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레네산맥에서 내려오는 차가운 바람이 이는 아침에도, 마사비엘(Massabielle) 동굴 앞에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휠체어를 밀며 온 가족, 목발을 짚은 노인, 어린아이 손을 잡은 어머니. 저마다 다른 언어로 기도하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 이들은 동굴 앞에 다다르면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 같은 자리에 손끝으로 바위를 가만히 짚는다. 인구 1만 5천 명의 소도시에 해마다 수백만 명이 모여드는 곳, 프랑스 ‘루르드 성지’다.
18번의 발현 그리고 결정적인 한마디
루르드의 이야기는 1858년 14세 소녀 베르나데트 수비루의 증언에서 시작된다. 베르나데트는 그해 2월 11일부터 7월 16일까지 마사비엘 동굴에서 모두 18차례 ‘흰옷을 입은 여인’을 보았다고 말했다. 그는 그 여인과 함께 묵주기도를 바쳤고, 회개와 보속, 죄인들을 위한 기도의 메시지를 들었다고 전했다. 또 동굴 안 샘에서 물을 마시고 씻으라는 요청도 받았다고 했다.
가장 중요한 순간은 1858년 3월 25일 찾아왔다. 베르나데트는 그 여인이 자신을 “나는 원죄 없이 잉태된 이”라고 밝혔다고 증언했다. 이는 비오 9세 교황이 1854년 선포한 ‘성모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리와 맞닿아 있었다. 여러 해에 걸친 조사 끝에 1862년 타르브 교구장 베르트랑-세베르 로랑스 주교는 루르드 발현을 공식 인정했다.
이후 루르드는 세계적인 성모 순례지로 자리 잡았다. 1907년 비오 10세 교황은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을 보편 교회 전례력에 넣었고, 1933년에는 베르나데트가 성인품에 올랐다. 오늘도 루르드를 찾는 순례자들은 마사비엘 동굴 앞에서 기도하며, 병든 이와 지친 이, 위로를 찾는 이들을 향한 성모님의 초대를 되새긴다.
동굴에서 강 건너까지
총면적 약 53만m²의 루르드 성지는 마사비엘 동굴을 중심으로 성당과 경당, 광장과 샘터, 가브 강 건너편 기도 공간까지 아우르는 복합 순례 공간이다.
동굴 위 언덕에는 시대를 달리해 세워진 성당들이 층을 이루며 자리한다. 가장 먼저 세워진 곳은 1866년 착공된 크립트(Crypt)다. 동굴 바로 위에 자리한 성당으로, 발현 직후 루르드의 첫 공식 성당이라는 역사적 상징성을 지닌다. 베르나데트가 루르드를 영원히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미사에 참여한 자리로 성녀의 유해 일부가 모셔져 있다.
크립트 위로는 네오고딕 양식의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 대성당이 솟아 있고, 아래쪽 전면에는 로마노-비잔틴 양식의 로사리오 대성당이 자리해 광장 전례의 장엄한 배경이 된다. 광장 지하에는 1958년 발현 100주년을 기념해 축성된 성 비오 10세 대성당이 있다. 눈에 잘 띄지 않는 지하 공간이지만 2만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국제 미사와 병자 미사, 대규모 집회가 열리는 곳이다.
대성당 오른쪽 언덕에는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걷는 십자가의 길이 펼쳐진다. 1912년 조성된 이 길은 총 1500m에 이르며, 자연 지형의 오르막과 내리막을 따라 이어지는 조용한 개인 묵상의 공간이다. 강변 가까이에는 2008년 조성된 십자가의 길도 있어, 거동이 불편한 순례자도 수난의 신비를 함께 묵상할 수 있다.
베르나데트의 발자취를 따라
성지 담장 밖 루르드 시내에 베르나데트의 삶이 남아 있다. 볼리(Boly) 방앗간 생가는 그가 태어나 열 살까지 살았던 자리다. 산업화의 물결 속에 방앗간 운영이 어려워지며 가족의 삶은 내리막을 걸었고, 1857년 결국 폐쇄된 옛 감옥을 얻어 살게 됐다. 그곳이 까쇼(Cachot)다. 불과 16㎡의 좁은 방에서도 베르나데트의 가족은 작은 제단을 만들고 묵주기도를 바치며 살았다.
가브 강 위의 퐁비외(Pont-Vieux)는 중세부터 이어져 온 돌다리다. 마지막 발현을 제외한 17차례, 베르나데트가 동굴로 건너가던 통로였다. 시내 아스팔트 바닥 곳곳에 박힌 황동 못은 ‘베르나데트의 길(Chemin de Bernadette)’ 표지다. 그 못을 따라 걸으면 성녀가 동굴로 향하던 길을 그대로 밟게 된다.
