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봉근(요한 세례자)은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바다를 바라본다지만 짙은 어둠을 보고 있다는 것이 맞았다. 삐그덕거리는 마룻장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미륵이 어느새 다가와 서 있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 회유와 협박을 받으면서도 그들이 가야만 하는 독립의 길이 무엇인지에 관해 미륵과 이야기를 나누다 중근 형님의 가족을 포함해 가문이, 가족이 겪어야 했던 굴욕이 아물지 않은 생채기에 소금을 뿌린 듯 참을 수 없이 쓰라려 자리를 박차고 갑판으로 올라온 참이었다.
뜻을 품고 독일로 간다 한들, 나라를 위해 중근 형이 목숨을 버렸다 한들 지금도 많은 동포가 독립을 위해 중국으로, 러시아로, 미국으로 흩어져 싸운다 한들 기어이 조국의 독립을 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두려움까지. 둘의 이야기는 때로는 무조건적인 희망으로, 어떤 때는 나락 같은 절망으로 끝을 맺었다. 일주일 전 미륵과 함께 프랑스 여객선 르 폴 르카(Le Paul Lecat)에 몸을 실은 이후 둘은 틈만 나면 그들이 겪거나 들은 이야기를 기억으로 소환해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했으나 잊혀버릴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망각지대에서 끌어올리는 그들만의 ‘의식’(儀式)이었다.
안봉근과 이미륵이 탔던 여객선 폴 르카 호.
미륵을 만난 건 상해에서였다. 서울에서 경성의전을 다니던 의학도 미륵(본명 이의경)은 3월 1일 만세 운동에 가담한 데 이어 ‘대한청년외교단’의 편집국장으로 “경술국치일의 비통함을 잊지 말고, 조국 독립을 위해 굳건한 마음으로 만세를 부르자”는 내용의 ‘경고문’을 인쇄해 배포한 탓에 수배자가 되어 압록강을 건넜다. 미륵이 상해로 망명하기 얼마 전인 1919년 4월, 상해 프랑스 조계지 김신부로(金神父路)에 임시정부가 설립되었었다. 독립을 위한 한국인들의 결집과 외교적인 활동이 커지면서 자극받은 일본이 프랑스 영사관을 들쑤셔대는 통에 청사는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녔고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도 독립 투쟁의 의지를 가진 한국인들은 상해로, 상해로 몰려들었다. 1919년 그해 봉근과 미륵도 그렇게 만났다.
늦은 저녁, 비 내리는 상해의 뒷골목에서 한국말이 우르르 쏟아져나왔다. 골목 끝 추레한 식당의 유리문 너머에서였다. 한국인들이 주로 모이는 식당은 고약한 취두부 냄새와 식욕을 떨어뜨리는 향채를 많이 쓰는 가게들에 비해 그나마 냄새가 덜해 한국인들이 주로 찾는 곳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떠들썩하게 떠드는 주제는 ‘여권’ 문제였다.
“도대체 언제 그놈의 여권이란 걸 받을 수 있어? 받을 수 있기나 한 거야? 난 벌써 반년이나 허송세월 중인데.”
“그러게 말이야. 상해에 오면 바로 유럽으로 가는 배를 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구라파(유럽)라는 데를 가보고 죽을 수는 있겠어?”
딱히 할 일도, 임시 거처로 들어가야 반겨줄 가족도 없이 홀로 상해에 도착한 그들은 서로의 답답한 사정을 토로하는 중이었다. 미륵은 대화에 끼지 않은 채 구석에 앉아 비 내리는 어두운 골목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양복 입은 한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떠들던 몇몇이 아는 체하며 그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안 선생, 어서 오세요. 프랑스와 독일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여기서 구라파를 직접 다녀온 사람은 선생님뿐이니⋯ 그 이야기라도 들어야 덜 답답할 것 같아요. 선생님 이야기는 매번 들어도 활동사진처럼 재미나거든요.” 독일이라는 소리에 미륵은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그들을 쳐다봤다. 안 선생이라 불린 이가 끼어 앉자 가까이에 있던 남자가 술잔을 권하며 그의 입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어느새 낮고 굵은 봉근의 목소리가 물처럼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차올랐다.
