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은본당 상신공소 전경. 상신공소는 1956년에 설립된 상신원 한센인 정착 마을 입구 중심에 우뚝 서 있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은 1956년부터 1986년까지 30년간 경상도 북부 지역을 ‘왜관감목대리구’로 관할하면서 20개 본당을 신설하는 등 활발한 선교 활동을 펼쳤다. 왜관수도원은 본당 사목과 함께 한센인·극빈 노인·결핵 요양원·교육·노동 운동·농민 운동 등 특수 사목에도 집중했다.
그 가운데서도 한센병 치료와 한센인 자립을 돕는 일에 가장 중점을 두고 1955년 왜관 삼청 베다니아원, 1956년 가은 상신원, 1957년 칠곡 애성원, 1958년 성주 용봉 성심원, 1959년 상주 공검 성심원 등 한센인 정착 마을을 잇달아 세웠다. 왜관수도원은 한센인 정착마을 자립을 위해 양계·육우 등 마을 특성에 맞는 사업을 선정해 소득 증대를 도왔다. 또 정착 마을 내 한센인 간의 소득 격차를 줄이기 위해 극빈 환자들을 선정해 무상 지원과 원금 무이자 상환 등을 시행했고, 자녀들에게 장학금도 줬다. 왜관수도원이 이렇게 돌본 한센인이 800명을 넘었다.
상신공소 내부. 한센인 교우들이 얼마나 정성스레 공소를 가꾸었는지 바닥에 광이 날 만큼 반짝인다.
산골에 세워진 한센인 정착촌
경북 문경시 농암면 상신농장길 62에 자리한 안동교구 가은본당 상신공소 역시 왜관수도원이 운영한 한센인 정착 마을 공소 중 하나이다. 한센인 정착 마을인 상신원은 왜관수도원 아르놀도 렌하르트(Arnold Lenhard, 한국명 노도주, 1905~2003) 신부와 에르네스토 지베르츠(Ernesto Siebertz, 한국명 지인수, 1907~2000) 신부,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수녀원 디오메데스 메페르트(Diomedes Meffert, 1909~1998) 수녀, 그리고 영주 다미안피부관의원 데레사 캄비에(Theresa Cambier, 1916~2002) 여사를 빼고 이야기할 수 없다. 더불어 선교사로 활동하다 쫓겨나 한국에서 한센병 예방과 치료, 한센인 복지를 위해 평생을 바친 메리놀외방전교회 조셉 스위니(Joseph A. Sweeney) 신부와 경상도 지역 한센인 지원 사업을 꽃피우는데 밑거름이 된 여의사 황 마르가리타 여사의 헌신을 잊어선 안 된다.
렌하르트·지베르츠 신부, 그리고 디오메데스 메페르트 수녀는 왜관수도원으로 파견되기 전 만주 땅 연길과 함경도 덕원에서 활동하다 모두 공산 정권에 체포돼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다 고국인 독일로 추방된 이력을 갖고 있었다.
1956년 제6대 점촌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렌하르트 신부는 어느 날 황 마르가리타 여의사와 함께 농암 지역을 방문했다가 다리 밑에 사는 한센인들을 발견하고 그들을 돌보기 위해 상신원을 세우고 왜관수도원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아 33명을 정착시켰다. 10년 뒤 상신원 정착 한센인은 180여 명으로 늘었고, 1985년 지금의 공소를 지어 봉헌했다.
“벌써 세 번째 실패다. 환자 85명이 다시 거리와 다리 밑으로 내몰리게 됐다. 마을을 5~10㎞나 떨어져 지어도 물 때문에 반대한다. 지금은 외부와 차단되어 인적 드문 곳, 일급수가 흐르는 수려한 골짜기에 환자들이 지은 초가 여덟 채가 있다. 논도 몇 다랑이 된다. 음성 나환자들을 위해 조성된 정착촌이었다.”(「분도통사」 1640쪽, 점촌본당 1956~1957년 연대기)
왜관수도원이 1950년대 중반부터 집중한 한센인 정착 마을들은 주로 인적이 드문 산비탈에 세워졌다. 한센인에 대한 주민들의 부정적 인식이 한몫했다. 주민들은 특히 한센인과 식수를 함께 쓰는 걸 꺼렸다. 그래서 한센인 정착 마을을 조성할 때는 주민이 사는 마을로 물이 흘러가지 않도록 새 물길을 따로 내는 것이 중요했다.
자립 기반 마련, 훈장으로 공로 인정 받아
렌하르트 신부는 상신원 정착 한센인들이 외부 도움에 의존하지 않고 그들의 노동력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독일 뷔르츠부르크 한센인구호협회와 미세레오재단에 도움을 청해 지원금으로 논을 사고, 양계조합을 설립했다. 상신원 한센인들은 농사를 짓고 닭 5만 마리가 매일 낳은 달걀을 팔아 자립 기반을 다졌다. 그는 또 점촌 해성고등공민학교를 세워 음성 한센인 자녀들과 지역의 가난한 청소년들을 교육했다.
