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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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토회 영성과 평수사들의 ‘거룩한 노동’으로 일군 하느님 정원

[중세 전문가의 간김에 순례] 78. 오스트리아 라인 시토회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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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슈타이어마르크주(州)의 라인 수도원. 1129년 트라운가우 가문의 변경백 레오폴트 1세가 창건한 시토회 수도원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 중단 없이 존속해 온 시토회 수도원으로 알려져 있다. 수도원 성당은 1979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준 대성전으로 지정됐다. 현재 그라츠·제카우 교구 소속으로 14명의 수도자들이 그라츠 북쪽의 8개 본당으로 구성된 라인 본당연합의 사목과 교육을 맡고 있다.


오스트리아를 여행하다 보면 가톨릭 영성의 한 축을 이루는 시토회 수도원을 자주 마주하게 됩니다. 독일의 수도원 풍경을 성 베네딕도회가 대표한다면 오스트리아의 수도원 풍경 한가운데에는 시토회가 서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일리겐크로이츠, 츠베틀, 빌헤링 등 대도시를 벗어난 곳에서 만나는 유서 깊은 수도원들이 대부분 시토회 수도원이지요. 오스트리아 남동부 대학도시 그라츠 인근에 자리한 라인 수도원도 그중 하나입니다.

1129년 설립된 라인 수도원은 세계에서 가장 오랜 세월 동안 활동의 중단 없이 존재해온 시토회 수도원입니다. 오래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주목받지만, 이 수도원을 소개하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중세 오스트리아에서 왜 시토회가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그리고 평수사가 중심이 된 시토회 영성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라인 수도원 큰 뜰과 바실리카 정면. 1737~1747년부터 기존 로마네스크 성당의 축을 유지하면서 후기 바로크 양식으로 대대적으로 개축하였다. 정면의 성 베르나르도 상은 시토회 정체성을 보여 준다.


기도하고 일하며 황무지에 건설한 공동체

1129년 3월 25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에 독일 프랑켄 지방의 에버라흐 수도원에서 온 수도자들이 무르강의 외딴 골짜기에 도착합니다. 그들이 찾아온 곳은 대도시나 주교좌 성당이 자리한 중심지도 아니라 울리히스베르크 산자락의 황무지였습니다.

1098년 프랑스 시토에서 시작된 베네딕도회 개혁 운동으로 탄생한 시토회는 당시 귀족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수도회였습니다. 클뤼니식 장엄함과 달리 검소함을 내세웠고, 수도원 네트워크를 통해 새로운 수도원을 빠르게 세울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땅을 일구는 데 능했습니다. 시토회 수도자들은 ‘기도하고 일하라’는 영성에 충실하려고 일부러 거친 계곡과 숲을 수도원 자리로 선택했고, 곧 농업·목축·수공업 등으로 자급자족 공동체를 건설해 나갔습니다.

황무지를 일궈낸 주역은 다름 아닌 ‘평수사’였습니다. 시간 기도와 전례, 학문을 맡았던 가대 수도자와 달리, 성직자가 아니었던 평수사들은 수도원 외곽 농장에 살며 밭을 갈고, 가축을 돌보고, 물길을 다스리는 육체 노동을 전담했습니다. 중세의 화려한 문헌들은 성직 수도자들이 남겼지만, 오늘날 우리가 보는 수도원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은 이름 없는 평수사들의 거룩한 땀방울이 만들어낸 것이었습니다. 라인 수도원 주변에서 생산되는 포도주와 과일주스, 슈납스 등 라인 특산물은 여전히 이곳이 하느님을 섬기는 학교인 동시에 땅을 일구는 일터였음을 묵묵히 증언합니다.

 
라인 수도원 성당 주 제대와 본랑. 18세기 개축을 거치며 밝고 넓은 바로크 성당으로 바뀌었다. 남쪽에 성 요셉, 천사, 성녀 바르바라, 성 세바스티아노 제대가 있고, 북쪽에 성녀 안나, 모든 성인, 성 요한 네포무크, 성 나르치소 제대가 배치되어 있다. 천장과 벽면의 회화에는 성 베네딕토와 성 베르나르도, 성모 마리아의 장면이 펼쳐지고, 네 가지 윤리 덕(예지·정의·용기·절제)의 상징도 담겨 있다. 1768년 완공된 주 제대의 제대화(1779)는 ‘크렘스의 슈미트’라 불리는 마르틴 요한 슈미트의 작품이다.


