맞다」는 노년의 비애를 토로하는 시집에 머물지 않는다.
육체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정신의 감각을 끝내 놓지 않고, 마침내 “지금을 반기며 사는 것”(<겨울나기>)의 의미를 다시 묻게 하는 시집이다. 팬데믹과 노쇠의 시간을 통과한 뒤에도 삶의 경이와 온기를 길어 올리는 황동규 시의 원숙한 깊이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 운문 부문 심사평
황동규 시인의 「봄비를 맞다」는 시적 원숙미의 구경(究竟)을 극적으로 펼쳐 보인다. 현재에 스민 과거, 자연에 깃든 철리(哲理), 현존에 짜인 경험이 어떻게 심미적 성찰의 자장을 길어 올리는지 숙고하게 한다. 시인은 노경(老境)을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면서도 그 잔여의 가능성, 잔여의 생명력에서 새로운 영감의 에너지를 충전한다.
‘이 세상에/다 써버린 목숨 같은 건 없다!’(<봄비를 맞다>) 같은 시적 의지는 시인의 존재 이유이다. 이미 써 버려 없어진 부분, 그 없음이 새로 있음을 예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관하며, 시인은 언제나 ‘지금을 반기며’(<겨울나기>) 노래한다. 그러면서 ‘환한’ 성찰의 지평을 연다. 나날의 범상한 경험에서 비범한 질문을 견인하고 그에 대한 성찰을 예비하는 대화적 서정은 황동규 시의 핵심 문법이다. 그 대화성은 독자를 극적 깨달음의 세계로 기꺼이 초대한다.
‘이 한세상/노래 배우는 새처럼 왔다 간다’(<바가텔 5>)는 시인은 평생을 노래하며 시업(詩業)에 헌신했다. 지문이 닳도록 매만진 생명의 노래가, 시적 충만의 깊은 경지로 우뚝하다. 시력(詩歷) 70년 내내 한국 현대시의 품격을 드높인 황동규 시인께, 제29회 한국가톨릭문학상을 헌정한다.
- 우찬제(프란치스코)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