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비의 그리스도교적 상징은 예수님께서 유다 지파의 후손이라는 데서 출발한다. 유다교 종교력에서 니산(Nisan)은 한 해가 시작되는 첫 달로, 어원은 ‘꽃봉오리’를 뜻하는 히브리어 니찬(nitzan)으로 추정된다. 오늘날 양력으로 3~4월에 해당하는 니산은 봄, 즉 꽃봉오리가 맺히는 시기와 맞물린다. 한편 아랍어에도 니산(nissan)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는 양귀비를 비롯해 아네모네·튤립 등 봄에 피는 붉은 꽃들을 총칭한다.
니산 달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시기이기도 해서 사람들은 선홍색의 ‘니산’ 꽃에서 예수님의 수난을 연상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께서 흘리신 피가 떨어진 자리에서 개양귀비(Papaver rhoeas)가 피어났다고 한다.
개양귀비는 화려한 꽃을 보기 위해 재배되는 관상용 식물로, 예로부터 옥수수밭·밀밭 같은 경작지에서 흔히 볼 수 있어 들양귀비·밀양귀비라고도 불린다. 개양귀비는 종자의 생명력이 강해 땅 속에 오래 잠들어 있다가도 밀을 가꾸기 위해 땅을 새로 일구면 싹이 터 자라고, 밀밭이 황금으로 물드는 초여름 무렵 붉은 꽃을 피운다. 사람들은 황금빛 밀밭과 어우러진 선홍색 양귀비의 모습에서 그리스도의 성체(밀)와 성혈(양귀비)을 함께 떠올렸고, 이에 따라 양귀비는 성찬례를 상징하게 되었다.
아편양귀비(Papaver somniferum)도 붉은 꽃을 피우지만 개양귀비와는 다른 종류로, 덜 익은 열매 안에 든 유액에 수면과 환각을 유도하는 성분이 있어 많은 지역에서 재배가 금지 또는 통제되고 있다. 그리스도교 미술에서 아편양귀비는 영면과 죽음을 상징한다. 서양에서 양귀비가 전사자를 추모하는 꽃이 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다. 전장의 흙이 파헤쳐지면서 싹을 틔운 붉은 양귀비꽃이 벌판을 가득 뒤덮은 모습에서 사람들은 전사한 군인들이 흘린 피를 떠올렸다. 지금도 종전 기념일, 현충일이나 재향군인의 날에는 종이 양귀비꽃을 옷에 달고 전쟁에서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는 풍습이 이어지고 있다.
얇은 종잇장처럼 구깃구깃한 양귀비의 붉고 가냘픈 꽃잎에서 우리는 타인을 위해 자신을 내어준 가장 숭고한 형태의 사랑을 기억한다. 조국과 이웃을 위해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젊은이들. 인류 구원을 위해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주시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예수님. 양귀비야말로 그리스도교의 핵심 메시지인 사랑과 희생의 가치를 가장 근사하게 상징하는 하느님의 창조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