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봉근(安鳳根, 1887~1945?, 요한 세례자)은 안중근의 사촌 동생이다. 오늘 우리가 그를 주목하는 것은 독일에서 동아시아 문화 전문가로서 문화 독립운동을 한 그의 독특한 이력 때문이다. 이미륵에게 독일 유학과 정착의 길을 열어주었고, 손기정에게 처음으로 태극기를 보여주어 그를 민족주의자로 변화시킨 사람이다. 받고 싶은 도움을 타인의 성장을 위해 기꺼이 내준 안봉근을 삶을 통해 “과거가 현재를 살리고 죽은 자가 산자를 살리는” 역사를 경험하기를 바란다.
빌렘 신부의 뜻하지 않은 제안
1914년 1월, 4년 전 뤼순 감옥에서 안중근 토마스에게 종부성사를 준 빌렘 신부가 안봉근 요한에게 물었다.
“요한아, 나를 따라 독일로 가겠니? 가서 공부도 하고?. 토마스는? 그렇게 죽었지만 헛된 죽음은 아니다. 토마스의 뜻은 살아 있고 조선은 어떻게든 다시 살아날 거야. 그때를 위해서 준비를 해야지.”
안중근의 사촌 동생 안봉근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빌렘 신부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신부님, 제가요?”
빌렘 신부가 온화한 표정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부하려면 돈도 많이 들 텐데요.”
“너도 기억하지? 지난번 청계동에 왔던 베버 신부님과 포겔 신부님 말이다. 너를 데리고 가고 싶다는 뜻을 비쳤더니 수도원에 머물게 해주신다고 하는구나.”
“수도원에서 지내면서 네가 하고 싶다는 기계학 공부도 하고 교리 공부도 하면 좋을 것 같구나. 조선 선교를 희망하는 선교사들에게 조선말을 가르칠 수도 있고. 그럼 너도 덜 미안하지 않겠니?”
빌렘 신부는 봉근을 볼 때마다 안중근과의 마지막 3일이 떠올랐다. 죽음을 앞둔 안중근 토마스는 종부성사를 볼 수 있게 사제를 보내달라는 전보를 뮈텔 주교에게 보냈었다. 주교는 거절했으나 빌렘 신부는 주교의 뜻을 거스르고 토마스를 찾아 뤼순 감옥을 찾아갔다. 빌렘 신부에게 안중근은 특별했다. 그가 열여덟 살 때 세례를 주었고 자신의 복사로 곁에 두었다. 감옥에서 마지막 미사를 할 때 안중근은 복사가 하는 라틴어 응답문을 한 구절도 잊지 않고 있었다. 빌렘 신부는 일부러 더 천천히 미사를 드렸다. 안중근이 가능한 한 오래 하느님을 느끼기를 바랐다. 안중근에게 성체성사와 노자성체를 주었고 그의 도움을 받아 제의를 벗고 미사를 마쳤다.
빌렘 신부는 스무 살의 안중근이 상해나 동경에 가서 몇 년간 공부하고 싶다고 했을 때 “돈을 많이 들이지 않고도 또 신앙을 잘 지키면서 공부할 수 있을 것이니 보내도 되겠다”는 편지를 뮈텔 주교에게 직접 보냈었다. 그러나 그의 유학은 실현되지 않았다. 빌렘 신부는 안중근에게 해주지 못한 것을 봉근에게 해주고 싶었다. 봉근 역시 사촌 형 안중근 토마스처럼 빌렘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고 복사를 했기에 가까운 사이였다.
안봉근·최 루갈다 부부와 세 자녀. 왼쪽부터 둘째 창순 에우세비오, 첫째 창익 프란치스코, 셋째 창준 라우렌시오. 안기명 제공
빌렘 신부의 뜻하지 않은 제안을 받은 봉근은 가족을 두고 떠나는 것이 마음에 걸리면서도 일견 새로운 넓은 세상으로 가고 싶어 쿵쿵거리는 심장을 한 손으로 지그시 눌렀다. 봉근은 만주로 상해로 돌아다니는 형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부러웠다. 안중근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일경의 감시를 받는 것도, 이웃들이 예전과 다르게 거리를 두고 대하는 것이 속마음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이 상했다.
봉근이 빌렘 신부와 헤어져 집에 들어서자, 마당에서 놀던 두 아들이 달려들었다. 인사를 하면서도 네 개의 똘망똘망한 눈동자는 아버지 손에 든 신문 뭉치에 더 눈이 쏠렸다. “프란치스코야, 친구들과 나누어 먹어라.” 봉근의 허락이 떨어지자 큰아들 프란치스코가 수제비떡을 싼 신문 뭉치를 냉큼 받아들더니 동생 에우세비오의 손을 잡고 부리나케 나갔다. 프란치스코는 청계동을 찾은 베네딕도회 베버 신부 일행에게 꽤 귀염성 있게 굴어 이쁨을 많이 받았다. 다섯 살 프란치스코가 쪼그리고 앉아 신부들의 담뱃대를 순서대로 받아들고 담뱃잎을 채워넣을 때면 평생 담배를 태운 누구보다 솜씨가 좋다고 칭찬했다. 아이들 뒷꼭지를 흐뭇하게 쳐다보며 돌아서던 봉근의 눈길이 부엌에서 젖은 손을 치맛자락에 문지르며 나오던 루갈다와 마주쳤다.