“안 선생님, 저도 황해도 해주 서영정 사람입니다. 서영정 96번지요.” 봉근이 ‘해주 용당포 항에 도착했을 때 이미 신문에 자신의 이야기가 대서특필되었고 일본 경찰이 미리 대기하고 있더라’는 대목에서 갑자기 끼어든 미륵 때문에 봉근은 놀라서 말을 멈추었다. 초췌한 몰골에 생기를 잃은 눈빛은 어디 하나 기댈 곳 없이 무작정 도항했던 몇 년 전 자신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상해 임시정부 대한적십자회 간호원양성소 수료생과 강사들(1920, 맨 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이미륵)
며칠 후 미륵은 봉근이 사는 집으로 옮겨왔다. 봉근은 사실 피붙이를 만난 듯 기뻤다. 열두 살 아래 미륵과 황해도 해주 수양산 아래 고향 마을 풍경을 어제 본 것처럼 세세하게 곱씹을 수 있었기에 더 각별했다. 봉근은 미륵을 큰형수에게 인사시켰다. “인사하게. 안중근 지사의 부인이셔. 이 애가 큰딸이고 저기 밖에서 노는 사내아이가 막둥이야.” 봉근이 사는 집에는 정근의 두 아들과 딸 넷 그리고 남편과 장남을 잃은 큰형수와 조카들이 있었다.
미륵의 인사에 형수가 앉으라고 자리를 권했다. “나이가 어떻게 되나요? 일은요? 가족들은 모두 해주에 있나요?” 형수는 미소를 지었지만 천근의 슬픔을 지고 있는 듯 보였다. 나중에야 봉근으로부터 안중근 지사의 큰아들이 밀정이 준 과자를 먹고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세상에 태어나 일곱 해를 살았을 뿐인데 아버지를 잃고 나라를 잃고 목숨을 잃어버리는 시절에 태어난 불쌍한 아이. 봉근도 미륵도 그 아이와 무엇이 다를 것인가. 그런 시절에 태어난 사내들이지.
봉근은 독일로 떠나는 일정을 몇 차례 연기했다. 미륵의 여권이 나오지 않아서였는데, 그렇다고 마냥 허송세월은 아니었다. 봉근은 ‘대한민국 대한적십자회’ 부회장직을 맡아 분주해진 정근을 대신해 큰형수와 조카들을 돌보았고, 의과 학생이었던 미륵은 ‘대한적십자회 십자대원’으로 제1기 간호사 양성을 도왔다.
마르세유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대성전과 성모상.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던 여권이 나왔다. 1920년 4월 봉근은 미륵과 독일로 가기 위해 배를 탔다. 봉근은 6년 전 처음 유럽으로 갈 때 그저 모든 게 신기하고 낯설어 동행하던 빌렘 신부의 낡아빠진 검은 수단 자락을 마치 방향 표시등처럼 무작정 쫓아가던 기억을 떠올렸다. 이제 입장이 바뀌어 봉근은 미륵의 안내자이자 통역자가 되었다. 봉근과 미륵은 콜롬보·실론·지부티·홍해를 지나며 시나이산을 보았고 수에즈 운하를 통과했다. 그리스를 지나갈 때 봉근은 섬을 가리키며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섬들이라고 미륵에게 속삭였다.
그들은 유럽 땅 마르세유에 도착했다. 봉근은 같이 배를 타고 온 일행들에게 인사를 하고 미륵을 데리고 가파른 길을 올라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대성전(Basilique Notre-Dame-de-la-Garde)으로 향했다. 첫 유럽행 배를 타고 마르세유에 도착했을 때 빌렘 신부도 봉근을 데리고 성당을 찾았었다. 봉근은 제대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었다. 무사히 여행을 마친 데 대한 감사와 이제부터 나아갈 날들에 대한 계획을 하느님께 맡겼다. 조국과 가족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은 했으나 모든 것은 그분 뜻 안에서 이루어질 일이었다. 상해에서 미륵을 만난 것도, 미륵이 독일행을 원한 것도. 봉근은 둘이 배를 타고 오면서 나눈 많은 말과 뜻과 희망을 그분께 맡겨드렸다.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 37,5)
성당을 나온 봉근은 당장 독일로 가고 싶어하는 미륵을 위해 지도를 펼쳐 들었다. 황금빛 성모상의 그림자가 길게 내려와 어느 사이 그들에게 닿았다. 봉근은 지도를 접으며 “미륵, 우리는 이제 독일로 갈 거야. 어서 기차를 타러 가자고!” 이야기했다. 봉근은 쫓아오는 미륵에게 발걸음을 맞추며 골목길을 지나 바다를 뒤로 한 채 기차역이 있는 언덕을 앞서 올라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