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트로스트 성모 탄생 바실리카. 그라츠 북동쪽 마리아트로스트 지구의 푸르베르크 언덕(약 469m)에 자리한 슈타이어마르크 대표 성모 성지. 1708년 프란츠 카스파르 콘두치가 성지와 재산을 첫 은수자 성 바오로회에 기부한 뒤, 1714년 바로크 순례 성당의 초석이 놓였다. 요제프 2세 개혁으로 수도회가 떠난 뒤 19세기 중엽부터 1996년까지 프란치스코회가 순례 사목을 맡았고, 현재는 그라츠-제카우교구 본당으로서 순례자를 맞이하고 있다. 1999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준대성전으로 승격했다.
오스트리아 남동부의 그라츠는 빈이나 잘츠부르크만큼 익숙한 지명은 아닙니다. 알프스 한쪽에 자리해 유럽 패키지여행에 자주 포함되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지도에서 시선을 조금 남쪽으로 옮기면, 그라츠가 변방이 아니라 오랫동안 여러 세계가 만나는 접점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라츠는 알프스에서 흘러내린 무르강이 넓은 분지로 열리는 길목에 있습니다. 도시 이름도 슬라브어 ‘그라데츠’, 즉 작은 성에서 유래했습니다. 도심에 우뚝 솟은 슐로스베르크 언덕이 도시의 기원을 말해줍니다.
마리아트로스트 바실리카로 오르는 삼종기도 계단. 트램 종점에서 성당까지 이어지는 216개의 계단 주변에는 성 요셉과 아기 예수상 등 성상들이 배치되어 있다.
중세 거점 그라츠와 한국 교회의 인연
중세 그라츠는 합스부르크 내(內) 오스트리아의 수도였습니다. 지금의 오스트리아 남부,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이탈리아 북동부로 이어지는 지역을 다스리던 정치 중심지로, 일찍부터 궁정·대학·수도원이 자리 잡았지요.
오늘날 슬로베니아의 수도는 류블라나지만, 근대 이전 슬로베니아 지식인들에겐 그라츠가 학문과 행정의 관문이었습니다. 19세기 중엽까지 오늘날 슬로베니아 북동부가 그라츠-제카우 교구의 전신인 제카우 교구에 속했던 것도 이런 역사 배경 때문입니다.
그라츠-제카우교구는 우리나라와도 인연이 깊습니다. 1971년 마산교구와 자매결연을 한 뒤 성당과 시설 건립, 신학생 유학을 물심양면으로 도왔습니다. 작년 마산교구장 착좌식에 그라츠-제카우교구장이 온 것도 이 인연 때문입니다. 우리와 기도의 끈으로 이어진 이 도시 동쪽 언덕 위에 성모 성지 ‘마리아트로스트’가 있습니다. 마리아첼, 라인수도원, 제카우 수도원과 함께 슈타이어마르크의 정신적 지주로 꼽히는 곳입니다.
마리아트로스트 성모 탄생 바실리카 내부. 둥근 천장과 돔, 측벽을 채운 프레스코화는 루카스 폰 슈람과 요한 밥티스트 샤이트가 1733~1754년에 그렸다. 성모 마리아를 하늘의 여왕이자 ‘승리의 길을 돕는 분’으로 찬미하며, 레판토 해전 등 성모의 보호를 드러내는 장면도 담고 있다. 주 제대 중앙에는 1460년경 제작된 ‘위로의 성모상’이 모셔져 있다.
언덕 위 작은 성에서 장대한 순례 성당으로
마리아트로스트는 그라츠 시내에서 멀지 않습니다. 그러나 순례의 깊이는 거리가 아니라 마음에 있습니다. 짧은 순례길에도 하느님과 만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트램을 타고 무르강을 건너 종점에 내리면 언덕 위로 두 개의 탑이 보입니다. 216개의 삼종기도 계단 끝에 바로크 성당 정면과 마주합니다.
이곳 순례의 시작은 지금 보이는 웅장한 성당이 아니었습니다. 12세기 이곳 언덕에는 예루살렘을 향하던 순례자들이 지나치던 작은 성당이 있었습니다. 성 십자가 유물을 모셨던 곳이라고 전해지지만, 15세기 말 오스만 튀르크의 침입 때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17세기 중엽, 언덕에 작은 성이 세워졌고, 성 주인 요한 막시밀리안 폰 빌퍼스토르프가 근처 라인 수도원에서 성모상을 옮겨와 성의 소성당에 모셨습니다. 중병에 걸린 딸을 위해서였을 겁니다. 성모상 앞에서 치유를 청하던 가족의 기도 끝에 아이가 낫습니다. 이 소식이 퍼지면서 병든 이, 슬픔에 빠진 이, 길을 찾는 이들이 언덕으로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마리아트로스트(Mariatrost), 곧 ‘위로의 성모’는 이런 발걸음 속에서 탄생했습니다.
