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회의 본당은 오랫동안 평신도 여성들의 헌신 위에서 유지돼왔다. 본당 단체의 실무는 대체로 여성 신자들의 손을 거쳐 움직여왔고, 교회의 생명력은 이들의 봉사와 인내, 신앙 전승의 노고를 빼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그런데 바로 그 여성들의 세계 안에서 적지 않은 균열이 드러나고 있다. 청년 여성은 교회 안에서 자신의 자리가 좁다고 느끼고, 장년 여성은 자신의 수고가 충분히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낀다. 그 긴장이 누적되면서 어느새 ‘여성의 적(敵)은 여성’이라는 자조가 번지고 있다.
여성은 여전히 신자의 다수지만, 고령화된 여성 신자 층이 현장을 떠받치고 젊은 세대는 얇아지고 있다. 단순히 젊은 세대가 교회를 떠난다는 말로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한국 교회의 신앙 전승 구조와 공동체 문화가 청년에게 더 이상 설득력 있게 작동하지 못함을 보여주는 징후다.
오늘의 장년 여성은 산업화의 격변 속에서 가족과 본당 봉사를 함께 떠받쳐온 세대로, 그 신앙은 인내와 침묵, 책임과 희생의 언어 속에 형성됐다. 반면 청년 여성은 참여와 존중, 상호성과 공정한 역할 분담, 감정적 안전을 중요하게 여긴다. 문제는 어느 쪽이 옳으냐가 아니라, 교회가 서로 다른 경험과 신앙 감각이 만나 대화할 자리를 만들지 못했다는 데 있다. ‘난 기도할 테니 넌 공부나 해라’ ‘나중에 봉사하면 된다’는 말은 배려처럼 들렸지만, 결국 청년을 공동체의 현재가 아니라 미래의 예비 인력으로 미뤄두는 방식이 되었다.
본당은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여성 평신도는 많이 일하지만, 결정의 자리에는 충분히 보이지 않는다. 평신도는 단순한 보조 인력이 아니라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삼중직무에 참여하는 공동책임의 주체다. 그러나 여성 평신도에게 주어지는 자리는 방향을 함께 식별하기보다 정해진 일을 수행하는 자리인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니 장년 여성은 피로가 쌓이고, 청년 여성은 미래를 보지 못한다.
따라서 청년세대가 약해졌다거나 기성세대가 완고하다는 식으로만 말해서는 안 된다. 지금의 갈등은 평신도론의 빈곤, 곧 평신도를 하느님 백성의 공동 식별 주체로 충분히 대우하지 못한 습관의 결과이기도 하다. 청년이 사라져가는 현실은 단지 숫자의 감소가 아니라 교회가 미래의 언어를 잃어가고 있다는 신호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여성에게 더 많은 일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여성 평신도가 세대 차이를 넘어 공동책임의 주체로 설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일이다. 시노달리타스는 여기서 시작된다.
청년 여성에게 필요한 것은 교회를 떠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지우지 않는 일이다. 침묵을 미덕으로만 배우기보다 자신의 신앙 체험과 질문, 상처와 희망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장년 여성들이 지켜온 방식이 다음 세대에게는 같은 의미로 읽히지 않을 수 있음을 받아들이고, 가르치기 전에 먼저 들을 준비를 해야 한다. 청년 여성은 말할 용기를, 장년 여성은 들을 용기를 낼 때 비로소 새로운 공동경험이 시작된다.
교회가 잃고 있는 것은 청년 여성의 숫자가 아니다. 세대가 함께 빚어 갈 신앙의 언어와 공동체의 가능성이다. 청년 여성은 미래의 예비 인력이 아니라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지금을 살아가고 있다. 장년 여성의 꿈과 청년 여성의 환시가 적이 아니라 함께 교회의 내일을 열어갈 때, “너희 아들딸들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며 젊은이들은 환시를 보리라”(요엘 3,1)는 예언도 비로소 오늘의 교회 안에서 현실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