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평화신문에 음악 칼럼을 기고한 지도 어느덧 두 해다. 부활절의 마지막 주일에 마지막 원고를 쓰게 되어 기쁘다. 처음 원고를 쓸 때는 음악 용어를 가능한 한 쉽게 풀어 설명하고, 가톨릭 전례와 맞닿아 있는 클래식 음악을 소개하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름다운 선물을 조금이나마 더 깊이 누릴 수 있는 힌트를 전하고자 했다. 하지만 지난 원고들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니 욕심만 앞섰을 뿐, 글은 두서가 없고 설득력도 충분하지 못했다. 성현들이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돌에 새기는 일과 같으니 섣불리 붓을 들지 말라”고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위로가 되었던 것은 가톨릭평화신문 편집부의 정성 어린 손길과 독자들의 따뜻한 응원이었다. 절친한 수녀님은 매주 인상 깊었던 칼럼의 한 문단을 손수 다시 써서 보내주셨고, 미사 후 신부님과 인사를 나누며 “칼럼 잘 읽고 있습니다”라는 한마디를 들을 때마다 마음 깊이 감사가 차올랐다.
이 칼럼을 연재하는 동안 가장 많이 했던 고민은, 과연 내가 주님 말씀을 옮길 만한 그릇이었는가 하는 자문이었다. 주님의 뜻에 따라 곡을 쓰고 사랑받으며 걸작을 남긴 위대한 작곡가들 앞에서, 나 같은 소소한 사람이 감히 그 반열을 바라볼 수 있을까.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의 재능을 지닌 이들이 음악으로 주님을 드높이는데, 이 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남아 있기는 한 것일까.
그들의 작품과 삶을 함께 들여다보며 한 가지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놀라운 재능을 타고났지만, 그에 못지않은 노력과 인내로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냈다는 사실이다. 모차르트는 어린 시절부터 끊임없는 연습으로 기초를 다졌고, 명성을 얻은 뒤에도 새로운 음악을 배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바그너는 자신의 음악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20년 넘게 무명과 가난을 견디며 사람들을 설득했고, 조소와 불신의 시선을 감내했다. 쇼팽은 생의 마지막까지 바흐의 「평균율」을 곁에 두었고, 슈만은 손가락이 망가질 정도로 연습을 거듭했다. 로드리고는 시력을 잃은 뒤에도 같은 곡을 수백 번 들으며 악보로 옮기는 연습을 하였고, 베토벤은 난청 속에서도 불후의 명곡들을 남겼다.
주님의 영광을 말로 고백하는 작곡가는 많지만, 주님께서는 준비된 그릇에 그만큼의 축복과 자비를 부어주신다. 주님을 사랑할수록 우리에게 주어진 재능을 꽃피우기 위해 더 성실히 노력해야 하는 이유다. 주님께서는 말로 드러내는 사랑보다 이웃을 위해 애쓰는 삶을, 고백으로 외치는 믿음보다 그분을 모실 그릇이 되기 위해 묵묵히 준비하는 마음을 더 기뻐하신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바늘귀에 낙타가 지나가는 것보다 더 힘들다고 하신 주님이지만 이를 물어본 젊은이에게 애정 어린 시선을 주신 것은 그가 노력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그릇이 되기는 쉽지 않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애써보는 것이 주님의 마음에 조금이나마 들지 않을까 한다.
마지막 음악으로 베토벤의 ‘바이올린·첼로·피아노를 위한 삼중 협주곡’ 2악장을 골랐다. 한 명이 아닌 세 명의 독주자가 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하며 무언가를 갈구하는 음악이, 기도가 아닐까 싶다.
//youtu.be/452nsCCzIJs?si=CwLNTvuZgw3IabB1
작곡가 류재준
※ 지난 2년간 연재해주신 필자와 코너를 사랑해주신 독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