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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빼앗긴 이유 밝히고 싶어”… 한국사 연구하다 천주교 입교

[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한국 평신도 사도직 활동의 모범, 류홍렬 라우렌시오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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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학부 시절(1935.3.25.).


동기 열 명 중 혼자 한국사 전공 선택

졸업 논문 동양사대사전에 등재

신진연구자로서 학계의 주목 받아


성리학 한계 깨닫고 실학·서학에 관심

서정덕 선생과 교류하며 신앙으로 발전




한국사 연구자로서의 첫걸음

2년의 예과 과정을 수료한 류홍렬 선생은 1932년에 학부 과정에 들어갔다. 그는 사학과를 전공으로 선택했다. 당시 사학과에서는 동양사·일본사·한국사(조선사) 등을 세부 전공으로 정할 수 있었다. 그는 한국사를 세부 전공으로 정했다. 동급생 열 명 가운데 한국사를 선택한 학생은 오직 그밖에 없었다. 주변에서는 이러한 그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일제가 지배하고 있던 그 시절에 한국사를 전공한다는 것은 일자리를 얻기 힘들다는 뜻이었고, 일제의 지속적인 감시를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저는 한민족이 유사 이래 처음으로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게 된 이유를 밝혀보고 싶었습니다. 비록 일본이 무력으로 조선을 합병했다 할지라도 한국의 역사는 그 자체로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한국사를 전공하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다름 아닌 그의 아버지 때문이었다. “엄격하신 저의 부친께서는 우리 형제들에게 우리 조상들의 이야기와 나라를 잃은 민족의 살길을 때때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리하여 한국사를 전공한 그는 학부 과정 동안 경성제국대학 규장각에 보관된 「조선왕조실록」 300여 권을 비롯해 여러 문집을 검토해 나갔다. 그리고 1935년 오랜 노력 끝에 「조선에 있어서의 서원의 성립」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며 대학을 졸업했다.

“조선에 있어서 서원은 성리학의 전래 이후 그를 신봉하고 생활화하게 된 조선 왕조에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성리학은 고려 말기인 1290년에 안향(1243-1306)이 북경으로부터 주자의 저서 등을 얻어오면서 전파되었고, 백 년 뒤에 조선왕국을 이룩한 조선에서 국가적 지도 이념으로 신봉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조선 왕조가 들어선 이후 150년을 지나 11대 임금 중종 37년(1542)에 경상도 풍기군에 백운동서원이 세워지고, 이후 많은 서원이 전국 각지에 세워져 당쟁의 온상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서원 성립의 경위를 밝힌 나의 대학 졸업 논문은 일본인 세 교수의 심사와 구두시험을 거쳐 ‘우’라는 평점을 받고, 저는 대학을 졸업하는 즐거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1964년 1월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국제동양 학자대회에 참석한 류홍렬(왼쪽).


대학 졸업 후 류홍렬 선생은 경성제국대학 부설 ‘조선 민속학 연구실’의 조수(조교)로 3년간 일했다. 그곳에서 그는 두 명의 일본인 교수가 편찬하고 있던 「조선무속의 연구」라는 책의 발간 작업을 도왔다. 물론 한국사 연구를 계속 이어나갔던 그는 대학 졸업 논문을 정리하여 학계에 발표할 수 있었다. 조선의 서원을 다룬 그의 졸업 논문은 한국과 일본 사학계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다. 그의 논문은 일본 동경제국대학에서 발간되는 「사학잡지」(史學雜誌)에 그 개요가 실리고, 그의 이름과 논문이 「동양사대사전」(東洋史大辭典)에 등재되기까지 했다.

이처럼 그는 한국사 분야의 신진연구자로서 학계의 주목을 받으며 입지를 다져나갔고, 후일 한국사 분야의 최고 권위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를 위해 그는 연구자로서 자기 본분을 잊지 않고 끊임없이 공부에 매진해왔다. 일례로 애주가였던 그는 밤늦게까지 술을 마신 다음에도 새벽 4시가 되면 어김없이 일어나 공부하고 글을 써 나갔다. 한 번은 조카들과 함께 술을 마셨는데, 모두가 곯아떨어진 새벽에 홀로 일어나 평소처럼 공부를 이어나갔다. 한참 뒤 잠에서 깬 조카들에게 다음과 같이 조언했다.

“술을 좋아해서 마시는 것은 다 좋은데, 다음날 아침 정상적인 삶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마시면 안 된다네.”

이처럼 류 선생은 학자로서 꾸준히 자기 본분을 지켰고, 한국 천주교회사 및 한국 사상사와 관련된 연구 업적을 꾸준히 발표해 한국 문화사 영역을 개척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국가는 이러한 그의 학문적 업적을 인정해 문화훈장 대한민국장(1962), 3·1문화상 학술상(1963), 대한민국 학술원상(1966), 국민훈장 모란장(1972)을 수여했다.

