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4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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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학순 주교에게 민청학련 학생들 살려 달라 부탁

[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선한 목자 옆에 있던 착한 평신도, 장일순 요한 - (4) 민주화운동의 숨은 공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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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가 1971년 10월 원주 시내를 행진하며 부정부패를 규탄하고 있다. ‘주여, 이 땅에 정의를!’ ‘부정부패 뿌리 뽑아 사회정의 이룩하자’ 등의 현수막이 보인다.


김지하 사형선고 소식에 밤새 통곡

지 주교 도움으로 북 공작금 프레임 깨



정의구현사제단 출범 실질적 조력자

지 주교 양심선언하고 구속되자

사제단 대표 서울서 맡아야 한다 조언


1970년대에 원주교구는 ‘민주화의 성지’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원주가 민주화운동의 발화점이 된 것은 1971년 10월 5일 원동성당에서 있었던 원주 MBC 문제에서 비롯된 부정부패 규탄대회였다. 지학순 주교는 원주교구에서 주교관과 가톨릭센터, 학교를 세우고 지역 주민의 삶을 바꾸기 위해 신용협동조합운동도 하고 있었고, 교회가 ‘세상에 빛’이 되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으로 언론매체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당시 지역 문화방송 허가권을 갖고 있는 5·16장학회와 공동으로 원주 MBC를 설립하기로 했다. 이 과정에서 군사정권과 유착된 5·16장학회의 부조리를 체험하면서, 반부패운동에 나서기로 했다.

 
장일순과 리영희(오른쪽) 교수. 리영희 교수는 장일순을 흠모해 원주를 자주 찾았다고 전해진다.


민주화운동의 발화점이 된 원주

사전에 군사정권의 부패와 호화스러운 삶을 격정적으로 성토하는 선언문과 결의문이 작성되었는데, 김지하가 이 문건들을 지학순 주교에게 보여주며 너무 과격하지 않나 걱정하자, 지 주교는 “옛날 예언자들이 모두 과격파”였다며 흔쾌히 허락해주었다. 이날 미사에서 지 주교는 “우리가 이렇게 당할 때 일반 국민에 대한 권력의 횡포는 얼마나 심하겠는가. 이제부터는 근본적인 문제를 갖고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스무 명 남짓한 사제들과 평신도 1500여 명이 모여 ‘원주MBC 부정부패 규탄대회’를 열어 원주 시내까지 진출하였다.

이런 시위는 천주교회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른바 김지하와 김영주, 박재일 등 원주그룹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후로 원주는 박정희 군사독재가 지속되는 동안 내내 저항의 도시로 각인되었다. 그리고 수많은 민주인사들과 수배자들이 은신처로 삼았던 곳이다. 물론 그 중심에는 언제나 지학순 주교와 장일순이 있었고, 김지하가 이 사람들과 원주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어 주었다. 하지만 장일순은 언제나 전면에 드러나지 않고 배후로 남아 있었다. 당시 장일순을 흠모하여 원주에 자주 찾아왔던 리영희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장 선생은 외국 언론기관과의 인터뷰나 국가기관과 관계할 때 좀처럼 표면에 안 나섰어요. 언제나 뒤에서 지학순 주교님에게 올바른 방향을 일러드리고는 했지요. 사실 지학순 주교님은 본래 사회의식이 분명하지 않았던 분입니다. 인자하시고 순진하셨으며, 열정적인 분이었어요. 무위당 선생과의 은근하고 태연한 관계 속에서 많은 영향을 받으셨지요.”


재해대책사업, 교회를 통해 교회를 넘어서

1972년 8월 18일과 19일 이틀 사이에 남한강 유역에 홍수가 나서 제천·단양 지역 등 13개 시군이 엄청난 수해를 입었다. 지학순 주교는 즉각 긴급구호 활동을 전개하여 식량과 의류, 천막 등 1000만 원 상당의 물품을 수해 지역에 보냈다. 지 주교는 세계 각국의 가톨릭 구호 기관에도 호소해 미제레올와 카리타스가 291만 마르크(약 3억 6000만 원)의 긴급구호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당시 지 주교는 장일순을 불러 이 돈을 어떻게 써야 할지 의논하였다. 장일순은 “그 돈으로 물고기를 사서 주면 한 끼를 맛나게 먹고 말겠지만,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준다면 스스로 물고기를 잡아서 내내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다. 한편 장일순과 지학순 주교는 이 돈을 교회가 아닌 지역 사회로 돌리는 데 합의하였다. “교회는 이해관계에 휘둘리는 장바닥 같은 성전이 아니며, 신앙을 강요하거나 돈과 신앙을 맞바꾸는 집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지 주교의 생각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구호 자금을 무조건적 시혜가 아니라 스스로 자립하려는 노력의 대가로 지원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런 결정은 한국전쟁 이후 교회가 밀가루와 옥수수 등 구호물자를 나눠주면서 신자들을 끌어모았던 방식을 포기한다는 의미였다. 장일순은 재해대책사업과 관련해 공식적인 직함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마치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지휘봉처럼 현장을 조율하며 움직였다. 그리고 원주그룹에 속한 장일순의 제자와 후배들이 현장에서 활동가로 일했다.

