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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가 후손, 한국사 연구하다 천주교에서 새 세상 만났다

[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한국 평신도 사도직 활동의 모범, 류홍렬 라우렌시오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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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홍렬(라우렌시오) 선생.


뿌리 깊은 유교 집안서 태어나

서당에서 천자문·소학 배우고

기미년 독립운동 행렬 목격


서울 유학 중 15세에 어머니 여의고

상실감 딛고 경성제대 예과 입학




류홍렬 (라우렌시오, 1911~1995) 선생은 한국사를 전공한 역사학자이자 교육자, 대학 행정을 책임졌던 행정가였다. 또 그는 천주교 신자였고, 한국 천주교회사를 정리한 최초의 한국인이었다. 나아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한국 천주교 평신도 운동의 제도화를 이끌고, 순교 복자들의 시성 운동을 본격화시킨 대표적 평신도 지도자였다. 우리가 특히 그를 기억하는 이유는 이러한 그의 삶이 초창기 신앙의 선조들이 걸어왔던 여정과 매우 유사했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의 신앙 여정에도 모범이 되기 때문이다.

18세기 말, 신앙의 선조들은 혼란에 빠진 조선을 개혁하고자 서학(西學)을 공부했다. 서학이 말하는 인간의 존엄성·평등사상은 성리학이 감당하지 못하던 조선 후기의 혼란을 잠재우고, 보다 나은 세상을 열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리라 기대됐다. 이내 선조들은 서학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이 땅에 천주교회를 설립했다. 그 기쁨도 잠시, 그들은 조선 왕조의 박해를 맞이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끝까지 신앙을 지켜나갔다. 이러한 선조들의 노력과 희생 덕분에 천주교는 한국 사회에 깊이 뿌리 내릴 수 있게 되었다.

류홍렬 선생은 민족의 미래를 고민하며 진리를 탐구했던 선조들처럼, 민족의 얼을 정리하고 지켜내기 위해 평생 한국사를 연구했다. 또 천주교를 통해 성리학 너머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순교했던 선조들처럼 한국사를 공부하며 성리학의 한계를 절감한 그는 천주교로 개종하여 평생 교회를 위해 헌신했다. 이 점에서 류 선생은 신앙 선조들과 흡사한 신앙의 여정을 걸어왔다. 따라서 그를 기억하는 것은 선조들이 지녔던 신앙의 열정이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 안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으며, 우리 역시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고, 또 살아갈 수 있음을 깨닫기 위함이다. 지금부터 류홍렬 선생의 삶과 학문·신앙 업적들을 돌아보면서 그의 삶 안에서 하느님 섭리를 발견하고 이를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시는지 되새겨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1925년 2월 장단공립보통학교 시절 류홍렬 선생. (3열 왼쪽에서 네번째)


유복했던 어린 시절

“어린 시절 마을 뒤에 있는 뫼에 오르면 눈앞에 기름진 벌판이 보이고, 저쪽으로는 임진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어요. 멀리 동남쪽에는 서울 삼각산의 세 봉우리가 보이고, 북쪽으로는 백학산과 개성의 송악산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류홍렬 선생은 1911년에 경기도 장단군 군내면 정자리(현 파주시 군내면)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임진강이 흐르고 남으로는 서울의 삼각산, 북으로는 개성의 송악산이 보이는 아름다운 마을이지만, 휴전선 근처에 있어 현재는 민간인 통제구역이다. 산과 가까운 환경 때문이었는지 그는 어려서부터 산을 좋아했고, 꾸준한 산행을 통해 백두산 천지를 걸어서 오를 정도로 평생 건강한 체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류 선생의 가문은 고려 때부터 높은 벼슬을 지내왔다. 그러나 그의 13대조 류관(1484~1545)이 1545년(명종 1년)에 일어난 을사사화로 누명을 쓰고 사형을 당하자, 후손들은 벼슬에 마음을 두지 않게 되었다. 참고로 류관은 선조(1552~1608) 때 신원되었다. 이후 류 선생의 5대조 할아버지가 장단으로 터를 옮겼는데, 그는 바로 그곳에서 태어났다. 그가 기억하는 바와 같이 장단에서 그의 집안은 대대로 명문가로 불렸고, 그의 집을 종가(宗家)로 하여 주변에 네 채의 작은 할아버지 댁이 모여 살았다. 이처럼 뿌리 깊은 유교 집안에서 태어난 그의 성장 배경은 그가 한국사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 동인이었다.

