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5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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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복도 활동 형태도 다르지만, 우리는 모두 ‘작은 형제들’

‘성 프란치스코 선종 800주년 특별 희년’ 기념 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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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 형제라 부르고, 달을 자매라 노래했다. 바람과 물·불·땅 심지어 죽음마저 형제자매라 불렀다. 800년 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눈이 멀어 가는 고통 속에서 ‘피조물의 노래’를 완성했다. 가난도 병도 그에겐 찬미였다. 그가 세상을 바라보던 눈이다. 그 눈으로 나환자를 껴안고, 맨손으로 이집트 술탄을 찾아가 평화를 말했다.

그로부터 800년, 성 프란치스코는 ‘제2의 그리스도’라 불리며 종교를 넘어 인류의 유산이 됐다. 최초의 프란치스코 교황이 탄생한 데 이어, 레오 14세 교황은 “우리 시대는 프란치스코 성인이 살던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고, 그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며 올해 성인 선종 800주년 특별 희년을 선포했다.

프란치스코의 찬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성인을 사부라 부르는 프란치스칸들이 온 세상에서 그 이상을 따라 살고 있기 때문이다. 희년을 맞아 프란치스칸들이 한자리에 모여 이 땅에서 프란치스코의 제자로 살아가는 진솔한 이야기를 나눴다.

본지는 작은형제회 오학준(관구 경리) 신부,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권정대(참사위원, 성소계발 담당) 신부, 카푸친 작은형제회 한규호(학생, 홍보미디어·성소계발 담당) 수사를 초대해 성 프란치스코 선종 800주년 특별 희년 대담을 가졌다.
 

작은형제회 오학준 신부,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권정대 신부, 카푸친 작은형제회 한규호 수사(왼쪽부터)가 정동 프란치스코 수도원 마당을 함께 거닐고 있다.

성 프란치스코 선종 800주년 희년을 맞아 특별히 한자리에 모인 소감을 나눠주십시오.

권정대 신부(이하 권) : 이 희년은 단순한 기념제가 아니라 ‘기억’과 ‘식별’의 시간입니다. 교회는 성인의 죽음 자체가 아니라, 끝까지 자신을 내어주며 프란치스칸은 물론 모든 그리스도인, 나아가 모든 이가 성인처럼 자유롭고 기쁘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오학준 신부(이하 오) : 프란치스칸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것 자체가 기쁩니다. 관구 경리 소임을 맡고 있어 신자들과 만날 기회가 많지 않은데, 희년이 시작된 뒤 수도원을 찾는 분들이 눈에 띄게 늘었습니다.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봉헌되는 직장인 미사에도 전보다 훨씬 많은 분이 오시고요. 수도원 담장 너머까지 사람들이 찾아오는 모습을 보면서 희년을 실감하고 있어요.
한규호 수사(이하 한) : 저도 홍보미디어를 맡고 있다 보니 이번 희년을 계기로 신자들이 프란치스코 영성을 더 가까이 느끼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개인적으로도 경당에서 전대사를 열심히 바치고 있고요. 무엇보다 세 수도회가 이렇게 이야기 나누는 자리가 처음이라 감회가 새롭습니다.
 
프란치스코 수도회 수도복 비교



신자들이 프란치스칸 수도회를 잘 구분해서 보기는 어렵습니다. 수도복은 어떻게 다른지, 수도회 이름의 뜻도 설명해주십시오.

오 : 본래 처음 수도복은 아주 소박했죠. 당시 가난한 이들이 입던 옷 그대로였습니다. 염색도 하지 않은 천이었죠. 지금은 작은형제회와 카푸친이 갈색 계열, 꼰벤뚜알은 검은색이나 회색 계열을 입습니다. 모양에도 차이가 있는데, 작은형제회는 모자가 어깨선에서 끝나고, 꼰벤뚜알은 아래로 길게 내려옵니다. 카푸친은 뾰족한 모자가 옷에 붙어있습니다.
권 : 성인이 처음 머물렀던 수비아코 성 베네딕도 수도원 벽화에 잿빛 수도복이 등장합니다. 저희는 그 수도복이 원래 모습에 가장 가깝다고 보고 있습니다. 꼰벤뚜알은 라틴어 ‘꼰벤뚜스(conventus)’, 곧 ‘공동체’에서 유래했습니다. 공동체성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이죠.
한 : 카푸친은 가장 나중에 개혁했기에 수도복 유래도 비교적 명확합니다. 이탈리아어 ‘카푸치오(cappuccio)’는 뾰족한 모자를 뜻합니다. 카푸친 프란치스칸 운동을 시작한 형제가 꿈에서 성인이 긴 모자를 쓴 모습을 보고 수도복을 고쳐 입은 것에서 유래합니다. 카푸치노 커피도 저희와 관련 있다고 하는데요. 갈색 수도복을 입은 대머리 수사들의 모습이 커피의 하얀 거품을 연상시켰다고 하죠.(웃음) 당시 카푸친 형제들이 대중에게 그만큼 친숙했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각 수도회만의 카리스마를 소개해 주신다면요.

