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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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신 성행하던 마을이 복음의 땅으로

23. 안동교구 가은본당 민지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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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구 가은본당 민지공소 전경. 마을 안쪽 한적하고 볕 잘 드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공소의 모태는 조선 왕조 치하 박해 시기 교우촌이다. 교우촌은 대부분 깊은 산 속 험하고 가파른 골짜기에 자리했다. 박해의 칼날을 피해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안성맞춤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교우촌은 말 그대로 ‘작은 교회’였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신앙 선조’라 부르는 박해 시기 그리스도인들은 이곳에서 가톨릭 신앙을 대물림했다. 그들은 깊은 산 속에서도 자녀들의 신앙 교육을 결코 소홀히하지 않았다. 그들의 삶을 지탱해주던 것은 오직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에게(父傳子習), 어머니는 딸에게(母傳女習) 믿을 교리와 기도문, 성인들의 이야기를 외워 들려줬다.



애덕과 선교의 현장, 교우촌

교우촌 일상의 중심은 ‘기도와 전례’였다. 가정에서의 하루 시작과 마침은 기도였다. 온 가족이 함께 일어나 아침 기도를 바쳤고, 잠자리에 들기 전 저녁 기도를 했다. 혹 사제가 성사를 집전하기 위해 찾아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100리 길도 마다치 않았다. 아울러 교우촌 회장이 주일 첨례를 이끌고 신앙 지도를 맡아 했다. 교우촌 모든 구성원에게 있어 기도와 전례는 하느님 은총을 받는 참 기쁨의 행위였다.

교우촌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애덕의 현장이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셨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이웃 사랑의 원천이고,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의 구체적 표현이다. 교우촌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 된 삶을 살았다. 계급은 물론 빈부도 없었다. 기근이 들어온 조선 땅에 굶어 죽는 이가 늘어나도 교우촌에서는 끼니를 거르는 이가 없었다. 그들은 가난의 일상 속에서도 과부와 고아들을 거두고, 서로의 양식과 재산을 내놓으며 모두가 한가족처럼 생활했다.

교우촌은 선교의 현장이었다. 교우촌은 결코 폐쇄된 공간이 아니었다. 농사지은 담뱃잎과 구운 옹기를 내다 팔며 교우촌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전했다. 그들은 박해를 피해 모든 것을 버리고 온 교우들을 내치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품어 안았고,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에게 교리교육을 해 세례를 주었다.

이에 현 안동교구장 권혁주 주교는 교우촌에 뿌리를 둔 공소를 ‘사제가 상주하지 않는 불완전한 교회’라는 소극적 교회관을 버리고 토착화한 ‘마을 교회’라는 인식을 가져달라고 당부한 바 있다. 그래서 권 주교는 “공소 교회는 어느 한 본당의 부속 교회라는 법적 차원에서 정의할 것이 아니라 더욱 적극적으로 개별 지역 교회, 개별 부락 교회라는 ‘완전한 교회’로 이해하고 정의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공소 교회-신앙과 생활 공동체의 모델’ : 「안동 가톨릭사학」 12쪽)

 
공소 옆에 조성된 아담한 성모동굴.



무속에 빠져있던 마을 주민에 선교

안동교구 가은본당 민지공소는 경북 문경시 가은읍 원민지길 34(민지리 76번지)에 자리하고 있다. 민지리(泯地里)는 조선 중엽에 생긴 마을이다. 마을 뒤에 작은 못이 있는데 갈수기면 자주 바닥을 보여 ‘물 빠진 땅’이라 불렀다 한다. 민지리는 또 영강이 마을을 둘러싸고 흘러 마치 섬 같다 하여 ‘섬 안 마을’ 한자음으로 ‘도내’(島內)라 했다. 민지공소는 가은본당 관할 14개 공소, 현재 8개 활동 공소 가운데 가장 늦게 설립된 공소다. 조동희(티모테오) 초대 공소 회장이 1974년 민지리로 이사와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면서 공소의 싹을 틔웠다.