 
1960년 4.19혁명 직후 장면 박사와 함께(왼쪽).


신앙 선조들처럼 서학 공부하다 신앙으로

류 선생은 한국사를 공부할수록 조선 왕조를 이끌어 나갔던 성리학과 그 본거지였던 서원 제도의 한계를 깊이 체감했다. 서원들이 당쟁을 부추기고 나라를 위험에 빠트렸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에 그는 조선 후기에 성리학의 대안으로 부상했던 실학과 서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정치적으로 사원(祠院, 사당과 서원을 아울러 이르는 말)의 유림은 중앙정부의 요인들과 결탁해 당쟁을 유발시키거나 격화시킴으로써 위정부국자(爲政富局者)들을 곤경에 놓이게 하는 일이 거듭되었습니다. 또 사회적으로 사원은 이미 신성한 교육기관으로서의 의의를 잃고 다만 무위도식하는 유생들의 소굴로 바뀌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성리학에서 유래한 서원은 우리 민족사상에 아무런 보탬을 주지 못하고 민족의 분열만을 가져오게 하였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망국적인 당쟁만을 부채질하던 서원에 대한 연구를 그만두고, 이에 대한 반발로 임진왜란 이후 새로이 일어나게 된 실학운동과 서학운동을 연구하기로 하였습니다.”

이 무렵 그는 대학 동기 서정덕(루카, 1910~2011) 선생과 교류를 이어가고 있었다. 서정덕 선생은 대구의 ‘서부자집’으로 유명했던 서상돈(아우구스티노, 1850~1913) 선생의 손자였다. 서상돈 선생은 1907년에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했고, 신심 깊은 천주교 신자였다. 사실 그의 집안은 한국 교회가 설립된 1784년 전후 천주교에 입교할 정도로 뿌리 깊은 천주교 집안이었다. 서상돈 선생의 조부 서치보(요셉, 1791~1840)는 성 이윤일(요한, 1823~1867)과 함께 교우촌(여우목 성지)을 꾸릴 정도로 신심이 깊었으며, 그의 숙부였던 서인순(시몬, 1808~1868)과 서익순(요한, ?~1868), 하느님의 종 서태순(베드로, 1823~1867)은 병인박해 때 순교하기도 했다.

 
혼인 기념 가족 사진(1936.11.2.).


이러한 가풍 아래 성장한 서정덕 선생 역시 평생 교육자이자 신앙인으로 한국 교회와 사회에 헌신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여동생 서정서(벨라뎃다, 1914~2009) 여사를 류 선생에게 소개했다. 그녀는 일본 동경여자대학 가정학과로 유학을 다녀온 소위 ‘신여성’이라 불릴 만한 인재였다.

류 선생은 서정덕 선생 남매와의 교류를 통해 천주교에 대해 자세히 살펴볼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학문으로 탐구하던 서학을 신앙의 차원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결국 천주교 안에 진리가 있음을 깨달은 그는 1936년 8월 한 달 동안 명동성당 보좌였던 노기남(바오로, 1902~1984, 이후 대주교) 신부에게 교리를 받고, 9월 26일 명동성당에서 ‘라우렌시오’로 세례를 받았다. 그해 10월 25일에는 경성대목구장 라리보(Adrien Joseph Larribeau, 1883~1974) 주교에게 견진성사를 받았다. 이렇듯 그가 천주교로 개종하게 된 과정은 성리학의 대안으로 서학을 공부하다가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인 선조들과 매우 유사했다.

그런데 하느님의 섭리는 참 오묘했다. 그의 견진 대부가 장면(요한, 1899~1966) 박사였던 것이다. 장면 박사는 신앙과 학식, 덕망을 두루 갖춘 한국 교회의 대표적 평신도 지도자였다. 장면 박사와 류 선생의 집은 200~300m에 불과할 정도로 가까웠기에, 둘은 자주 만나 교류하였다. 장면 박사는 류 선생을 인도해 자신이 속한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입회시키기도 했다. 이렇듯 류 선생은 장면 박사와의 만남을 통해 천주교 신앙을 더욱 두터이 할 수 있었다.

한편 천주교 입문을 마친 그는 1936년 11월 2일에 서정서 여사와 대구 계산성당에서 백년가약을 맺었다. 이로부터 부부는 슬하에 3남 3녀를 두고, 그가 1995년 선종할 때까지 약 60년간 서로 의지하며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지상 여정을 함께 걸어갔다. <계속>

 


김선필(베드로, 서강대학교 신학연구소)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가톨릭평화신문 공동기획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6-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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