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한국 평신도 사도직 활동의 모범, 류홍렬 라우렌시오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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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홍렬 선생이 1989년 제44차 세계성체대회를 위해 방한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을 알현하고 있다.
1957년 세계평신도대회 참가 계기
평신도 사도직 활동에 눈떠
새남클럽·순교자현양회 조직
1968년 평협 설립·초대 회장 맡아
류홍렬 선생은 한국 천주교회사를 다룬 책을 저술한 선구자였다. 평소 한국 천주교회사를 공부하고 정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지만, 책을 내겠다는 마음을 먹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때 그는 성직자 한 명을 만나게 된다.
“형제님, 저는 조선순교자현양회 중앙위원장을 맡고 있는 윤형중 신부라고 합니다. 평소 형제님께서 한국 천주교회사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에게는 프랑스와 일본인이 쓴 한국 천주교회사만 있을 뿐입니다. 이제 해방도 되었으니, 우리 선조들이 피 흘려 세운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를 우리 손으로 정리하여, 그분들의 아름다운 정신을 널리 드러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형제님께서 이 작업을 맡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책 출판은 걱정 마십시오. 저희 순교자현양회가 후원해드리겠습니다.”
이제야말로 때가 되었음을 알게 된 류홍렬 선생은 윤형중(마태오, 1903~1979) 신부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가 한국 천주교회사를 저술하기로 결심한 것은 그것이 한국 교회에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께 봉헌하는 마음으로 한국 천주교회사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류 선생은 수년간 프랑스어를 익히며 통독해온 달레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와 우라가와 와사부로(浦川和三郞, 1876~1955)가 저술한 「조선순교사」를 참고하여 한국 천주교회사를 써내려갔다. 이윽고 1949년 2월에 「한국천주교회사 상권」이 출판되어 빛을 보게 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한국 종교사의 특징과 조선과 천주교의 만남, 그리고 18세기 말 조선에 서학이 들어온 순간부터 1832년까지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를 다뤘다. 이어서 그는 「한국천주교회사 하권」을 펴낼 계획으로 원고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인해 그의 계획은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1951년 공군 정훈감 시절.
한국전쟁이 벌어지자 그는 북한군을 피해 다녀야 했다. 대학교수에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에 북한군의 주요 표적이 되었던 것이다. 이내 대구에 도착한 그는 공군 장교로 임관하여 중령이자 정훈감으로 1년 4개월을 근무했다. 물론 그는 쓰다 만 원고를 피란길에 들고 다닐 정도로 교회사 집필에 강한 의지를 보였지만, 전쟁은 그가 집필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들었다.
1953년 여름, 전쟁은 멈췄지만 류 선생은 다시 돌아온 서울대학교에서 교무처장, 총장 직무대리에 임명돼 다양한 행정 업무를 소화해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바쁜 와중에도 교회사 연구만큼은 끊임없이 이어갔고, 그 결과 1962년에 「한국천주교회사」, 1975년에는 「증보 한국천주교회사」를 발간할 수 있었다. 이 책에서 그는 천주교의 동양 전래부터 한국 천주교회 설립, 계속된 박해와 교회 재건, 신교의 자유, 일제강점기와 광복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 시기까지의 한국 천주교회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그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이 책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는 다만 하나의 종교 역사일 뿐만 아니라, 한국이 근대화해온 과정에 있어서 겪은 정치사이며, 외교사이며 학술사이며, 사상사이며 개화사입니다. 때문에 일찍부터 국내외에서 여러 학자들이 이를 연구해 많은 책과 논문을 발표한 일이 있었으나, 이들은 겨우 그 일부분만을 다루었을 뿐으로, 아직 한국 천주교회사를 전체로 적은 책은 나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엮음에 있어서 프랑스 사람들의 기록과 한국의 기록을 다 같이 견주어가면서 자료로 쓰게 되었으니, 이러한 점에 이 책의 특색이 있습니다.”
그가 저술한 「한국천주교회사」는 무엇보다 한국인이 정리한 최초의 한국 천주교회 통사(通史)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깊었다. 특히 외국인의 손으로 정리된 기록들과 한국 사료들을 함께 참고함으로써 독자들이 보다 종합적인 시각으로 한국 천주교회가 걸어온 여정을 바라볼 수 있게 했다. 나아가 한국 천주교회사가 한국 근대사의 일부라는 사실을 드러냄으로써 한국 천주교회가 한국 사회의 일부이자, 한국인들과 함께 한국사를 새겨온 주체라는 사실을 일깨워줬다.
