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 회중석에 서서 ‘오소서 성령이여’를 듣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성가가 절정에 이른 순간 성령의 불꽃을 상징하는 붉은 작약 꽃잎이 공중에 흩날리고, 성령이 영혼을 어루만지는 듯한 기분에 온몸에 전율이 인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지 40일째 되는 날은 주님 승천 대축일(지난 주일), 그로부터 10일 뒤는 주님의 성령이 지상에 내려온 것을 기념하는 성령 강림 대축일(오늘)이다. 성령 강림 대축일은 영어로 ‘펜테코스트(Pentecost)’라고 하는데, 이는 ‘50번째’라는 뜻의 그리스어 ‘πεντηκοστ?(펜테코스테)’에서 유래했다.
부활 시기를 마무리하는 성령 강림 대축일은 교회의 시작을 알리는 날이기도 하다. 이 거룩하고 특별한 대축일날 로마 판테온에서는 돔 한가운데 뚫린 거대한 천창(天窓)에서 꽃비를 내리는 전통이 10세기부터 이어져 오고 있는데, 이때 흩뿌려지던 꽃이 작약이다. 오늘날에는 주로 붉은 장미 꽃잎을(때로 흰색 꽃잎을 섞어) 뿌리는데, 이 꽃비는 사도행전 2장에서 언급되는 불꽃 모양의 혀를 형상화한 것이다.
작약이 이같이 사용된 데는 성령 강림 대축일이 있는 5월에 만개하는 개화 습성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에 독일을 비롯한 서유럽권 국가에서는 작약을 ‘성령 강림절 장미(Pentecost rose)’라고 부른다. 또 5월은 성모 성월이므로 ‘성모 마리아의 장미(Our Lady’s rose)’로도 불린다.
작약의 라틴어 속명 ‘페오니아(Paeonia)’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치유의 신 ‘페온(Paeon)’이 어원으로, 작약의 씨앗과 뿌리는 지난 수백 년 동안 약재로 널리 쓰였다. 서양의 경우 작약이 약초로서 재배된 기록은 무려 1세기부터 존재하지만, 화려한 외형의 겹꽃 품종을 앞세워 관상용으로 본격적으로 재배된 것은 그보다 한참 뒤인 18~19세기의 일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작약이 약용으로 유익할 뿐만 아니라 악령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하는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작약은 하느님을 향한 열렬한 사랑을 상징하므로 흰색·붉은색·분홍색 등 색에 상관없이 대부분의 성경 정원이나 기도 공간에 잘 어울린다. 꽃은 분홍색이 향기가 가장 진하고, 색깔이 진할수록 향기가 약해진다. 제철인 5월에는 성전 안 꽃꽂이에도 자주 활용하는데, 겹겹이 풍성하고 소담하게 피는 작약의 모습은 늘 ‘충만함’을 상기시킨다. 화려한 작약의 풍성한 모습에서 ‘가장 좋은 위로자, 영혼의 기쁜 손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