대제국 성장의 발판 마련한 서약 맺은 곳

라인 수도원이 자리한 슈타이어마르크주(州)는 중세에 게르만 세계와 슬라브 세계, 도나우권과 발칸 세계가 교차하는 변경이자 국경 지대였습니다. 자연스럽게 여러 귀족 가문의 이해관계와 제국 정치가 치열하게 얽히던 땅이었지요.

이곳에서 오스트리아 역사상 중대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1276년 9월 19일 슈타이어마르크와 케른텐 지역 귀족들이 라인 수도원에 모여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 1세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것입니다. 당시 보헤미아의 왕 오타카르 2세와 갈등을 빚던 루돌프 1세는 이 ‘라인 서약’을 발판 삼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지배를 공고히 다졌고, 이는 훗날 대제국으로 성장하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라인 수도원은 영혼의 구원을 위한 신앙의 장소인 동시에 격동의 시대에 정치적 신뢰와 지역 질서를 확립하던 장소였던 것이죠.


화려한 바로크 장식에 새겨진 시토회 정신

지역 버스가 그라츠 중앙역을 떠나 30분 남짓 북쪽으로 달리면, 무르강 북쪽 지류의 조용한 계곡 안쪽에 자리한 바로크 양식의 수도원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시토회라고 하면 으레 검소하고 단출한 로마네스크 공간을 떠올리기 쉽지만, 성당 문을 열고 들어서면 예상치 못한 ‘반전’이 순례자를 맞이합니다. 현재 수도원 성당 모습은 18세기 바로크 시대의 산물로, 붉은빛 스투코 대리석, 곡선으로 이어지는 벽기둥, 화려한 제대가 펼쳐져 있습니다. 성 베네딕토의 수비아코 은수 생활과 성 베르나르도의 십자가 환시 등이 그려진 천장화는 베네딕도회 전통과 시토회 개혁 정신이 결합해 있음을 시각적으로 보여 줍니다.

주 제대에 그리스도의 탄생과 목자들의 경배 제단화가 보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탄생을 화려한 궁전이 아닌, 밤새 들판에서 일하던 목자들에게 가장 먼저 알리셨듯, 과거 이곳에서 이름 없이 묵묵히 일하던 평수사들의 삶 속에 하느님이 함께하셨음을 상기시킵니다.

 
12세기 중반에 설립된 라인 수도원 도서관(위), 수도원 도서관의 대표 필사본인 볼프강 미사 경본(1492년경)(가운데) 2021년도 은총의 열쇠(아래). 현재 수도원 도서관에는 중세 필사본 390점을 포함해 약 10만 점의 자료가 소장되어 있다.


일 년에 단 한 번 허락된 은총, 열쇠로 간직

오늘날에도 라인 수도원에 순례지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것은 ‘라인 은총의 열쇠’라 불리는 순례 전통 덕분입니다. 1479년 식스토 4세 교황의 칙령으로 원래 수도자들만 들어갈 수 있었던 수도원 성당이 부활 제2주일에 한해 일반 신자들에게 개방되었습니다. 그전까지 신자들은 수도원 밖 성 제오르지오 소성당에서 따로 미사를 봉헌해야 했지요.

신자들은 일 년에 단 한 번 수도원 성당에 들어가는 것을 큰 은총으로 여겼고, 이를 기념해 만든 작은 열쇠 모양의 기념물을 묵주에 매달아 소중히 간직했습니다. 지금도 부활 제2주일이 되면 주변 본당 공동체가 함께 모여 성대한 축제를 벌입니다.

수도원 주변으로 옛날 평수사들이 땀 흘려 일구었던 땅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그들에게 기도는 삶의 자리를 정리하는 일이었으며, 노동은 세상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거룩한 봉헌이었습니다. 수백 년 전 그들의 묵묵한 노력의 결실을 보며, 나는 지금 어떤 자리를 일구고 있는지, 내 영혼 속에 채 정리되지 않는 거친 숲이 있지 않은지 성찰해 봅니다.

 


<순례 팁>

※ 그라츠 중앙역에서 레기오버스(110번) 타고 Rein Stift Rein 정류장 하차.(30분 소요)

※ 대성당 미사 : 주일과 대축일 09:30, 평일 07:00. 시간 전례 06:00, 12:00, 18:00. 수도원 투어(3.28~1.6 10:30, 13:30, 90분) 수도원 성물방과 레스토랑이 있다. 인근에 성모 순례지인 마리아 슈트라스엥겔 성당도 추천.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이 마련한 2026 유럽 수도원 성지 순례. 문의 및 신청: 분도출판사, 010-5577-3605(문자)

 

차윤석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6-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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