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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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 복자 시성운동 앞장… 1984년 103위 성인 탄생으로 결실

[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한국 평신도 사도직 활동의 모범, 류홍렬 라우렌시오 - (5·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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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10월 14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봉헌된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경축 미사에서 독서하는 류홍렬 선생(맨 오른쪽).


회의적 분위기 속 시성운동 강력 주장

1975년 평협 주요 사업으로 채택

교회 전체가 함께 하는 운동으로 번져


103위 성인화 그리던 문학진 화백에게

그림 중앙에 평신도 배치하도록 조언



한국 평협의 회장직을 수행하게 된 류홍렬 선생은 피 흘려 순교한 신앙의 선조들을 우리 후손들이 기억하고, 그분들의 신앙과 순교 행위를 전 세계 교회가 기념하게 되기를 바랐다.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천주교에 입교하게 된 것은 하느님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하느님 때문에 순교한 신앙의 선조들 덕택이었고, 그분들이 써내려간 한국 천주교회사를 그가 직접 정리했기 때문이다. 또한 1960년대부터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해외에 알리며 한국학(Korean Studies)을 독립된 학문으로 만들었던 그가 한국 순교자들의 신앙을 온 세상에 널리 알리고 싶어 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류 선생은 평협 회장으로서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103위 순교 복자들의 시성을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교회 구성원들은 이러한 주장을 회의적으로 받아들였다. 우리 처지에 시성이 가능하겠느냐는 자조 섞인 반응이 대다수였다. 실제로 1968년에 병인박해 순교자 24위가 시복된 직후 103위 순교 복자들의 시성을 위한 현양운동이 등장하고, 1971년에 열린 주교회의 춘계 정기총회가 이 문제를 정식 안건으로 채택하기도 했지만, 시성 운동은 추후 연구 과제로 미뤄져 동력을 잃은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류 선생은 순교 복자들의 시성은 가능한 일일 뿐만 아니라, 한국 천주교회와 보편 교회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줄기차게 시성 운동을 주장해왔다. 그리하여 그는 김대건 신부 순교 125주년을 맞이한 1971년 평협 차원에서 김대건 신부 시성 촉진운동을 펼치는 등 순교 복자들의 시성을 위한 한국 천주교회의 열망이 사그라지지 않도록 열과 성을 다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이 불꽃이 되었던 것일까? 103위 순교 복자들에 대한 시성 운동은 1975년 한국 평협의 주요 사업으로 채택되었고, 이후 시성 운동은 한국 천주교회 전체로 확대되어 갔다.

103위 순교 복자들은 1984년 방한한 성 요한 바오로 2세(S. Ioannes Paulus PP. II, 1920~2005)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오르게 되었다. 순교 복자들의 시성을 위한 그의 노력이 결실을 본 순간이었다. 이로써 한국 천주교회는 103명의 순교 성인을 모실 수 있게 되었고, 그분들의 신앙과 영웅적 순교 행위는 보편 교회의 모범으로 자리 잡았다. 이에 대해 류 선생은 1988년 발간된 「한국천주교평협20년사」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저의 평협 초대 회장 시절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을 꼽으라면 역시 한국 순교 복자들의 시성운동을 제창했던 일을 들고 싶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아무도 선뜻 나서지 못할 만큼 워낙 막중한 일을 평신도들이 제창하고 나서서 기도 운동을 전개한 것이 밑거름이 되어 그 후 본격적인 시성시복운동이 교회적으로 전개되고, 마침내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하여 1984년 서울에서 103위 복자의 시성식이 이루어진 것을 볼 때, 실로 평신도가 주역이 되어 이끌어온 한국 교회에 내려주신 크나큰 주님의 은혜에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한국 교회가 평신도에 의해 시작되었듯, 순교 복자들에 대한 시성운동 역시 평신도에 의해 시작됐다. 그리고 그 맨 앞에 류 선생이 자리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순교자들의 피는 한국 천주교회의 씨앗이 되었고 류 선생을 천주교로 이끌었으며, 한국 천주교회와 류 선생은 그러한 순교자들이 시성될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하였다. 그야말로 성인들의 통공이 이루어지는 우리들의 신앙 고백이 실현된 순간이었다.

한편 우리에게 ‘103위 순교 성인화’로 잘 알려진 성화와 관련된 일화를 소개한다. 문학진(토마스, 1924-2019) 화백은 서울 혜화동본당 박희봉(이시도로, 1924-2019) 신부의 의뢰를 받아 1976년부터 성화 작업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한국 천주교회사 전문가였던 류 선생에게 그림 초안을 보여주며 자문을 구했다. 이때 류 선생은 다음과 같이 조언했다.

“그림 가운데에 김대건 신부님과 앵베르 주교님밖에 없군요. 우리 한국 천주교회는 평신도에 의해 세워졌고, 그분들에 의해 성직자들이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평신도 역시 한국 교회의 주역으로서 성직자들과 함께 가운데에 위치할 필요가 있습니다.”

문 화백은 이러한 조언을 받아들여 그림 중앙에 위치한 김대건 신부와 앵베르 주교 곁에 정하상(바오로, 1795~1839)을 비롯한 평신도들을 배치했다. 이 점에서 ‘103위 순교 성인화’는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평신도가 차지하는 위상을 밝혀준 류 선생의 조언과 이를 수용한 문 화백의 노력이 일궈낸 걸작이라고 할 수 있었다.

 
칠순 잔치 당시 서정서 여사, 조카 서인석 바오로 신부, 서준석 마오로 수녀와 함께.


불꽃이 향기가 되어

류 선생은 평협 회장직을 마치고도 군종후원회 부회장, 천진암 성역화 부위원장 등 다양한 역할을 맡으며 평신도로서 한국 천주교회의 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애썼다. 나아가 성라자로마을돕기회 회장을 맡는 등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2티모 4,7)

바오로 사도처럼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던” 그는 1995년 6월 13일 평생 의지했던 하느님과 자신을 하느님께 인도해준 신앙의 선조들 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며 한국 천주교회를 위해 끊임없이 전구하고 있다.

지금까지 류 선생이 걸어왔던 삶과 신앙 여정을 살펴보았다. 그는 선조들처럼 학문을 통해 하느님을 알게 되었고, 알게 된 하느님을 위해 평생 헌신한 신앙인의 모범이었다. 그는 자신의 사상적 토대였던 유학의 가르침, 곧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삶을 천주교 평신도로서 온전히 살아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주님의 섭리는 그가 교회에 헌신할 수 있도록 늘 그를 보호하고 인도해주셨다.

하느님께서는 류 선생과 신앙의 선조들처럼 현재를 사는 우리도 진리에 대한 갈망을 통해 당신을 찾고 알아보길 바라고 계신다. 또한 당신을 아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그렇게 알게 된 당신을 위해 세상 안에서 힘껏 살아보길 원하신다. 비록 그 여정이 힘들더라도 그러한 삶은 결코 실패할 수 없다. 신앙의 선조들이 이미 그 길을 닦아 놓았고, 류 선생이 삶으로서 우리에게 그 모범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가 평생을 두고 피워낸 불꽃은 진한 향기가 되어 앞으로 우리가 나아갈 길을 안내해주고 있다.

 


김선필(베드로, 서강대학교 신학연구소)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가톨릭평화신문 공동기획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6-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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