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학순 주교 일본 방문 돕던 부친, 지 주교 체포 소식에 충격
“가만히 있어선 안 된다”며 한국서 보낸 원고 복사·보관·전달
“그 시절 일본 가톨릭교회, 외면하지 않고 한국 민주화 뒷받침”
“아버지가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지 반세기 만에 처음 상을 받은 겁니다. 분명 천국에서 기뻐하고 계시겠죠.”
고 송영순(바오로, 1931~2004) 전 일본 가톨릭정의평화협의회 간사의 아들 송정빈(베드로, 65)씨가 10일 ‘제39주년 6·10민주항쟁 기념식’에서 부친에게 수여된 국민훈장 석류장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재일동포인 송 전 간사는 1970~1980년대 일본에서 한국 민주화운동을 도운 공로로 훈장을 받았다.
대전 출신인 송 전 간사는 10대 때 먼저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형의 권유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형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오키나와에서 숨졌고, 송 간사는 타지에서 홀로 고학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다 고 김수환 추기경과 육촌 관계인 김애자(아녜스, 1933~2023)씨를 만나 결혼하며 가톨릭 신자가 됐다.
아들 송정빈씨도 부모의 뒤를 따라 현재 도쿄대교구 고엔지본당(도쿄 스기나미구 소재)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그 역시 김 추기경 주선으로 1990년대 성가정입양원에서 근무하던 신자인 부인과 결혼했고, 슬하에 두 자녀를 뒀다.
“어머니의 신앙이 기도 중심이었다면, 아버지의 신앙은 행동 중심이었습니다. 이웃의 아픔이 곧 내 아픔이라고 여기셨죠. 한국 가톨릭교회가 정의와 진실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모습에 감화돼 그 길에 함께하신 겁니다. 한국과 일본 교회가 연대하는 데 가교 구실도 하셨죠. 어린 시절 저희 집에 김 추기경님과 지학순 주교님, 제임스 시노트 신부님 등이 오신 기억이 납니다.”
송 간사가 본격적으로 정의평화 활동에 뛰어든 계기는 1974년 유신정권에 초대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면서다. 지 주교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송 간사는 김 추기경 부탁으로 일본 체류를 도우며 가까워졌다. 이후 지 주교가 한국으로 돌아가자마자 김포공항에서 체포됐다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송씨는 “아버지는 ‘이건 말도 안 된다. 가만히 있어선 안 된다’고 결심하셨다”고 회고했다.
이후 송 간사는 언론의 자유가 막힌 한국 대신 일본에서 독재정권 치하 고문과 구속·탄압의 진상을 세계에 알렸다. 김정남(요한 세례자) 선생과 함세웅(서울대교구) 신부 등 한국 민주화 운동가들과 교류하며, 한국에서 건너온 편지와 원고를 복사하고 보관했다.
어린 송씨도 그 활동의 한복판에 있었다. 집에 복사기가 없던 시절, 그는 자전거를 타고 동네 문방구에 가 한국에서 온 원고를 복사했다. 자료는 대개 세 부씩이었다. 송 간사는 이를 보관하고, 필요한 곳에 전달하며 한국에서 건너온 진실이 사라지지 않도록 힘썼다.
송씨는 “문방구에 가면 아저씨가 ‘또 왔네. 세 부 맞지?’ 했던 기억이 난다”며 “저도 한국 민주화운동에 이바지했다는 자부심이 있다”고 미소 지었다.
아들에게 계속 심부름을 시키는 게 마음에 걸렸는지 1980년대 들어 송 간사는 할부로 복사기를 마련했다. 작은 도쿄 집 방 한쪽을 차지한 복사기는 한국에서 보내온 생생한 증언을 전파하는 귀한 통로가 됐다. 1988년 ‘가톨릭평화신문’(당시 ‘평화신문’)이 창간되자 그는 일본지사도 담당했다. 송씨는 주말마다 온 가족이 모여 신문 300~400부를 포장해 우체국으로 가져갔다고 회상했다.
그는 또 “일본 가톨릭교회가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을 뒷받침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라며 일본 교회의 연대를 ‘착한 사마리아인’에 비유했다.
“그냥 옆에 있다고 이웃이 아닙니다. 아픔을 함께 감수하고 함께 이겨내려 하는 것이 바로 이웃이죠. 그 시절 일본 가톨릭교회가 함께해줬기에 아버지도 혼자 싸우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이학주 기자 goldenmouth@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