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교구 가은본당 전곡공소는 가은읍 민지길 26(전곡리 881-2)에 자리하고 있다. 예부터 사람들은 이 고을을 산이 높고 강이 깊고 넓다 하여 ‘큰골’ 곧 ‘대곡’(大谷)이라 했다. 이 고을에 ‘물미’ ‘앞소골’ ‘너븐열’ ‘골마’ ‘중마’ ‘학교마’라 불리는 마을이 자리했다. 물미는 산에서 물이 난다고 해 ‘물뫼’라 부르던 것이 변음된 것이다. 그래서 물미를 한자로 ‘수산’(水山)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앞소골은 골마 앞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한자로 ‘전곡’(前谷)이라 한다. 너븐열은 마을 앞에 흐르는 강폭이 넓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골마는 산이 높고 골이 깊어 붙여진 이름이고, 새 마을과 골마 중간 지점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중마라 불렀다. 또 학교마는 학교가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이들 마을은 ‘목고개’와 ‘가실목고개’로 경계를 이룬다. 목고개는 가은읍 전곡리와 성유리 사이에 있다. 목고개를 넘어 서쪽으로 가면 너븐열과 앞소골, 물미가 나온다. 물미에서 가실목고개를 넘으면 농암이다. 농암장터에서 약 3㎞ 서쪽으로 가면 쌍용이 나온다. 전곡·성유·농암·쌍용공소로 가려면 모두 이 두 고갯길을 넘어야 한다.목고개 동쪽에는 성 밑 마을(성저리)이 나오고 약 2㎞를 더 가면 해발 500m의 옥녀봉이 우뚝 서 있다. 옥녀봉은 6·25전쟁 때 맞은 편 대방산에 주둔해 있던 국군과 교전하다 수많은 인민군이 전사한 격전지이다. 이 옥녀봉 아래 작천마을이 있고, 작천과 마주한 영강 건너 마을이 후백제 시조 견훤이 태어난 갈전리 아차마을이다.
전곡공소 제단. 나무 제대와 제단 벽의 작은 십자가, 그 양옆의 예수 성심상과 성모상이 소박함을 전해준다.
경상도 북부 선교 핵심 거점 마련
전곡공소의 옛 이름은 ‘물미공소’였다. 이름과 지명 표기가 ‘물미’, ‘수산’이라 해서 안동교구에서 가장 유서 깊은 상주 퇴강의 물미 교우촌과 또 1909년에 설립된 예천군 풍양면 고산리 수산공소와 헷갈려선 안 된다.
물미공소는 1933년께 설립됐다고 한다. 1911년 4월 8일 대구대목구가 설정되고 초대 대목구장으로 드망즈 주교가 임명됐다. 그는 1938년까지 재임하면서 경상도 북부 지방을 1915년 11월, 1921년 11월, 1926년 11월 세 차례 사목 방문했다. 드망즈 주교는 제2차 경상도 북부 지방 사목방문 직후 1922년 점촌 공평본당과 상주 퇴강본당을 설립한다. 또 제3차 사목방문 이듬해인 1927년 안동본당을, 그리고 1932년 예천본당을 설립해 경상도 북부 지역 본당 사목구 핵심 거점을 확보했다. 드망즈 주교는 이들 본당을 중심으로 전교를 활발히 하고 새로운 공소들을 설립해 선교 활동의 디딤돌로 삼았다. 이처럼 드망즈 주교가 경상도 북부 지역 선교에 큰 힘을 쏟은 결실로 가은읍에 전곡공소와 함께 율수(1937년)·사현(1938년)공소가 설립됐다.
이 시기 문경 일대에 살던 교우들은 상을 당한 주민들을 찾아가 유가족들을 위로하고 고인을 위해 기도하는 등 상장례를 도우면서 전교를 했다.