병자 행렬, 침수, 기적 그리고 밤의 촛불
루르드의 하루는 성지의 정해진 리듬을 따라 흐른다. 새벽부터 마사비엘 동굴과 성당 곳곳에서 미사가 봉헌되고, 묵주기도와 성체 행렬과 강복, 촛불 행렬이 계속된다.
낮 시간의 핵심은 병자 행렬과 성체강복이다. 휠체어와 이동 침대, 들것에 몸을 의지한 병자들이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을 받아 행렬에 참여한다. 병자와 장애인들이 앞줄에 서고,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성직자와 수도자, 순례자들이 그 뒤를 따르며 성체 앞에 함께 무릎을 꿇는다. 가장 아프고 약한 이들이 언제나 공동체의 앞자리에 서는, 루르드만의 풍경이다. 의료진을 포함한 수천 명의 봉사자가 병자와 장애인들을 곁에서 돕는다. 루르드가 전하는 또 하나의 희망의 표징이다.
저녁이 되면 동굴 앞에 촛불이 모인다. 성체 행렬과 촛불 묵주기도 행렬은 주님 부활 대축일이 있는 4월부터 11월까지 열리지만, 순례 시즌 내내 동굴 앞 묵주기도는 계속된다. 베르나데트가 처음 발현을 체험한 그 자리에서 성모님과 함께 묵주기도를 바쳤듯, 순례자들도 같은 기도로 성모님 곁에 머문다. 한국 순례단이 찾은 3월에는 행렬 없이 촛불 묵주기도가 봉헌됐다. 대표 한 명이 선창에 참여하면서, 성모송이 한국어로 동굴 앞에 울렸다.
침수(浸水)는 순례의 중심 체험 가운데 하나다. “가서 마시고 그곳에서 씻으라”는 성모 마리아의 말씀에 직접 응답하는 행위로, 동굴 샘물을 채운 욕조에 온몸을 담그는 예식이다. 코로나19 팬데믹과 시설 개선으로 2020년 문을 닫았던 침수장은 2024년 8월 다시 열렸다.
루르드 하면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기적이다. 발현 이래 수많은 환자가 치유됐다고 전해진다. 그간 7000건 이상의 치유 사례가 보고됐지만, 가장 최근인 2025년 인정된 사례를 포함해 공식 기적으로 발표된 것은 72건에 불과하다. 의학적 검증, 과학적 분석, 영적 심사를 거쳐 진정한 기적 여부가 판단된다. 그 엄격함이 역설적으로 루르드의 기적을 더욱 소중하게 만든다.
루르드와 한국교회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 대성당 중앙 제대 왼편 경당 벽면. 라틴어와 한문 사이, 세로로 흘러내리는 옛한글이 새겨져 있다.
“셩총을 가득히 닙우신 마리아여 네게 하례??나이다.” 19세기 조선 천주교의 고어체로 된 한글 성모송 첫 구절이다. 한국 순례자라면 누구나 그 자리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석판의 봉헌문은 이렇게 전한다. 조선 반도의 선교사들이 바다에서 극심한 위험에 처했다가 원죄 없으신 동정 마리아의 도움으로 구출되었고, 그 은혜를 기억하며 서약을 지켜 이 돌을 세운다고. 연도는 1876년. 리델 주교와 리샤르·블랑 신부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루르드 발현이 공식 인정된 지 불과 14년 뒤였다. 박해의 땅 조선을 오가며 목숨을 걸던 선교사들이 풍랑 속에서 성모님의 보호를 받은 뒤 이 성지를 찾아 석판을 봉헌한 것이다.
루르드와 한국교회의 끈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후에도 루르드의 성모 신심은 루르드 인근 출신이었던 임 가밀로 신부(Camille Bouillon, 1869~1947) 등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을 통해 한국 곳곳에 스며들었다.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순례지, 대구대교구 성모당,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 루르드 동굴 등 한국 땅 곳곳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가장 약한 이들이 앞자리에 서는 곳
오늘의 루르드는 발현지를 보존하는 박물관이 아니다. 가장 느리고 가장 약한 이들이 공동체의 맨 앞자리에 자리하는, 살아 있는 순례의 현장이다. 병이 낫는 기적이 일어나는 곳이기도 하지만, 병이 낫지 않아도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다는 확신을 얻어 가는 곳이기도 하다.
프랑스 타르브-루르드교구 전임 교구장 쟈크 페리에 주교는 2008년 루르드 성모 발현 150주년을 기념해 가톨릭신문과 나눈 대담에서 “루르드를 순례하는 사람들은 단지 치유를 바라는 것이 아니고, 희망을 품기 위한 힘과 용기를 얻으러 오는 것”이라고 했다.
루르드 성모 마리아의 메시지는 회개와 기도 그리고 모든 고통받는 이들과의 연대였다. 그 메시지는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168년 전과 같은 간절함으로 동굴에 모인 신자들의 입술에서, 순례자들의 손끝에서 면면히 이어진다.
▶ https://www.lourdes-france.org/ 루르드 성지 공식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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