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제물포가 눈에 들어왔다. 어제 해주 용당포에서 배를 탄 지 하루 만이다. 빌렘 신부를 따라나서기로 결정을 내린 후 봉근은 생전 처음 ‘여권’을 만들고 ‘여권 사진’이라는 것을 찍었다. 1910년 10월 ‘외국여권규칙’이 반포되면서 한국인의 여권 발급은 조선총독부 내 총무부 외사국에서 담당했다. 첨부할 서류도 많았고 시간도 오래 걸렸다. 물론 일제의 식민통치에 협조하지 않거나 반대할 여지가 있는 사람에게는 일절 여권을 발급하지 않았다. 마치 삼천리 금수강산을 감옥으로 만들 작정인 듯했다. 안중근의 사촌이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떠날 날짜가 가까워도 여권이 나오지 않아 빌렘 신부가 서울까지 올라갔고 독일인 신부들의 도움을 받아 여권을 받아왔다.
세 아들과 아내 루갈다를 두고 나서는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봉근은 모든 것을 좋으신 하느님, 자비하신 하느님께 맡겨드리고 기도했다. 가능한 한 빨리 돌아와 오랜 박해와 순교를 딛고 세워진 한국 천주교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한 달여의 항해를 거쳐 프랑스 마르세유에 도착한 봉근은 잠시도 어느 한 곳에 눈을 둘 수 없었다. 자기가 그동안 살던 세상과는 완벽하게 다른, 오리무중 어딘가에 떨어진 두려움에 눈알이 계속 돌아가고 헛걸음질을 하였다. 그 와중에 낯익은 모습이 보였다. “신부님, 저기...저기...저기 성모님이요. 성모님이 하늘에서 내려오셨나봐요.” 봉근이 까무러칠 듯 놀라며 빌렘 신부의 옷자락을 잡아당겼지만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대성당(수호의 성모)의 큰 성모상을 보고 놀랐을 것을 아는 신부는 “성모님은 하늘에 계셔. 내려오시지 않았어”라고 웃으면서 봉근을 재촉해 기차역으로 향했다. “저기가 생샤를 기차역”이라는 빌렘 신부의 외침에도 봉근은 눈부시게 빛나는 성모님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마르세유에서 기차를 타고 리옹, 디종, 낭시를 거쳐 독일 국경 인근 스트라스부르에 도착했다. 꼬박 하루하고 반나절만이었다. 거기서부터 다시 여러 차례 기차를 타고 내렸지만 빌렘 신부를 놓치지 않으려고 신부의 수단 뒷자락만 쫓았기에 봉근은 도대체 어디서 타고 어디서 내렸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어느 순간 빌렘 신부의 얼굴에는 안도와 기대가 엇갈렸다. 봉근에게 “여기다. 이제부터 우리가 지낼 수도원이야.” 기차가 떠나고 나서야 봉근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상트 오틸리엔역 뒤로 보이는 수도원.
낯선 냄새, 낯선 건물, 낯선 골목, 낯선 사람들…. 그 낯섦을 뚫고 마침내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도착했다. 수도원에서 마중 나온 신부들의 모습이 보이자 빌렘 신부가 뭐라 소리를 치며 손을 흔들었다. 3년 전 황해도 청계동 집에 온 독일 신부들에게 배운 간단한 독일어 인사와 배를 타고 오며 빌렘 신부에게 배운 몇 가지 독일어 문장을 오는 내내 입속으로, 어떤 때는 캄캄한 바다를 보고 큰소리로 수백 번도 더 반복했으나 그 순간 머릿속이 시허옇게 되었다. 봉근은 빌렘 신부와 수도사들을 쫓아 사람 키의 4~5배는 족히 되어 보이는 거대한 수도원 정문을 통해 마당을 가로질러 긴 복도를 지나 어느 방으로 안내되었다.
“반가워요. 요한, 다시 만나 얼마나 반가운지 모릅니다.” 포겔 신부는 오랜 여행 끝에 고향으로 돌아온 아들을 보듯 기쁘게 봉근을 맞아주었다. 봉근이 서툰 독일어로 “신부님 다시 뵙게 되어 기쁩니다.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하자 베버 아빠스도 안봉근의 어깨를 두드리며 “청계동 신자들은 잘 있습니까?”라며 안부를 물었다. 베버 아빠스의 입에서 ‘청계동’이라는 우리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봉근은 ‘모든 것이 잘 되리라’는 안도감을 느꼈다.
