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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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의 언덕’ 설계한 건축가 승효상 “건축은 삶·영성 바꾸는 성직”

[이상도 선임기자의 톡(talk)터뷰] 승효상 이로재건축사무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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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재건축사무소에서 만난 건축가 승효상 대표가 ‘순교자의 언덕’을 설계한 배경과 건축철학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남양성모성지 ‘순교자의 언덕’ 설계
병인박해 순교자·최방제 신학생 현양
지하에 굴처럼 연결된 독특한 구조

건축, 오랜 기억 위 새 기억 덧대는 것
평소 서사 담긴 묘역 순례하며 삶 성찰
영성 중시하며 비움·사유의 공간 설계


수원교구 남양성모성지(전담 이상각 신부)에 병인박해(1866년) 순교자와 조선 신학생 최방제를 기리는 ‘순교자의 언덕’이 들어선다. 박해 시기 이 일대에서 이름 없이 순교한 많은 이를 현양해온 성지에 순교자들의 거룩한 죽음을 더욱 기릴 공간이 새롭게 조성되는 것이다.

순교와 죽음에 대해 성찰하고 체험하는 공간이 될 ‘순교자의 언덕’ 설계는 승효상 이로재건축사무소 대표가 맡았다.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인 그는 파주출판도시 마스터플랜, 한국 DMZ 평화생명동산, 노무현 대통령 묘역, 대구 팔공산 사유원 ‘현암’을 비롯해 여러 성당과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문화영성센터에 이르기까지, 비움과 절제로 사유하는 공간을 설계해왔다.

승 대표를 만나 남양성모성지 내 야산 지하 공간에 조성돼 순교의 거룩함을 자아내는 곳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는 ‘순교자의 언덕’과 그가 추구하는 건축 철학에 관해 이야기 나눴다.

 
참회의 길, 순종의 길, 평화의 길로 이뤄지는 ‘순교자의 언덕’은 약 200여m가 지하로 연결된 구조로 지어진다. 승효상 대표 제공


‘순교자의 언덕’에 담아낸 의미

승 대표가 설계한 ‘순교자의 언덕’은 △참회의 길 △순종의 길 △평화의 길이란 명칭으로 약 200m에 이르는 공간이 굴처럼 연결된 지하에 완만한 오르막길로 연결되는 독특한 구조다. 순교자와 우리 모두가 참회·순종·평화에 이르는 여정을 상징한다. 참회의 길 안에는 3개의 기도소와 쉼터가, 순종의 길에는 기념묘역이, 평화의 길에는 십자가가 있는 기도 공간이 조성된다.

승 대표는 “순교자의 언덕에 오르는 일은 살아서 순교하는 지혜를 깨닫게 하는 여정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예수님은 기꺼이 십자가에 매달리셨고, 죽음을 받아들이고 불멸의 존재가 되셨죠. 순교자들이 주님을 따라 목숨을 바친 순교(殉敎)의 ‘殉’은 ‘죽어서 다시 태어남’의 의미까지 내포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순교는 믿음을 따라서 죽되 새롭게 태어나는 삶을 뜻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죽어서 평화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평화로울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아름다운 삶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승 대표는 “‘순교자의 언덕’을 빛과 어둠의 공간에서 각자 자신의 순교와 죽음에 대해 스스로 성찰하고 체험하는 모두를 위한 시설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이 시설에 들어서면 ‘순교’라는 거룩한 성사에 임한다는 느낌을 체험하고, 자신도 다시 순교자로 살겠다는 삶을 다지는 곳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름 모를 옛 순교자들을 현양하지만, 동시에 스스로 이 장소에 이름을 새기며 순교하고 다시 태어나기로 결단하는 우리 자신을 위한 장소가 되길 바랍니다.”

 
'순교자의 언덕' 참회의 길 안에는 3개의 기도소와 쉼터가, 순종의 길에는 기념묘역이, 평화의 길에는 십자가가 있는 기도 공간이 조성된다. 승효상 대표 제공


‘순교자의 언덕’은 남양성모성지 입구로 들어서면 우측에 위치한 성체조배실에서 언덕을 따라 오르면 등장하는 나지막한 야산에 조성된다. 이곳 정상을 오르면 세계적 건축가 마리오 보타가 설계한 대성당의 붉은 타워가 멀리 보인다. 스위스의 세계적 건축가 페터 춤토르가 설계한 티채플이 들어설 곳과는 작은 오솔길로 연결되는 곳이다.

승 대표는 “순교자의 언덕은 지형에 순응해 설계했다”고 설명했다. “저는 지형을 억압하거나 지배하는 건축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현재 남양성모성지에는 지상에 많은 건축물이 있는데, 순교자의 언덕을 조성하면서 밑으로 파고들어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200m가 굴처럼 연결되지만, 중간중간 지형 때문에 위로 노출되는 부분이 있을 겁니다. 빛이 적당히 들어오게 해서 완전히 폐쇄된 공간으로 느껴지지는 않도록 설계했습니다.”

다음으로 고려한 건 성지의 대표 건축물인 대성당과의 조화였다. “남양성모성지에는 우뚝 솟은 40m 높이 반원형 타워가 있는 대성당이 있습니다. 성지 전체를 압도할 만한 형태와 높이와 규모죠. 다른 건물이 또 형태를 갖고 들어서면 대성당을 저해하는 풍경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 상징성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는 게 대성당에 대한 예의이자 앞으로 지어질 건축물들의 숙명입니다.”