12년 전, 빌렘 신부의 복사 열다섯 봉근은 일곱 살 많은 루갈다와 결혼했다. 그날 봉근은 솜을 넣은 바지와 소창의를 입고 상투를 틀고 머리에 정자관을 썼다. 루갈다는 황해도 여자들이 하는 얹은머리를 하고 녹색 저고리에 다홍치마를 입었다. 치마는 풀 먹인 다듬이질을 너무 세게 했는지 햇살을 받을 때마다 번쩍거렸고 버석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날 빌렘 신부는 봉근의 가족 사진을 찍어줬다. 사진 뒷면에 “교황의 조선 선교사 니콜라스 조셉 빌렘”이라고 새겨진 자신의 도장을 찍었다. 사진 속 봉근은 어렸고 루갈다는 시집 식구들 사이에서 멋쩍게 서 있다.
본관(本貫)이 해주인 루갈다의 아버지 최형규 시몬 역시 빌렘 신부의 복사이고 전교회장도 했다. 한자에 조예가 깊은 장인은 사립 해동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바쁜 와중에도 빌렘 신부가 어려운 일을 겪을 때마다 신부가 써준 편지를 들고 서울 종현 주교관을 찾아가곤 했다. 빌렘 신부는 2년 전 성모 성탄 축일(9월 8일)에 새 종 축복식을 하고 해주에 본당을 세웠다.
성당을 짓기도 전에 400원짜리 프랑스산(産) 종을 마련할 수 있었던 연유는 공소집 주인이었던 김 베네딕토의 유언 덕분이었다. ‘본당 종 구입비 300원을 반드시 본당 신부에게 기부하라’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두 아들이 300원을 가져왔고 감동을 받은 빌렘 신부는 거기다 100원을 보태서 종을 주문했다. 초대 본당 회장을 맡은 장인은 더 바빠졌다. 신자들의 수가 늘었고 빌렘 신부는 성당을 지을 요량으로 해주 남문밖 서영정 땅을 구입했다. 그때부터 장인은 그 땅에 딸린 집에 들어가 살면서 본당 부동산도 관리했다.
안봉근의 장인 최형규 시몬. 빌렘 신부의 복사였으며 황해도 해주본당 초대 전교회장이었다. 안기명 제공
“막내 라우렌시오는 자우?” “네. 오늘따라 일찍 일어나서 형들이랑 신나게 놀더니 지도 부치는지 낮잠을 좀 오래 자네요. 그저께부터 콧물 바람이에요. 형들과 달리 약해서 걱정이에요. 그것보다 신부님이 갑자기 왜 부르셨어요? 또 무슨 일이 있나요?” 빌렘 신부가 뮈텔 주교님뿐만 아니라 다른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님들과 겪고 있는 어려움을 아버지와 남편을 통해 들어 대충 알고 있던 루갈다도 걱정이 앞선 목소리였다.
“신부님은 고향으로 돌아가실 것 같아. 다시 오기는 힘드시겠지. 같이 가자고?. 독일 가서 공부를 해보면 어떻겠냐고 하시네.”
“아이고? 신부님 떠나실까 걱정은 했지만 이렇게 갑자기요? 그런데 임자를 데리고 가고 싶다고 하셨단 거죠?”
“신부님이 장인어른과 이미 말씀을 나누었나 봐. 큰물을 보고 문리도 더 틔워야 교회에 쓸모있는 사람이 되지 않겠느냐고?.”
루갈다는 얼굴을 돌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씨 집안 남자들의 성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사촌 아주버님들이 그동안 한 일들을 생각하면 남편도 가만있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불안감을 가졌지만 애써 눌러두었을 뿐이었다. 지난해 부활 첨례날에 남편은 신자들 앞에서 예수 부활하신 후부터 그날 저녁까지 일어난 여러 가지 신묘한 기적을 구구절절 잘도 풀어냈다. 신자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서 있던 빛나는 봉근의 모습이 자랑스러워 가슴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었다. 머릿속이 아득해진 루갈다는 어릴 때부터 품고 다니던 몸고상을 만지작거리며 두서없이 말을 이었다.
“언제요? 얼마나 걸릴까요? 가시는 곳은 어디랍니까? 여비는 어떻게 마련하죠? 옷 한 벌이라도 새로 장만해야 하는데?.” 봉근은 루갈다의 거칠어진 손을 잡았다. 그리고 빌렘 신부가 독일로 함께 가자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머리에 떠올랐던 성경 구절을 속으로 되뇌었다. “주께서 쓰시겠답니다.”(루카 19,34)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