다른 신부와 수사들도 빌렘 신부와 봉근을 보러 방에 들렀고 그들은 빠른 독일어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쾌활하게 웃었다. 방 안이 사람들로 꽉 차자 수사 한 명이 창문을 열었다. 6월의 초저녁 바람이 스르르 밀려 들어와 방 안 공기를 바꾸었다. 봉근은 마치 청계동성당 마당에 꽃등을 장식하고 두 신부와 빌렘 신부를 모시고 앉아 환등기를 보며 놀라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듯했다. 자신이 필름 속 그 수도원에 와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빌렘 신부가 봉근에게 먼저 들어가 쉬라고 하자 방에 있던 한 신부가 앞장을 섰다. 건물과 건물 사이를 지나 안내받은 숙소는 침대와 책걸상 그리고 벽에 걸린 십자가 외에 장식이라고는 거의 없는 방이었다. 드디어 봉근은 해주에서부터 독일까지 한 몸처럼 의지해온 가방을 내려 놓았다.
빌렘 신부와 안봉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은 백동수도원과는 댈 것도 없이 큰 규모였다. 넓은 들판에 우뚝 솟은 수도원은 일단 엄청난 크기로 봉근을 압도했다. 금빛 나는 꾸밈과 그림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한 성인들을 보며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독일에서의 생활은 하루하루가 놀람의 연속이었다. 언젠가 장인과 함께 종현성당을 방문했을 때 색유리의 현란함과 높은 천장을 둘러보다 엎어질 뻔하기를 여러 차례였는데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성당은 거기에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주일 미사 때면 수도원 신부와 수도자들뿐만 아니라 멋지게 차려 입은 독일 사람들이 성당을 가득 채웠다. 미사 전에 수도원 입구로 통하는 문이 열리면 수사들이 수도복 앞자락에 양손을 넣은 채 엄숙하게 들어섰고, 그 뒤로 화려한 제의를 갖춰 입은 사제들이 행렬을 지어 입당했다. 성가대석에서 브라스밴드의 연주가 성당 가득 울려 퍼질 때면 여기가 천국인가 싶었다. 가족을 두고 혼자만 천국을 경험하는가 싶어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봉근은 한국으로 가기를 희망하는 선교사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쳤다. 봉근에게 이 시간은 가르치는 시간이자 배우는 시간이었다. 베버 아빠스가 촬영해 온 한국의 사진들이 슬라이드로 제작되어 있어 가르치기가 훨씬 수월했다. 봉근의 독일어도 빠르게 늘어 수도사들과 농담도 하고 선교사들에게 조선의 문화와 풍습을 간단하게 설명도 할 수 있었다.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
1914년 8월 24일, 봉근은 뮌스터슈바르작수도원 근처 성 루트비히수도원에 가기 위해 수도원을 나섰다. 빌렘 신부와는 그곳에서 2년 정도 지내기로 결정했고 이미 함께 몇 차례 다녀온 곳이었다. 봉근이 능숙하게 뷔르츠부르크 기차역에 내렸을 때 독일 군인이 다가와 여권을 보여달라고 했다. 아무 생각 없이 여권을 꺼내서 보여주었는데 갑자기 군인의 표정이 험악해졌고 순식간에 봉근의 두 손에 수갑이 채워졌다. 어찌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뷔르츠부르크에서 6시간가량 떨어져 있는 카이저스라우테른 경찰서의 감옥에 끌려간 후에야 봉근은 자신이 잡힌 이유가 어처구니없게도 ‘독일을 정찰하러 파견된 일본의 스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가 제시한 일본 여권 때문이었다. 1914년 8월 4일에 영국이 독일에 선전 포고를 했고 일본은 영일 동맹을 근거로 8월 23일 독일에 개전을 선언한 직후였다. 독일과 일본은 어느새 적대국이 되었고 빌렘 신부도 봉근도 변화를 미처 인지하지 못한 채였다.
‘스파이라니. 스파이라니. 그것도 일본의 스파이라니….’
봉근은 서툰 독일어로 소리를 질렀다. “난 대한국인이요! 신부의 복사고 수도원에서 독일인 신부와 수사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있는 천주교 신자요. 오히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대한의 불쌍한 백성이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