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선한 목자 옆에 있던 착한 평신도, 장일순 요한 - (5·끝) 가련한 생명을 보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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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란. 장일순은 아들처럼 여기던 김민기의 아침이슬을 즐겨불렀는데, 이를 글씨로 남겼다.
글을 쓰지 않고 글의 씨를 뿌린 사람
청하는 이 누구에게나
글씨와 난초 그림 값없이 내어줘
가난한 대중 속에서 찾은 거룩함
풀 한 포기 새 한 마리도 ‘하느님 생명’
아시시 프란치스코 이야기 즐겨 해
유·불·도·동학 사상 가리지 않고
한살림 운동으로 생명의 씨 뿌려
장일순은 글을 남기지 않았다. 책 한 권 펴낸 적도 없다. 남아있는 것은 강연 녹취록뿐이다. 항상 가깝게 지냈던 이현주 목사가 어느 날 “선생님은 왜 글을 쓰지 않으십니까?”라고 물었던 적이 있다. 그때 장일순은 이렇게 답했다. “한참 세월이 수상할 적에 필적을 남기면 괜히 여러 사람 다치겠더구먼. 그래서 편지는 말할 것도 없고 일기도 쓰지 않게 됐지. 그 버릇이 여직 남아서?.” 말없이 한 생애를 버티고 있는 사람도 많고, 산천초목도 말없이 순리에 따라 살고 있다. 아동문학가이며 목사였던 이현주는 “선생님은 ‘글’을 쓰시지 않고 ‘글의 씨’를 쓰시니 저보다 덜 참담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장일순은 사회개혁가이면서 동시에 원주에선 글씨로 더 유명하다. 유신정권 때는 박정희를 미워하지 않기 위해 ‘청강(靑江)’이란 호를 썼고, 생명운동에 나섰던 1980년대 초기부터 ‘무위당(无爲堂)’이라는 호를 사용했다. 이를 두고 “사람의 욕심을 채우지 않고 하늘의 뜻에 따라 살자는 뜻”이라 하였다. 1988년 한살림운동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서울 인사동 ‘그림마당 민’에서 전시회를 열었을 때는 ‘일속자(一粟子)’, ‘좁쌀 한 알’이라는 호를 지었다. “이 좁쌀 하나에 하늘과 땅과 온 우주가 다 들어있다”는 뜻에서다. 그리고 ‘이암(夷菴)’이란 호를 사용하기도 했는데, 사람들 눈에 뜨이지 않게 숨어 사는 “편안한 집”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사람이 보이는 것만 너무 하면 재미가 없어. 안 보이는 가운데 생활하는 그런 사람이 좋은 거야. 보이면 아주 피곤해. 그런데 안 보이면 편하더란 말이야. 그래서 자호를 ‘보이지 않는 집’으로 했던 거야. 몸뚱이도 하나의 집이 아닌가?”
붓글씨 쓰는 무위당.
길가에 뒹구는 잡초처럼
장일순에게는 글씨만큼 유명한 것이 ‘사람의 얼굴을 닮은 난초(의인화, 擬人蘭)’인데, 심상덕은 장일순의 난초에서 “맑은 품성과, 날카로움은 없지만 강인한 생명력이 느껴진다”고 했다. 밟혀도 다시 일어서는 ‘잡초 같은 난초’라는 것이다. 줄기를 의연히 세우고 꽃을 피워내면서, 폭력까지 품어내는 생명의 씨앗이 들어 있는 난초라고 했다. 장일순의 난초들은 한결같이 낮은 곳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거기서 낮게 빛나는 ‘겸손’이 느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장일순의 난초를 민초(民草)의 모습을 떠오르게 하는 ‘중생난(衆生蘭)’이요 ‘풀뿌리난’이라고 부른다.
“내가 생활 속에서 보니까 잡초 하나의 경지도 사람이 요새 못 따라가고 있어요. 내가 손님을 만나서 술 한 잔 기울이고 원주천 둑방길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는데, 길바닥에 서 있는 풀 하나가 말이지, 대지에 뿌리를 박고 있어. 주야로 오가는 사람들의 발에 치이고 짓밟혀도 다음 날 아침에 가면 다시 우뚝 자연스럽게 서 있거든. 대단한 거지. 그걸 인간이 할 수 있겠냐 이 말이야. 내 그림은 난초라기보다는 자연과 노방에 흐트러져 있는 풀, 잡초라고 해야 되겠지. 그냥 풀 그림이지.”