한 : 개혁 자체가 프란치스칸 안에 뿌리처럼 자리한 DNA라고 생각합니다. 카푸친 형제들은 개혁 이후 가장 먼저 흑사병 환자 돌봄에 뛰어들었습니다. 사람들 사이로 나아가 동고동락하는 카리스마입니다. 실제 어느 나라를 가도 카푸친 형제들에게서는 비슷한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소박하고 어눌하지만 가깝다는 느낌. 우스갯소리로 나사 하나 빠진 듯한 친근함이랄까요.(웃음)
오 : 그런 점에서 우리는 서로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세 수도회를 연구한 한 예수회 사제의 논문을 봤는데, 결론이 ‘지금은 사는 꼴이 똑같다’였습니다. 결국 사람들 곁에 함께 있는 모습이 프란치스칸 정체성 아닐까요.
권 : 맞습니다. 서로 다른 이상을 품고 갈라졌지만 살아가는 모습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꼰벤뚜알의 특징이라면 이름처럼 공동체성을 더 강조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형제적 삶과 전례, 기도와 식사에 적극 참여하는 삶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물론 쉽지 않지만요. 
 
카푸친 작은형제회 한규호 수사, 작은형제회 오학준 신부,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권정대 신부(왼쪽부터)가 정동 프란치스코 수도원에 현시된 성 프란치스코 유해 앞에서 기도하고 있다.


‘가난’과 ‘형제애’는 성인의 핵심 가르침입니다. 어떻게 살아내고 계신가요?

권 : 식사 때마다 회헌을 읽는데, 최근 가난에 대한 부분을 다시 성찰하게 됐어요. 결국 사부님이 말씀하신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죠. 이를 실현하는 저희 수도회 활동 중에 지적·자폐성 어려움을 겪는 남성들과 함께 사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프란치스칸 형제애를 가장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현장이죠. 또 12.3 계엄 후인 지난해 초 서울 한남동 집회 땐 정치 색채와 관계없이 모두에게 수도원을 개방해 쉼터를 제공한 것도 작은 실천이었습니다.
한 : 저희 형제들은 실제 가난하게 살고 있습니다. 다만 그 가난을 영적으로 어떻게 살아내느냐는 늘 고민해야 할 문제이죠. 형제애와 관련해선 평등성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사제와 평형제 구분하지 않고 모두를 ‘형제’로 부르며 서로 존댓말을 씁니다. 그런 작은 문화 안에도 프란치스칸 정신이 담겨 있다고 여깁니다.
오 : 최근 관구 회의에서 설문조사를 했는데, 수도회 안에 꼭 있어야 하는 사도직 공동체와 실제 살고 싶은 공동체가 다르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쪽방 공동체나 빈민 식당 같은 곳이 대표적이었죠. 저 역시 선뜻 가기 어려운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 형제들의 얼굴은 참 밝습니다. 그런 현장이 있다는 자체가 프란치스칸의 힘이죠.


전쟁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평화의 사도’로 불리는 성인이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한 : 미국-이란 전쟁이 사부님 선종 800주년에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레오 14세 교황님이 800주년 기도문을 직접 주셨죠. 가장 마음에 남는 표현이 ‘무기를 들지 않고 무장을 해제한다’는 말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폭력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폭력까지 넘쳐나는 시대이기에 오히려 더 필요한 메시지라고 여깁니다.
오 : 맞습니다. 이번 기도문은 전쟁 시대에 평화를 말했던 성인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마치 현 사태를 예견한 듯합니다. 지금도 팔레스타인에 프란치스칸들이 현존하고 있음을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실제 분쟁 지역에서 평화를 살고 있는 형제들이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프란치스코 영성이 가장 필요한 영역은 어디일까요?

