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도심 슈테판스플라츠에 자리한 장크트 슈테판 대성당. 길이 약 107m의 대성당은 12세기 로마네스크 성당에서 출발해 고딕 성당으로 확장되었다. 원래 남쪽과 북쪽 두 고딕 탑을 대칭으로 세우려 했으나, 16세기 오스만 제국의 위협과 정치적 변화로 남쪽 탑만 완성되었고, 미완성 북쪽 탑에는 르네상스식 둥근 지붕만 얹어 지금의 비대칭 모양이 되었다. 1469년 빈 교구 설정과 함께 주교좌 성당이 되었고, 1722년 빈 대교구로 승격한 뒤 관구장좌 대성당이 되었다.
독일 뮌헨에서 유학하던 시절, 빈을 찾을 때마다 묘한 익숙함을 느꼈습니다. 뮌헨을 더 크게 확장한 듯 도시의 표정과 거리, 건물 분위기가 북독일이나 라인강 유역의 도시보다 훨씬 친근하게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실제 바이에른과 오스트리아 대부분은 언어·문화 면에서 이어지고, 중세 잘츠부르크 대교구를 중심으로 독일 남부와 오스트리아 가톨릭권은 서로 영향을 크게 주고받았습니다.
빈 도심 한복판의 장크트 슈테판 대성당 역시 뮌헨의 프라우엔키르헤와 닮은 듯하면서도 다릅니다. 두 성당 모두 도시의 얼굴이지만, 빈의 대성당은 외관뿐 아니라 그 내면에 새겨진 역사가 남다릅니다. 많은 이가 장크트 슈테판 대성당을 올려다보며 SNS 인증샷을 남긴 뒤, 성당 안을 잠시 둘러보고는 다른 곳으로 발길을 향합니다. 하지만 이 성당은 빈을 이해하는 문이자, 빈이란 도시가 신앙 안에서 성장해 온 시간을 품은 현장입니다.
장크트 슈테판 대성당의 서쪽 정면. 중앙의 ‘거인의 문’은 13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포털로, 한때 문 위에 걸려 있던 매머드 뼈를 거인의 뼈로 여긴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 양쪽의 ‘이교도의 탑’은 그리스도교 복음이 전해지기 전인 로마시대의 석재가 사용됐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도시 발달과 궤를 같이한 교구의 성장
도나우강 강가에 자리한 빈은 동서남북이 교차하는 교역의 중심지로, 로마 시대부터 군사 기지가 있던 곳입니다. 이 조건은 빈이 중세 유럽의 중심 도시로 성장하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장크트 슈테판 대성당의 역사도 빈의 발전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1147년 첫 로마네스크 성당이 성 스테파노에게 봉헌되었고, 1200~1225년 무렵 두 번째 로마네스크 성당이 세워졌습니다. 서쪽 정면의 일부인 ‘거인의 문’과 서쪽 두 탑인 ‘이교도의 탑’의 하부가 이때 만들어졌죠. 당시 이 자리는 성벽과 가까운 변두리였으나, 도시가 커지면서 성당 주변이 서서히 빈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 공작 루돌프 4세(1339~1365)는 빈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도에 걸맞은 영적 상징성을 갖기를 바랐습니다. 당시 빈은 잘츠부르크 대교구 산하 파사우교구 관할 본당에 불과했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빈을 통치했지만, 교회 관련 중대사는 파사우의 제후 주교의 관할 아래 있었습니다. 신앙이 삶의 중심이던 중세 사회에서 교권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지요.
이에 루돌프 4세는 빈 대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고, 오늘날의 대성당 참사회의 전신인 ‘모든 성인의 의전사제단’을 설립하며 교구 독립을 꾀했습니다. 성당이 지금의 웅장한 고딕 성당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무렵입니다. 그의 바람은 마침내 1469년 빈 교구 설정으로 결실을 보았고, 성당도 주교좌 성당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이에 앞서 1433년에 완성된 136.4m의 남탑은 빈의 독보적인 상징이 되어 오늘날까지 시민들에게 ‘슈테플’(Steffl, 꼬마 슈테파노)이라고 불립니다.