이 일로 1999년 4월 대통령 표창을 받은 렌하르트 신부는 “상신원 설립 당시 변변한 의약품 하나 없어 애를 먹었지만 뜻을 함께한 모든 가족이 주님께 의탁한 채 정말 열심히 활동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돕는 것은 우리 신앙인들이 마땅히 해야 할 몫”이라고 강조했다.
가은본당 초대 주임 지베르츠 신부는 한센인에 대한 렌하르트 신부의 희생과 헌신에 “주민들의 반대에도 불쌍한 사람 중 가장 불쌍한 사람인 이들을 적절한 장소에 정착할 수 있도록 과감히 결정해줘 고맙기 그지없다”며 존경을 표했다. 그 역시 한센인을 위해 헌신한 공로로 1985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이보다 앞서 1982년 독일 정부가 수여하는 국민 최고 훈장인 ‘십자훈장’을 받았다.
지베르츠 신부는 렌하르트 신부를 도와 상신원을 설립했다. 그는 한센인 정착을 위해 “이때처럼 편지를 많이 쓴 적이 없었다”고 할 만큼 독일 은인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4년 6개월간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수많은 동료의 처참한 죽음, 참기 어려운 굶주림과 추위, 모욕을 견뎌내며 그리스도를 향한 열망으로 생명을 유지했었다. 그는 이 신앙의 열망을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 가르침대로 이땅의 한센인들을 위해 불태웠다.
의사 출신인 디오메데스 메페르트 수녀는 1968년부터 상신원을 정기적으로 방문해 한센인들을 치료했다. 1958년 한국에 재입국한 그는 대구 파티마병원에서 은퇴할 때까지 33년 동안 한센인과 결핵 환자, 극빈 환자 20여만 명에게 인술을 베풀었다. 특히 그는 한센인 상처의 고름을 입으로 빨아낼 만큼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았다. 그는 자전거에 왕진 가방을 싣고 마을 골목을 누볐고, 환자 모두를 정성을 다해 치료해줬다. 1998년 6월 대구 파티마병원에서 선종한 그는 1982년 독일 정부 십자훈장과 1995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6·25전쟁 때 벨기에군 간호장교로 참전했던 데레사 캄비에 여사는 휴전 후 귀국하지 않고 전역해 한국에 남아 한센인들을 도우며 성 라자로 마을 설립에 힘을 보탰다. 안동교구 설정 이후 1971년 경북 영주시 상망동을 중심으로 경상도 북부 지역 한센인 정착 마을과 재가 한센인 자활을 도왔다. 그리고 1973년 영주 다미안피부과의원을 개원해 지병으로 1980년 본국으로 귀국할 때까지 한센인 치료에 헌신했다. 그는 ‘경북 지역 한센인의 어머니’로 불렸다.
한때 북적였으나… 불 꺼진 감실이 현주소
설립 70년된 가은 상신원 한센인 정착 마을은 한산하다. 초기 200명 가까운 한센인들이 모여 살았지만, 지금은 들어오는 사람은 없고 나가는 사람들만 있다. 한때 재학생이 80명이나 됐던 상신초등(국민)학교도 폐교됐다.
상신원 한센인 정착 마을은 가난하게 살면서도 정이 넘쳤던 곳, 아픈 사람은 있어도 고통은 없던 곳, 하느님을 모른 채 왔어도 열성적인 그리스도인이 된 곳이었다. 그 증거가 마을 입구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상신공소다. 1985년 봉헌한 모습 그대로다. 지금은 교우수가 많이 줄어 주일이면 인근 농암공소로 가서 미사나 공소예절에 참여한다.
상신공소는 웬만한 시골 성당 규모다. 어림잡아도 회중석이 100명을 넘게 채울 만큼 넓다. 기초와 건물은 튼튼하게 콘크리트로 지어졌고, 내부 바닥은 나무로 마감돼 있다. 얼마나 정성으로 관리했는지 바닥에서 광이 날 정도다. 제단에는 나무 제대와 감실, 십자가, 독서대를 갖추고 있고, 성모자상이 꾸며져 있다. 등 꺼진 감실이 상신공소의 현주소를 대변해주는 듯하다.
상신공소 앞 성모상 옆에는 공덕비가 하나 서 있다. 공덕비에는 “이 건물은 가톨릭나사업가연합회와 영주 다미안피부과의원 및 노 아놀드 신부님의 지원을 받고 주민들의 협력으로 이루어진 건물임. 1985년 9월 7일”이라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