흔한 치유의 기적 이야기로 들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중세의 전승은 현대인의 팩트 체크만으로 다 담아낼 수 없습니다. 중요한 건 수많은 이가 이곳에서 치유를 청했고, 그 체험이 쌓이면서 오늘의 순례지를 이루었다는 사실입니다. 성지는 그 어떤 큰 건물이 세워진 뒤에 사람들이 몰려든 곳만이 아닙니다. 작은 기도와 치유의 기억, 감사의 마음이 쌓여 마침내 웅장한 건물을 낳은 곳입니다.
1689년에 이 성을 소유한 그라츠의 관리 프란츠 카스파르 콘두치는 1708년 성지와 재산을 첫 은수자 성 바오로회(OSPPE)에 기부합니다. 이후 순례지는 공인받았고, 1714년 순례 성당의 초석이 놓였습니다. 18세기 중엽 지금의 장대한 바로크 순례 성당이 완성되었죠.
주 제대에 모셔진 후기 고딕 양식의 ‘위로의 성모상’(좌, 1460)과 주 제대 뒤편 오라토리오 전실의 설립자 프레스코화(우, 1747). 프란츠 카스파르 콘두치가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 문서를 바치는 장면을 담았다. 뒤편 숲 위로는 흰 회반죽으로 마감된 바실리카가 환시처럼 떠올라 작은 소성당의 신심이 장엄한 순례 성당으로 자라난 과정을 보여 준다.
그림과 장식에 바로크 언어로 담아낸 신앙
성당 안으로 들어서면 밝은 바로크 공간과 함께 둥근 천장과 돔, 프레스코화가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돔의 천장화에는 하늘의 여왕으로 공경받는 성모 마리아가 천사들과 빛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장식이 아닙니다. 수백 년간 이곳을 찾은 순례자들이 성모님을 통해 하느님께 위로와 도움을 청해 온 믿음을 바로크의 시각 언어로 풀어낸 신앙 고백입니다.
그림 가운데 병에서 회복된 이가 감사의 마음으로 성모님께 나아가는 장면은 이곳이 왜 ‘위로의 성모’ 순례지가 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레판토 해전 장면처럼 성모님은 위험과 전쟁의 시대를 살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승리의 길을 돕는 분’으로도 그려져 있습니다. 주 제대 뒤편 동쪽의 순례지 설립자의 프레스코화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주 제대 중앙에는 위로의 성모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1460년대에 제작된 고딕 성모상이지만, 바로크 시대에 옷을 입히고 장식하면서 순례지의 중심 성상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성모상 위에는 라틴어로 “우리 삶의 위로”라는 문구가 놓여 있습니다. 성당의 모든 그림과 장식은 결국 이 명칭인 ‘위로의 성모’로 귀결됩니다.
마리아트로스트는 이름값으로 압도하는 성지는 아닙니다. 하지만 이곳은 그라츠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위로가 된 친근한 언덕이었습니다. 바실리카 앞에 서면 저 아래로 주택가와 숲, 멀리 시내 풍경이 내려다보입니다.
그라츠는 문화권이 교차하던 경계의 도시였습니다. 경계에 선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어쩌면 위로일지 모릅니다. 소외감,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마음, 지나온 길과 가야 할 길 사이에 선 마음이 성모님 앞에서 잠시 쉼을 얻고 다시 세상 속으로 내려갑니다.
<순례 팁>
※ 그라츠 중앙역 지하 트램 정류장에서 1번 트램을 타고 종점 ‘마리아트로스트’ 하차. 종점에서 바실리카까지 ‘삼종기도 계단’이나 Kirchbergstraße를 따라 걸어 올라갈 것.
※ 마리아트로스트 바실리카 미사 : 주일 08:00, 10:30. 평일 07:30(목), 19:00(화·수·금·토). 성물방에서 이곳 성물과 기념품을 살 수 있다.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이 마련한 2026·2027 유럽 수도원 성지 순례. 문의 및 신청: 분도출판사, 010-5577-3605(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