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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고개마을에 뿌리내린 100년 신앙, 신현공소

[리길재 기자의 공소(公所)를 가다] 19. 안동교구 문경본당 신현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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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구 문경본당 신현공소 전경. 신현공소는 누구나 언제든 드나들도록 대문을 달지 않았다.


하늘재와 영남대로가 품은 새 고개마을

안동교구 문경본당 신현공소는 경북 문경시 마성면 신현1길 7에 자리하고 있다.

마성면 신현리는 문경에서 남쪽으로 약 8㎞ 떨어진 마을로 오정산을 등지고 조령천과 영강을 끼고 있어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사람 살기 좋은 곳이다. 그래서 신현리는 신라 시대 때부터 교통과 군사 요지였다. 특히 삼국시대에 축성된 ‘고모산성’은 임진왜란과 6·25전쟁 격전지로 유명하다.

고개는 산과 산을 연결하는 낮은 능선 길을 일컫는다. 문경에는 하늘재·새재·이화령 세 고개가 있다. 하늘재에서 조령천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면 마성면 신현리를 만난다. 이 고갯길은 18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길이다. 신라 아달라 이사금이 고구려·백제와 맞닿은 국경을 확보하기 위해 서기 156년에 하늘재와 마고산성, 고모산성, 상주를 잇는 길을 조성했다.

신현리(新峴里)는 말 그대로 ‘새 고개마을’이다. 조선 시대 때 이곳에 한양에서 경상도 동래까지 이어진 960여 리, 약 380㎞ 영남대로의 ‘안부역’(安阜驛)이 있었다. 또 이곳에 마성면에 있던 회연원 외에 1729년께 새원 곧 ‘신원’(新院)이 설치되면서 많은 이주민이 마을을 이뤄 신현리라 불렀다.

신현공소 마당. 예수성심상과 성모상, 종탑과 조경석, 관상목으로 단장돼 있다.


조선의 대로에는 요지마다 역(驛)과 원(院), 주막이 있었다. 지형과 교통량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30리(약 12㎞)마다 역을, 10리(약 4㎞)마다 원을 뒀다. 역은 중앙과 지방간의 왕명과 공문서를 전달하고 물자를 운송하며, 사신 왕래에 따른 영송과 접대 및 숙박 편의를 제공하는 일을 맡아 했다. 원은 상인이나 일반 여행자들의 숙식을 위해 설치된 시설이다. 주막은 원이 쇠퇴하면서 번성한 시설로 개인 영리를 위해 운영하던 여관이다. 주막에서는 술이나 밥을 먹으면 보통 음식값 외에 숙박료를 따로 받지 않았다. 그래서 손님에게 침구를 따로 제공하는 일은 드물었다. 먼저 들어온 사람이 아랫목을 차지했는데, 좁은 방에 10여 명이 혼숙했다. 가경자 최양업 신부가 문경 고갯길들을 넘나들 때 주막에서 고된 몸을 뉘었고, 새재 입구 오리터주막(진안리 성지)에서 선종했다. 조선 시대 문경 일대는 유곡역과 요성역, 조령원과 견탄원, 초곡주막과 돌고개주막, 달지주막이 유명했다.

일제 강점기 마성면은 수탈의 현장이었다. 일제는 연계된 모든 물자 수송 경로를 활용해 이곳 석탄과 나무를 약탈했다. 지금도 마성면 산등성이 일부에는 벌채 흔적이 남아있다. 6·25전쟁 때에는 이곳으로 많은 피난민이 몰려들어 정착했다. 먹을 것도 잘 곳도 없는 그들에게 주민들은 농사를 포기하고 논밭을 거처로 내주었다.

과거에 역과 원으로 또 탄광으로 번창했다면 오늘날 신현리는 고요하다. 속리산에서 발원한 영강(潁江)과 새재와 하늘재 마루에서 샘솟은 조령천(鳥嶺川)이 신현리 고모산성 아래에서 하나로 합쳐져 낙동강으로 흘러간다. 이 느린 물길처럼 주민들의 일상도 느긋하고 여유롭다. 한 획으로 이어온 시간의 지평이 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성숙의 동력을 작동시키기라도 한 듯 만나는 사람마다 낯선 나그네를 넉넉한 미소로 환대한다.

신현공소 교우들도 마찬가지이다. 불쑥 찾아왔는데도 놀라거나 언짢아하지 않았다. “오는 길 고생 많았다”며 시원한 물을 건네고 먹을거리도 슬며시 내놓았다. “천천히 둘러보고 우리 공소 자랑 많이 해주이소”라며 멋쩍게 웃고는 무심히 돌아선다.