「안동 가톨릭사학」은 민지공소를 “조동식 회장의 헌신적인 봉사와 노력으로 믿음의 공동체가 형성되어 미신이 성행했던 이 지역을 그리스도화하는데 큰 공헌을 세움. 농암공소의 정아오스딩 회장과 함께 공소 설립 후 1981년 현 공소를 본당과 이웃 공소의 도움으로 건립함”이라고 간략히 소개하고 있다.(348쪽) ‘조동식’은 ‘조동희’의 오기이고, 역대 농암공소 회장 가운데 ‘정아오스딩’은 없어 아마도 농암 출신 가은본당 전교 회장 ‘신상철 아우구스티노’를 일컫는 듯하다. 신상철 회장은 아직 무속과 미신에 빠져 있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가톨릭 입교를 원하는 이들에게 교리 문답을 가르치고 가정을 위한 기도를 하고 성수를 뿌리며 오래전부터 집안에 모셔둔 성주단지며 토주단지, 삼신 바가지 등을 없애는 데 힘썼다.

조동희 회장은 민지리로 이사 온 후 주일이면 4㎞ 떨어진 농암공소에 가서 공소 예절을 했기에 아마도 그때부터 신상철 회장과 알고 지낸 듯하다. 조동희 초대 공소 회장도 농한기에 술과 노름에 빠져 지내던 민지리 주민들에게 전교해 많은 이를 입교시켰다. 그는 먼저 냉담 중인 여교우 2명을 회두시킨 다음, 마을 청년들과 합심해 동네에 3개나 있는 술집을 몰아냈다. 그는 주민들에게 교회 서적을 나눠줬고, 자신의 집에서 예비신자 교리반도 열었다.

 
민지공소 내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거의 사용하지 않아 먼지가 많이 쌓여 있다.


공소 건립 위해 한마음으로 기도

두 회장의 노력으로 민지공소는 1977년 설립됐다. 지금의 공소 건물은 1983년 7월 5일 당시 안동교구장 두봉 주교 주례로 봉헌됐다. 공소 봉헌 당시 현재 민지리에 31가구 주민 127명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 중 39명이 세례받은 교우이고, 7명이 예비신자였다.

12평 규모의 공소 건물은 공소 교우들과 은인의 도움으로 모인 300여만 원으로 지어졌다. 민지공소 교우들은 1981년 공사를 시작해 1983년 공소를 봉헌할 때까지 2년 동안 매일같이 공소 건립을 위해 한마음으로 기도했다. 이처럼 민지공소는 마을 교회로 완전히 자리 잡게 됐다.

민지공소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크게 쇠퇴했다. 가뜩이나 젊은이들이 도시로 빠져나가 한적한 마을이 됐는데 코로나 팬데믹을 겪은 후 어르신들의 수도 적지 않게 줄었다. 지금은 공소 유지를 위해 교우 몇몇이 개인적으로 공소를 찾고 있다.

민지공소는 마을 안쪽 한적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공소 입구에 마을 길이 나 있고, 옆은 농지이며, 뒤로는 숲을 이루고 있다. 장방형 벽돌집인 민지공소는 입구에 종탑과 그 위에 십자가를 세워 이 집이 가톨릭교회임을 드러내고 있다.

내부는 단출하다. 천장은 얇은 합판으로 덧대놓고, 벽은 흰색 도료로 칠해 놓았다. 제단을 제외한 세 벽면에는 제법 큰 십자가의 길 14처 부조가 설치돼 있다. 또 커다란 칠판에는 미사 때 부를 성가 번호가 적혀 있다.

제단 벽면은 갈색 휘장으로 둘러쳐져 있고, 제단은 제대와 독서대, 제단 십자가, 성모상으로 꾸며져 있다. 제단 맞은편에는 흰색 도료가 칠해진 낡은 회중석들이 양편으로 나열돼 있고, 성가정상과 가톨릭대사전 등 교회 서적이 놓여있다. 회중석 가운데 한 자리에는 독서대와 성경, ‘코로나19 극복을 청하는 기도문’이 놓여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아마도 이 자리의 교우가 지금의 민지공소를 힘겹게 지키고 있는 듯하다. 사람의 온기를 느끼게 하는 이 한 자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가톨릭교회가 있다”는 초대 교부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주교의 가르침을 일깨워준다.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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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6-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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