“저는 우리나라 역사와 끊을 수 없는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선조들이 묻혀있는 고장에서 태어나 어릴 적에는 서당에서 천자문과 소학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기미년 독립운동 행렬을 눈으로 보았지요.”

류 선생의 집안은 일찌감치 근대 교육에 눈을 떴다. 그의 아버지는 ‘수원농림학교’를 다녔다. 수원농림학교는 1904년에 대한제국 학부(교육부)가 설치한 ‘농상공학교’의 농과가 1906년에 독립되면서 개편된 근대 교육기관으로, 오늘날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의 시초다. 이처럼 근대 교육을 경험한 그의 아버지는 자녀인 류홍렬과 그의 형, 그리고 여동생까지 장단공립보통학교를 다니게 하여 근대 교육을 익히게 했다.

 
1927년 서울 유학 시절.


평탄하지 않았던 서울 유학생활

“우리 집안은 장단 지방에서도 양반 행세를 하면서 어렵지 않은 살림을 하고 있었고, 글방을 두어서 한문을 배우게 하고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류 선생은 집안의 든든한 지원 속에서 공부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는 형과 함께 장단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5년 4월에 서울의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는 대한제국 고종 황제(1852~1919)의 명으로 세워진 한국 최초의 관립 중등학교였는데, 일제 강점기에도 우리나라에서 제일가는 학교로 손꼽히고 있었다. 이런 학교에 류 선생 형제가 함께 진학했다는 것은 두 형제의 명석함과 꾸준한 노력 그리고 가족의 지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두 형제의 서울 진학, 그것도 국내 최고 학교의 입학은 집안의 큰 경사였다.

“그때 우리 집안의 즐거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특히 73세의 조부께서는 당신의 두 손자가 우리나라의 일등 학교에 입학했다는 것을 자랑하기에 바쁘셨지요.”

두 형제의 서울 진학 확정 후 그의 집안은 서울에 집을 한 채 구매했다. 두 형제가 머물 곳을 마련한 것이었다. 집은 오늘날 북촌 한옥 마을과 창덕궁 사이 원서동에 위치했다. 그리고 두 형제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어머니가 함께 서울로 이주했다. 하지만 그들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머니가 이듬해 10월에 갑자기 돌아가셨던 것이다. 이때 류 선생의 나이는 15세였다. 늘 곁에 계셨던 어머니의 부재는 두 형제의 유학살이에 큰 풍파를 일으켰다. 그들은 생각지도 못한 자취생활을 하며 학업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불행 중 다행인지 서모(庶母)가 서울로 와 두 형제의 살림을 맡아주었다. 이로써 그들의 삶은 다시 안정을 찾아갔지만, 갑작스레 비어버린 어머니의 자리를 채우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새어머니가 오시니, 우리들의 서울 생활은 점차 안정을 찾아갔어요. 하지만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마음 한편이 텅 빈 느낌이었지요. 그래서 그때부터 저는 일요일이면 예배당에 나갔어요. 그곳에는 저를 좋아하던 목사님이 계셨는데, 목사님 집에 찾아가서 인생에 대한 여러 말씀을 듣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류 선생은 학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19세에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교) 예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당시 식민지 대학의 ‘예과’는 고등학교에 준하는 대학예비과정에 해당한다. 고등학교가 있어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던 일본의 교육제도와 달리, 식민지 조선은 고등보통학교, 곧 오늘날의 중학교가 최종 교육과정에 해당했다. 이는 조선인이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길을 일제가 제도적으로 제한했음을 의미했다. 따라서 대학에 들어가고 싶은 조선 학생들은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바로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고 예과를 별도로 이수해야만 했다.<계속>

 


김선필(베드로, 서강대학교 신학연구소)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가톨릭평화신문 공동기획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6-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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