장일순은 청하는 사람에겐 누구에게나 값없이 글씨와 중생란을 내어주었다. 원주에선 어려움이 생기면 무조건 봉산동 장일순 댁으로 달려가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장일순은 그이에게 꼭 필요한 말을 글씨에 담아 내주었다. 그래서 장일순의 글씨와 서화에는 수신인이 누군지 적혀 있다. 장일순에게 글씨란 세상과 소통하는 수단이었고, 글씨를 쓰는 사람이나 글씨를 받아든 사람이나 수행하는 마음을 지니게 되었다.
서재에서 장일순 내외.
해월 최시형을 그리워하며… 한살림 운동
소설가 김성동은 장일순을 “유가(儒家)인가 하면 불가(佛家)요 불가인가 하면 노장(老莊)이요 노장인가 하면 또 야소(耶蘇, 예수)의 참얼을 온몸으로 받아 실천하여 온 독가(督家)”였다고 말한다. 장일순은 가난한 대중 속에서 거룩함을 발견할 수 있다면 어떤 사상도 마다하지 않았다. 유학을 배경으로 서학을 받아들였으며, 동학에서 생명운동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발견했다. 특히 하느님을 모시는 데서 모든 일을 시작하자는, ‘시천주(侍天主)’ 사상을 좋아했다. 도남서원에서 띄운 ‘통문’은 동학을 이렇게 설명한다. “(동학도들은) 하나같이 귀천의 차등을 두지 않으니 백정과 술장사들도 오고, 엷은 휘장을 치고 남녀가 뒤섞여 있으니 홀어미와 홀아비가 찾아온다. 또 재물이 있든 없든 서로 돕기를 좋아하니 가난한 이들이 기뻐했다.”
수운 최제우는 동학과 서학은 “도(道)는 같으나 이치는 다르다”(道則同也 理則非也)고 했다. 바라는 바는 같으나 표현방식이 다르다고 말해도 좋겠다. 특히 해월 최시형은 한글 가사체의 「용담유사」(龍潭遺詞)를 엮어서 보급했는데, 여기선 ‘천주’나 ‘지기(至氣)’라는 용어 대신에 ‘한울님’이라는 우리말로 통칭하고 있다. 한문을 터득하지 못한 상민이나 천민·부녀자들을 위한 배려였다. 한편 장일순은 산상설교와 아시시 프란치스코를 즐겨 이야기했는데, 풀 한 포기 새 한 마리도 ‘하느님의 생명’이라고 했다. 프란치스코는 들판에서 풀 포기나 벌레, 새들과 대화하며 “그 만나는 자리마다 하느님이 계심을 알았다”고 전했다.
장일순은 법안선종(法眼禪宗)에서 주로 말하는 “천지여아동근(天地與我同根)이요, 만물여아일체(萬物與我一體)”라는 말을 즐겨 했는데, “하늘과 땅은 나와 한 뿌리요, 세상 만물은 나와 한 몸이나 다를 바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세상 만민은 다 예수님 말씀대로 한 형제요, 온 우주 자연은 나와 한 몸이나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지닌 장일순이 시작한 운동이 ‘한살림’이다. 원주에서 시작된 생활협동조합 방식으로 생산자와 소비자가 만나는 도농 직거래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1989년 10월 29일 대전 신협연수원에서 한살림모임 창립총회가 열렸을 때 장일순은 ‘시(侍)에 대하여’란 주제로 강연하면서 동고동락(同苦同樂)하며 “더불어 함께 사는” 공생(共生)을 강조했다. 이날 박재일이 한살림모임 의장을 맡았고, 김지하·김민기 등으로 실무진이 꾸려졌다.
묘지석.
장일순은 1991년에 위암 진단을 받고, 투병생활을 하다가 1994년 5월 22일 67세의 나이로 봉산동 집에서 “내 이름으로 되도록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떠났다. 유족들은 장일순의 뜻에 따라 간소한 삼일장으로 정했고, 전국에서 몰려든 3000여 명이나 되는 조문객을 맞이했다. 동네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고 “장일순이 이렇게 유명한 사람이었어?” 하면서 놀랐다. 서예가 채희승은 참선하듯 눈을 지그시 감은 사람의 얼굴을 한 ‘중생란’을 떠올리며, 장일순이 남긴 ‘문자사리’로 “밤이면 달처럼 사랑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 / 낮이면 해처럼 사랑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라는 글씨 하나를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