장크트 슈테판 대성당의 주 제대와 본랑. 본랑 끝에 자리한 바로크 양식의 주 제대는 1647년 봉헌된 것으로 요한 야코프 포크와 토비아스 포크 형제가 제작했다. 제대화는 성 스테파노가 돌에 맞아 순교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제국의 수도, ‘오스트리아 신앙의 집’으로
근세 이후 빈은 제국의 수도로 성장합니다. 1558~1918년 신성 로마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정치적 중심지로서 화려한 궁정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지금도 빈을 걷다 보면 호프부르크 궁전, 쇤브룬 궁전, 국립오페라극장 등 한때 유럽 정치와 문화를 이끈 흔적을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슈테판 광장에 자리한 대성당은 빈에서 가장 붐비는 관광지입니다. 서쪽 정면은 고딕 첨탑의 화려함과 달리, 초기 로마네스크 성당의 묵직하고 장중한 첫 얼굴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빈 교구는 1722년에 대교구로 승격되었고, 장크트 슈테판 대성당도 관구장좌 대성당의 지위를 갖게 되었습니다. 변방의 작은 도시가 제국의 수도이자 유럽 교회 중심지로 성장해 온 역사가 대성당 역사에 녹아 있는 셈입니다.
대성당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화재로 큰 피해를 보았습니다. 전쟁 직후 빈 시민들은 기념주화를 발행해 재건 기금을 모았고, 오스트리아 각 연방 주들은 성당의 감실, 지붕, 정문, 창문, 대형 종, 바닥 등을 나눠 맡아 재건했습니다. 시련의 불길 속에서 대성당은 도시의 랜드마크를 넘어, 온 국민이 함께 세운 ‘오스트리아 신앙의 집’으로 거듭났습니다.
마리아포치 성모 이콘. 원래 헝가리 마리아포치 성당에 모셔져 있던 비잔틴 전통의 호데게트리아(Hodegetria) 유형의 성모자 이콘이다. 1696년 이콘의 성모님이 눈물을 흘린 기적이 일어난 후, 이듬해 빈으로 옮겨 대성당에 모셨다. 그 후 마리아포치에 남겨진 사본에서도 눈물의 기적이 일어났다. ‘길을 인도하는 성모’라는 뜻처럼 성모 공경의 본질을 보여 준다.
이슬람 공격 방어하며 뿌리내린 성모 신심
성당 안에 들어서면 먼저 어둡고 소리가 장엄하게 울려 퍼지는 공간을 마주합니다. 고딕식 리브볼트가 가지처럼 펼쳐진 높은 천장을 묵중한 돌기둥들이 떠받치며 늘어서 있고, 성당 중앙에는 대형 십자가상이 매달려 있습니다. 그 시선의 끝에는 바로크 양식의 주 제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오른쪽 중세 석조 발다키노 아래에 이콘 하나가 보입니다. 대부분 모르고 지나치지만, 이 성화가 이번 순례의 핵심인 기적의 성모 성화입니다. 원래 헝가리의 마리아포치(Máriapócs) 성당에 모셔져 있었는데, 1696년에 성모님이 눈물을 흘리는 기적이 일어나면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이 소식은 지역 교회를 넘어 합스부르크 궁정에까지 전해졌고, 이듬해 황제 레오폴트 1세는 성화를 빈으로 옮겨 대성당에 모셨습니다.
당시 빈은 이슬람 세력인 오스만 제국과 맞서는 그리스도교 유럽의 최전방 보루였습니다. 1529년과 1683년, 두 차례에 걸쳐 빈 코앞까지 밀려온 오스만 대군을 가까스로 막아냈지요. 특히 제2차 빈 공방전은 유럽 전체에 큰 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불안에 휩싸인 사람들은 성모님의 전구를 청했고, 이는 제국에서 성모 신심이 깊이 뿌리내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마리아포치 성모 이콘을 들여다 봅니다. 성모님은 왼팔로 아기 예수를 안은 채, 오른손으로 예수님을 가리키고 계십니다. 당신 자신에게 시선을 붙잡아두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께 향하는 길을 열어 주시는 모습입니다. 구원의 길이 성모가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가르침 속에서 내 삶의 시선 또한 이콘 속 성모님처럼 오직 그리스도만을 향하고 있는지 돌이켜 봅니다.
<순례 팁>
※ 빈 중앙역에서 지하철(U1) 탑승 후 Stephansplatz 역에서 하차 (약 10분). 중앙역에서 벨베데레 궁과 빈 국립오페라극장을 지나 걸으며 구시가지 분위기를 즐기는 것도 추천.(3.2㎞, 약 5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