한 : 양극화가 너무 심합니다. 조금만 달라도 쉽게 등을 돌리다 보니 더 외로워지는 겁니다. 화해의 메시지가 더욱 필요한 시대입니다. ‘무기를 들지 않고 무장을 해제한다’의 핵심은 ‘내 탓’이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갈수록 교회를 떠나는 젊은이들에겐 어떻게 다가가고 계신가요?

권 : 부산교구 본당 사목할 때 교구 신부님과 광안리 해수욕장에서 6개월 정도 버스킹을 한 적이 있어요. 교회를 떠난 젊은이들과 비신자들을 위한 거리공연이었는데 반응이 참 좋았습니다. 지금 성소 계발을 담당하면서도 느끼는 게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하느님을 찾는 갈망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정신과 삶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보여줬습니다. 오늘날 인공지능(AI) 시대에도 깨어 식별하며 선한 것을 택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져준다고 생각합니다.


비신자들도 성인의 삶과 영성에 많이 매료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 : 멋있잖아요.(웃음) 옷을 다 벗고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 무장하지 않고도 상대를 무장해제시키는 사람. 자기실현을 원하는 현대인들에게 이상적인 삶으로 보인다고 생각해요. 프란치스코를 교황명으로 택하신 전임 교황님의 영향도 크다고 봅니다.
한 : 저 역시 성소를 고민할 때 진정한 자유를 갈망했습니다. 귀도 주교님 앞에서 옷을 벗는 성인의 모습이 굉장히 강렬하게 다가왔죠. 세속의 것은 아버지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을 따르는 자유. 사람들은 물질을 바라보지만 결국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 있잖아요. 성인은 그 답을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좋은 이상이지만 쉽지 않은 길이네요. 프란치스칸으로서 가장 내려놓기 힘든 점이 있다면요?

한 : 가난 실천이 힘들 거 같다고들 얘기하시는데, 저에겐 ‘순종’입니다. 성인 유언에 “우리는 무식한 사람들이었으며 모든 이에게 복종하였습니다”란 구절이 있습니다. 외아들로 자란 저에겐 공동체에서 형제를 받아들인다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몇 달씩 말을 안 하기도 했고요. 그러다 감실 앞에서 며칠을 앓으며 기도한 후 형제를 진심으로 받아들일 때,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던 경험이 있습니다.
권 : 사람은 결국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자신을 직면할 때 참 아프죠. 하지만 그 아픔을 통해 다시 하느님께 돌아갑니다. 성인은 심지어 자신이 쌓아올린 덕행조차 자기 것으로 삼지 말라고 했습니다. 끝이 없는 여정이지만, 하느님만이 전부라 고백하며 살아가는 것이 프란치스칸의 소명이라 생각해요.
오 : 회칙에 ‘대가를 바라지 말라’는 말이 나오지만, 손해 보기 싫어하는 제 모습을 자주 봅니다. 치사해지지 말자, 사사롭지 말자. 그렇게 다시 프란치스코를 바라봅니다. 이 수도복을 입고 있다는 자체가 제겐 다시 살게 만드는 힘입니다.

 
정동 프란치스코 수도원 마당에서 함께 선 작은형제회 오학준 신부,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권정대 신부, 카푸친 작은형제회 한규호 수사(왼쪽부터).



프란치스칸으로서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조언해 주신다면?

권 : 성 프란치스코는 복음을 몸소 살아낸 분이었습니다. 쉽지 않겠지만, 성인처럼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마음으로 기도와 보속의 삶을 살아간다면, 세상 안에서도, 하느님 나라 안에서도 참된 보화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서로에게 덕담 한마디씩 건네면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오 : 오늘 처음 뵀는데도 전혀 낯설지 않았습니다. 같은 뿌리지만 다른 집이기에 오히려 더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양성과 존중의 아름다움을 느꼈습니다.
권 : 참 많이 배웠습니다. 오늘 이 만남 자체가 지금 시대에 보여줄 수 있는 좋은 표징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 두 수도회가 있어 늘 든든합니다. 같은 사부님을 모시는 우리 프란치스칸, 함께 기쁜 여정 걸어갔으면 합니다.

박민규 기자 mk@cpbc.co.kr



분열 아닌 영성의 확장… 800년 역사 속 프란치스칸의 ‘다양성’
프란치스코 수도회 분리·통합 흐름도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성인이 활동할 때부터 긴장이 싹텄다. 급속히 늘어나는 회원 수, 대학과 도시 사목의 필요성, 교황청의 요구 등이 맞물리며 ‘가난을 얼마나 엄격하게 지킬 것인가’를 둘러싼 논쟁이 있었다.
프란치스코 선종 후 13세기 후반부터는 성인의 가난 정신을 현실에 맞게 적용해야 한다는 흐름과, 어떠한 타협도 없이 엄격하게 지켜야 한다는 흐름 사이 갈등이 깊어졌다. 여러 교황이 중재에 나섰지만, 내부 긴장은 쉽게 해소되지 못했다.