1967년 10월 로마 제3차 세계평신도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
한국 평신도 사도직 활동의 주춧돌이 되어
류 선생은 신앙을 삶으로 실천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특히 그는 교회 안의 평신도 역할에 주목하고, 이를 활성화시키는 데 힘을 모았다. 그가 본격적으로 평신도 사도직 활동을 시작한 시점은 1957년에 로마에서 개최된 ‘제2차 세계평신도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했을 때였다. 그는 그곳에서 전 세계 평신도들이 교회 안에서 펼치는 다양한 사도직 활동을 보고, 한국도 평신도들이 적극적으로 사도직 활동을 펼칠 수 있기를 바랐다.
사실 비슷한 시기에 그는 미국과 유럽을 다니며 다양한 평신도 사도직 운동 단체들을 살펴본 터였다. 그렇게 대회를 마치고 온 그는 이듬해인 1958년에 일부 신자들과 함께 “신자답게 살자”를 모토로 내건 ‘새남클럽’을 결성해 회장직을 맡았다. ‘새남클럽’의 ‘새남’은 이 모임의 수호성인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1821~1846) 신부가 순교한 ‘새남터’에서 따왔다. 또 그는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해 ‘순교자현양회’를 조직하고, 절두산·새남터·천진암 등 주요 순교지를 발굴·개발하는 데 큰 관심을 기울였다. 한국 천주교회사를 정리하며 순교자들에 대해 남다른 신심을 지녔던 그에게 이 모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렇듯 순교 선조들의 후손으로서 천주교 신자로 충실하게 살아갈 것을 다짐한 류 선생은 10여 년 뒤인 1967년 로마에서 열린 ‘제3차 세계평신도대회’에 다시 참가하게 됐다. 그런데 그 10년 사이 보편 교회는 큰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가 열렸던 것이다. 이를 통해 전 세계 교회는 현대 사회와 대화하고 적응해 나가는, 곧 요한 23세 교황이 공의회를 통해 강조한 아조르나멘토(aggiornamento, 현대화, 적응)의 여정을 걷기 시작했다.
1984년 10월 14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봉헌된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경축 미사에서 독서하는 모습.
특히 공의회는 교회 내 평신도의 역할을 새롭게 이해하고, 그들의 사도직 활동을 장려했다. 예를 들어 「교회 헌장」은 평신도가 ‘하느님 백성(populus Dei)’의 일원으로 세상 안에서 보편 사제직을 수행한다고 선언했고, 「평신도 교령」에서는 평신도들이 교회 사명에 참여하도록 하느님께 부름 받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 개최된 ‘제3차 세계평신도대회’에서는 평신도 사도직의 활성화를 위해 국가별로 평신도사도직협의회를 만들자는 결의가 있었다.
로마에서 돌아온 류 선생은 대전교구장 황민성(1923~1984) 주교의 지도 아래 곧바로 ‘한국 가톨릭 평신도사도직 중앙협의회’(이하 한국 평협) 창립을 준비했고, 1968년 7월 23일 대전교구 주교좌 대흥동성당 강당에서 창립총회를 열었다. 한국 천주교회에 전국적으로 조직화된 평신도 사도직 단체가 설립된 첫 순간이었다. 이때 류 선생은 한국 평협의 초대 회장으로 선출됐다.
초창기 한국 평협은 예산이 없어 회장이었던 류 선생이 직접 회계장부를 검토해가며 어렵게 운영을 이어나갔다. 열악한 상황에서도 그는 공의회 정신에 따라 한국의 평신도들이 사도직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자 혼신의 힘을 다했다. 이처럼 류 선생이 한국 평협의 설립과 기틀을 닦는 일에 능숙할 수 있었던 것은 대학에서 행정 조직을 운영했던 경험이 풍부했고, 천주교인으로서 깊은 소명 의식을 겸한 데다 「한국천주교회사」를 직접 집필할 정도로 한국 천주교회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그가 평생 경험해왔던 모든 것을 통해 그를 한국 평신도 사도직 활동의 주춧돌로 삼고자 하셨던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