신현공소는 제단과 회중석의 경계가 없다. 같은 높이의 바닥에서 제대가 둘의 경계를 이룬다.


1925년, 신현리에 세워진 신앙의 터전

신현공소는 신현리 한가운데에 있다. 이곳에 가톨릭 신앙공동체가 자리한 것은 1920년대이다. 경북 선산에 살던 이석희(요한) 가족이 1921년 이곳으로 이사 왔다. 이들 가족은 때마침 1922년 9월 문경 점촌에 공평본당이 설립돼 주일이면 험한 산길을 넘어 미사에 참여하고 돌아왔다. 이들의 선교로 신현 마을에 예비신자가 한두 명씩 늘자 초대 공평본당 주임 김문옥 신부는 1925년 신현공소를 설립하고 초대 회장으로 이석희씨를 임명했다. 이 회장은 자기 집 헛간을 고쳐 공소로 사용했으나 늘어나는 예비 신자들을 감당 못 해 주일이면 마당에 멍석을 깔고 공소 예절을 했다. 이렇게 신현공소는 문경본당 관할 4개 공소 가운데 가장 역사가 깊다.

영세자가 늘면서 신현공소 교우들은 공소 운영과 건립 자금 모금을 위해 주일마다 조금씩 쌀을 봉헌했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떠나고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의 독일인 신부가 1957년 5월부터 문경 일대를 사목했다. 그러다 1958년 12월 7일 문경본당이 설립됐다. 가은본당 주임이던 에르네스토 지베르츠(한국명 지인수) 신부가 문경읍 하리 2-1번지에 대지 2280평을 사들여 적벽돌로 성당 60평을 신축해 1958년 12월 7일 부임했다.

지베르츠 신부는 신현리 마을 한가운데에 있던 구 마성면사무소 대지를 매입해 공소 건물을 새로 지어 1959년 봉헌했다. 신현공소는 이 지역 가톨릭 신앙의 못자리일 뿐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돕는 구호사업소 역할을 톡톡히 했다. 미국 카리타스에서 들어온 구호물자를 공소에서 마을 주민 모두에게 나눠줬기 때문이다. 이 일로 구호물자를 조금이라도 더 받기 위해 신현리 전 주민이 예비신자로 등록해 교리를 배우고 공소 예절에 참여해 장사진을 이뤘다.

신현공소 감실. 사제가 상주하고 있어 매일 미사가 봉헌되고 성사가 거행되고 있는 것이 이곳 교우들의 큰 자랑이다.

신현공소 내부. 흰색으로 천장과 벽을 칠해 좁은 공간임에도 깊이감이 있다.


대문 없는 공소, 누구에게나 열린 쉼터

신현공소는 남다른 자랑이 있다. 서울대교구 남학현 신부가 요양차 이곳에 내려와 2009년 8월부터 공소에 머물면서 매일 미사를 봉헌하고 성사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남 신부 덕분에 공소도 깔끔하게 보수됐다. 바닥도 새로 깔고 십자가의 길 14처도 새로 설치했다. 무엇보다 성체가 모셔져 있는 감실이 있다. 신현공소 교우들은 늘 켜져 있는 감실의 성체등을 보면서 항상 감사 기도를 드린다고 한다.

신현공소는 대문이 없다. 공소 대지 경계를 알리는 낮은 담장은 있지만, 누구나 언제든 마음껏 드나들도록 아예 대문을 만들지 않았다. 건물은 공소와 사제관 2동이 있고 아담한 마당은 조경석과 관상목으로 꾸며져 있다. 공소 건물 앞에는 예수 성심상과 성모상이 설치돼 있고, 낡은 철제 종탑도 오른편 귀퉁이에 한자리 차지하고 있다.

공소 내부는 단순하게 꾸며져 있다. 제단과 회중석의 경계가 없다. 같은 높이의 바닥에서 제대가 둘의 경계를 이룬다. 제대 왼편에 감실이 있고, 청동 제단 십자가 양 옆으로 예수 성심상과 성모상이 있다. 천장과 제단 벽을 제외한 벽 3개 면을 모두 흰색으로 칠해 좁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깊이감을 더해준다. 이들 3개 벽면에는 황동 부조 십자가의 길 14처가 설치돼 있다.

조선 시대 봇짐 장수와 등짐 장수들의 숙소로, 어쩌면 가경자 최양업 신부도 머물렀을 쉼터로 사랑받던 신원(新院) 신현마을이 지금은 도시 교구 사제와 농촌 교우가 함께 사랑의 공동체를 이룬 새원(新院)으로 역사의 지평을 쌓아가고 있다.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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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6-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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