“문경군 가은면 왕릉리공소는 문경 공평리 김문옥 신부의 관할 지방인 바 성당과 신부 주택을 구비하니 촌 공소로는 확실한 건물인데 그 공소 회장 김 가시미로 씨가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건축하였을뿐더러 간수하기에도 극력하야 곤란한 터이러라. 그 근처 5리 허에 사는 가련한 좌객 병신이라 영세한 지 5, 6년에 성사 때마다 왕릉리 신자들이 매양 짊어지고 오든지 혹 소에 실어다가 성사를 보게 하더니 지나간 첫 봄에 괴로운 세상과 성가스러운 육신을 벗어버린지라. 그 불쌍한 육신이 죽은 후에는 더군다나 남을 의지하여야 땅속에도 들어갈지라. 회장과 신자 제씨가 애긍을 거두어 가지고 장례를 거룩히 지내주자 망자의 외인 친척과 모든 이 보고 감축하며 성교를 찬성하였으니 이런 표양은 실로 발사마 향과 같은 선행이더라”(「경향잡지」, 1929년 제660호)
“문경 공평본당에 다년간 남의 집 고용살이로 근근이 생활하여 가던 빈한한 신자 하나가 거월 하순 경에 불행히 중병이 걸려 주의 품에서 선종하여 동 본당 신자들은 일반적으로 생활이 빈곤함에도 불구하고 100여 원 금액을 수합하여 망자의 영혼을 위하여 미사 한 대를 봉헌하고, 망자의 가족에게 그 잔액을 애긍하야 혹독한 위치에 굶주림을 면케 하였으므로 의지 없이 된 그 처자들은 부친상을 당한 설움 속에서도 많은 위로를 받고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는 중이다.”(「경향잡지」, 1936년 제822호)
전곡공소 전경. 전곡공소는 1933년에 설립된 가은읍의 유서 깊은 공소다.
주민 초대해 성모 관한 영화 상영해 인기
1952년 왜관에 정착한 성 베네딕도회 상트오틸리엔연합회는 당시 사제가 부족했던 대구대목구의 위임을 받아 김천·상주·함창·점촌 등 경상도 북부 지역 본당을 사목했다. 이를 계기로 교황청은 1956년 3월 ‘왜관감목대리구’를 설정했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은 이때부터 1986년 왜관감목대리구를 해체하고 관할 모든 본당을 대구대교구에 이관할 때까지 30년간 20개 본당을 신설하는 등 활발한 선교 활동을 펼쳤다. 왜관감목대리구의 신설 본당 중 하나가 1957년 5월에 설립한 가은본당이다.
가은본당 초대 주임(1957~1961) 에르네스토 지베르츠(한국명 지인수) 신부와 제2대 주임(1961~1965) 이경우(가브리엘) 신부는 시청각 교리교육으로 전교에 힘썼다. 특히 이 신부는 매 주일·목요일 밤마다 예비신자뿐 아니라 주민들을 초대해 성모님에 대한 영화와 재미난 애니메이션을 상영해 큰 인기를 끌었다. 당시 교계신문 보도에 따르면 면민 700여 명이 매주 교리 시간을 고대했다고 한다.
설립 90년 넘은 전곡공소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다. 1933년께 설립됐고, 조세웅(프란치스코) 초대 공소 회장이 1950년부터 1977년까지 재임했고, 정재경(피델리스) 제2대 회장이 1978년부터 지금까지 봉사하고 있다는 것이 거의 전부다. 조 회장 집에서 매 주일 공소예절을 하다 1988년 10월 2일 지금의 공소를 지어 봉헌했다.
전곡공소는 조립식 패널로 지어졌다. 최근 새로 고쳐 제법 깔끔하다. 대문이 없어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지만 공소 현관문은 공소 회장이 관리하고 있어 사전에 연락하고 방문해야 한다.
공소 마당 오른편에 성모상이 마을을 뒤로하고 서 있다. 스테인리스로 아치를 만들어 설치해 둔 것이 이색적이다. 입구를 제외한 공소 내부 세 벽면 모두 나무 패널로 장식해 따뜻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또 입구와 양측 벽면에 큰 창을 내어 개방감을 준다. 제단을 제외한 세 벽에는 십자가의 길 14처가 장식돼 있다. 14처는 1960~1970년대 본당과 공소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예수님 수난’ 성화로 구성돼 있다.
회중석은 제대를 중심으로 ‘U’모양으로 놓여있다. 서로 마주 보면서 미사나 공소예절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서다. 제단은 회중석과 구분 없이 일체형으로 돼 있고 나무 제대가 제단과 회중석을 나눈다. 제대 뒤에는 작은 십자고상이 설치돼 있고, 양 옆에 예수 성심상과 성모상이 놓여있다.
전곡공소 교우 수는 10명 안팎이다. 그래도 공소를 지키고자 교우 모두가 힘을 보태고 있다. 서로 ‘신앙의 벗’이 되기 위해 공소 게시판에는 교우들의 활동을 담은 사진들이 전시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