결국 1517년 레오 10세 교황이 칙서 「Ite vos」를 반포하면서 수도회는 도시와 수도원 중심 공동체 생활을 강조한 ‘꼰벤뚜알(Conventual) 작은형제회’와, 엄격한 규칙 준수와 청빈을 강조한 ‘옵세르반트(Observants·준수파) 작은형제회’로 공식 분리됐다.

16세기 초에는 준수파 내부에서 다시 ‘더 철저한 개혁’을 요구하는 흐름이 나타났다. 카푸친이다. 이들은 흑사병 환자 돌봄과 민중 설교 등 헌신적 사목으로 개혁 정신을 드러냈고, 1528년 클레멘스 7세 교황에 의해 독립 수도회로 승인받았다.

그러나 준수파 안에서는 더 철저한 청빈과 개혁을 추구하는 흐름이 이어지며 여러 갈래로 다시 나뉘었다. 이후 1897년 레오 13세 교황이 준수파 개혁 계열을 통합하면서 오늘날 작은형제회가 형성됐다. 작은형제회, 꼰벤뚜알 작은형제회, 카푸친 작은형제회가 분리 통합되는 과정이다. 이 세 수도회를 ‘프란치스칸 1회’라 부른다.

프란치스칸 가족은 남자 수도회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2회는 관상 공동체 형태로 성인과 클라라 성녀를 따르는 성 클라라 수도회, 3회는 재속 프란치스코회와 프란치스코 규칙을 따르는 수도 3회로 구성된다. 재속 프란치스코회에서 발전해 공동생활과 수도 서원을 하는 ‘율수 3회’ 공동체도 형성됐다.

복잡한 분화 과정을 거쳤지만, 프란치스칸의 역사는 이권 다툼의 결과가 아니다. ‘가난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 앞에 각자의 방식으로 프란치스코 정신을 더 충실히 살고자 하는 몸부림이었다. 이 ‘다양성’은 프란치스칸을 대표하는 특징으로도 꼽힌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작은형제회는 약 1만 2000명, 카푸친 작은형제회는 약 1만 명, 꼰벤뚜알 작은형제회는 약 3200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재속 프란치스코회는 30만 명 이상, 수도 3회는 2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50만 명 넘는 이들이 세계 각지에서 프란치스코 영성을 따르고 있는 셈이다.

한국에는 작은형제회가 1937년 캐나다 선교사들에 의해 가장 먼저 진출했다. 현재 141명의 종신서원자가 전국 21개 공동체(분원 포함)에서 빈민·북향민·한센인·장애인·이주민·본당 사목 등을 펼치고 있다. 출판사, 수도자신학원도 운영하며, 성지관구를 비롯해 여러 선교지에도 파견돼 있다.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1958년 이탈리아 파도바 관구 소속 범덕례(프란치스코 팔다니) 신부가 부산에 도착하면서 시작됐다. 한센인 돌봄을 시작으로 본당 사목과 소신학교·피정의 집 운영, 성모기사회 활동 등을 이어왔다. 현재 61명의 종신서원자가 국내 8개 수도원과 미국 캘리포니아 토렌스 수도원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사회복지 시설, 출판사도 운영 중이다.

카푸친 작은형제회는 1986년 고 김수환 추기경의 요청으로 진출했다. 독일 유학 시절 카푸친 형제들의 상설고해와 24시간 성체조배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은 김 추기경은 서울대교구장이 된 뒤 직접 한국 진출을 요청했고, 아일랜드 관구가 선교사를 파견했다. 현재 종신서원자 17명이 상설고해·사회복지·심리상담 등 사도직을 수행 중이다.

주목할 점은 평신도 신앙으로 출발한 한국 교회처럼 한국 프란치스칸의 시작 역시 재속 프란치스코회였다는 사실이다. 올해 선종 60주기를 맞은 고 장면(요한 세례자, 1899~1966) 박사는 이미 1921년 미국에서 재속회에 입회해 1922년 ‘프란치스코’를 수도명으로 서약, 한국 재속 프란치스코회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현재 한국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원은 1만 명이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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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6-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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