 
유신에 반대하며 양심선언을 하고 있는 지학순 주교.


민청학련과 지학순 주교 구속사건

1974년은 한국 교회 차원에서 엄청난 시련과 희망을 낳았던 해다. 그해에 지학순 주교가 주교로서는 처음 구속되고, 이 사건을 기회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설립되었기 때문이다. 유신정권은 전국의 대학에서 유신철폐운동이 거세게 일어나자 그해 4월 3일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약칭 민청학련) 사건을 발표했다. 학생과 재야인사들이 정부를 전복하고 노농(勞農) 정권을 수립하려는 국가 변란을 꾀했다는 것이다.

그날 밤 정부는 대통령 긴급조치 4호를 발표하면서 민주인사들을 최고 사형에 처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 관련자들을 비상군법회의로 송치하였다. 정부 당국은 민청학련의 활동 자금을 북한에서 유입된 공작금으로 몰아갔다. 그리고 김지하와 이철·유인태 등 장일순과 교류하던 대학생 및 민주인사들이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장일순의 아내 이인숙은 이들이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장일순이 밤새 통곡했다고 전한다.

“가끔 시내 나가셨다가 술에 취해 돌아오면 우시는 일이 있었어요. 어떤 날은 참 슬프게 우셨어요. 왜 우시느냐고 물어보면 대개 어려운 처지에 있는 후배나 제자들 누구누구가 불쌍하다면서 우시는 거예요. ‘내가 걔네들을 도울 힘이 없어서 안타깝다’ 한탄하시면서 우시는 거예요. 제가 큰일 하시는 분이 울면 되겠느냐고 해도 워낙 감성이 풍부한 분이라 말릴 수가 없었어요.”

민청학련 사건으로 밤잠을 설치며 통곡하던 장일순은 고민 끝에 지학순 주교를 떠올렸다. 그런데 때마침 지 주교는 원주에 없었다. 아시아주교회의 등 국제회의 참석차 외유 중이었다. 장일순은 지 주교가 일본 도쿄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은밀히 사람을 보내 지 주교에게 학생들을 살리기 위해 나서달라고 부탁했다. 장일순의 부탁을 받은 지 주교는 일본에서 자청해 기자회견을 열고, 김지하를 비롯해 민주인사들에게 자금을 댄 사람은 천주교 주교인 자신이라고 밝힘으로써 민주화운동 자금을 북한공작금으로 몰아가는 공안당국의 의도에 맞섰다. 해방공간과 한국전쟁 당시에 한국 천주교회가 “반공주의 십자군”을 자처했던 경험에 비추어, 지 주교는 자신을 내세워 민청학련과 북한 공산당과의 연계를 끊어버리려고 했다.

지 주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양심선언’을 통해 반민주적 유신헌법의 무효를 선포하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천주교회는 지 주교 석방운동에 대대적으로 나서게 되는데, 이 와중에 1974년 9월 23·24일 이틀간 원동성당에서 열린 성직자 세미나를 통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결성되었다. 사제단이 출범할 때도 장일순의 조언이 중요했다. 정의구현사제단 대표를 내세울 때, 사제단이 지 주교 석방 운동을 계기로 출범하는 것이니 원주교구의 신현봉 신부가 대표를 맡아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러나 장일순은 신 신부에게 “원주교구에서 대표를 맡으면 안 된다. 이렇게 되면 전국으로의 확장성이 떨어질 수 있으니 서울대교구 신부가 맡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다. 결국 사제단 대표는 논의 끝에 서울대교구의 김승훈 신부가, 총무는 함세웅 신부가 맡게 되었다. <계속>

 


한상봉(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가톨릭평화신문 공동기획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6-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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