 
지난 3월 9일 ‘순교자의 언덕’ 기공식에서 함께한 승효상 건축가(오른쪽부터)와 염수정 추기경, 곽진상 주교, 이상각 신부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2021년 서울 대학로 이로재건축사무소에 남양성모성지 전담 이상각 신부가 찾아왔다. 만남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이 신부가 승 대표를 찾은 건 그가 우리나라에서 대지가 지닌 고유한 ‘지문(地文)’을 가장 잘 읽고, 묘역을 가장 잘 설계하는 건축가라 여겼기 때문이다.

“신부님은 처음에 순교자들께 바치는 아트랜드스케이프(대지 조형 예술작품) 작업을 말씀하셨습니다. 어디에서도 본 적 없고 오직 이곳에서만 체험할 수 있는 순교자들에게 바치는 특별한 공간을 원하셨죠.”

승 대표는 죽은 이들이 묻힌 묘역에 관심이 많다. 수시로 건축가들을 이끌고 여러 도시의 묘지를 순례했고, ‘죽은 자의 도시’라는 글을 오랫동안 썼다. 그런 인연으로 노무현 대통령 묘역과 분당 시안가족추모공원을 설계하기도 했다.

“저는 낯선 도시에 가면 항상 묘역부터 찾습니다. 묘역은 그 나라의 가장 원초적인 건축 형태이고 어느 나라든 풍경이 가장 좋은 곳에 씁니다. 묻혀 있는 분들도 그 서사가 굉장하지 않습니까? 묘역 순례만큼 좋은 여행은 없습니다. 묘역을 찾는 건 어마어마한 세계를 보러 가는 겁니다. 마음을 정리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기 삶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죠.”

승효상 건축의 핵심은 ‘빈자의 미학’이다. 1990년대 중반 우연히 서울 금호동 달동네를 지나다 그곳에서 모여 사는 가난한 사람들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건축이 지녀야 할 최고의 가치는 공공성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후 이를 자신의 건축 철학으로 삼고, 건축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임을 강조해왔다.

그 다음 주목한 건 ‘지문(地文)’이다. 승 대표는 “모든 땅에는 고유한 무늬가 있으며, 여기에는 인간의 삶과 기억, 이야기가 포함돼 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특정한 땅을 점거하고 세워지는 건축은 마땅히 그 땅이 지난 오랜 기억 위에 새로운 삶의 기억을 덧대는 일이라고 밝혔다.

최근에는 영성을 강조하고 있다. “건축에도 영성이 필요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어떤 집은 사당이, 또 마을 입구에는 성황당이 있어 항상 빌고 축복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저는 건축주가 요구하든 그렇지 않든 오피스나 주택 가리지 않고 그런 특별한 공간을 만들고 있습니다. 건축주가 원치 않으면 화장실 천장 높이라도 높이는 방식이죠. 그곳에서 자기 자신을 생각하며 짧은 기도나 묵상이라도 할 수 있게 하자는 취지입니다.”

 
2024년 5월 문을 연 왜관수도원 문화영성센터. 승효상 대표는 이 건물을 짓기 위해 9개월간 왜관에서 머물렀다. 그는 이 건물을 통해 영성을 강조하고 싶었다고 했다.


9개월간 수도원 머물며 센터 설계

승 대표는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문화영성센터, 마산교구 명례성지 기념성당 등 가톨릭 관련 시설뿐 아니라 부산 구덕교회, 하양 무학로교회, 조계종 공주 불교문화센터 등 수많은 종교시설을 설계했다. 2024년 5월 문을 연 왜관 수도원 문화영성센터가 가장 최근 작품이다. 그는 9개월간 왜관에 머물며 수도자처럼 지냈다.

“피정센터는 일시적으로 경계 밖으로 나가 자신을 다듬고 오는 시설입니다. 그래서 피정에 참가하는 분들이 모든 공간에서 절박한 마음이 생기도록 설계했죠. 아늑하고 편안한 분위기는 아니지만, 수도원 전체에 영성이 흐르는 느낌이 들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과 그림자가 방향에 따라 다르게 보일 겁니다.”

승 대표는 “건축이 삶을 바꾼다”며 “건축가는 어떤 면에서 성직과 비슷하다”고 했다. “저는 한 사람의 삶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게 건축이라 생각합니다. 집은 사람에게 매우 큰 영향을 줍니다. 좋은 집을 지으면 좋은 삶을, 나쁜 집을 지으면 나쁜 삶을 줄 수도 있죠. 건축가는 다른 사람의 삶에 관계된 직업입니다. 그래서 직업이 아니라 소명으로, 어쩌면 성직으로 받아들이고 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승효상은

승효상은 서울대 건축공학과 졸업 후 한국 건축의 거장 김수근의 문하를 거쳐 빈자의 미학, 지문 등 건축 키워드를 바탕으로 땅과 건축, 도시의 관계를 풀어내 온 건축가다. 2007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 5대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위원장, 서울시 총괄건축가 등을 지냈다.

이상도 선임기자 raelly1@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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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6-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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