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7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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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 안봉근의 집에서 태극기를 처음 보다

[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문화 독립운동가, 안봉근 요한 세례자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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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봉근의 집에서 태극기를 처음 본 이후 손기정에게 마라톤은 ‘독립운동’이었다. (손기정기념관 소장)


안봉근이 운영하던 베를린 두부공장

굶주린 유학생들의 마지막 피난처



1936년 올림픽 한국 선수단 초대

음식 대접하고 기쁨과 원통함 공유



금메달 따고 태극기 처음 본 손기정

안봉근 만남 계기 민족주의자로 변화




베를린의 겨울은 사람의 뼛속까지 얼려버렸다. 봉근은 두 손을 입김으로 녹이며 창문에 맺힌 성에를 손가락으로 훔쳐냈다. 희미한 유리 너머 새벽 거리에는 아직 사람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부엌에서는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큰솥 안에서 콩물이 끓고 있었다. 익숙한 냄새, 조선의 냄새였다.

“조금만 더 저어야겠소.” 독일말보다 조선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함께 일하던 독일 청년이 고개를 들었다. “사장님, 중국인들의 주문이 늘었어요. 콩을 더 사야겠어요.” 봉근은 두부 틀에 면포를 깔고 뭉글해진 순두부를 부으며 말했다. “독일 손님들도 꽤 늘었어. 우리가 먹고살려면 좀 더 부지런해야 해.” 그러나 봉근에게 이 두부 공장은 단지 생계를 위한 곳만은 아니었다.

베를린에서 세 번이나 이사를 한 후에 자리를 잡은 칸트 슈트라세 132번지. 최초의 유럽 유학생 단체인 유덕고려학우회가 열 집 거리인 122번지에 있었다. 학우회의 중심인물로 활동한 이미륵도 김갑수도 봉근의 도움으로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에 머물며 독일 생활을 시작했었다. 그런 인연이 아니더라도 고려학우회를 물심양면으로 돕는 것을 봉근은 소명이라 여겼다. 두부공장을 세운 것도 그런 연유가 없지 않았다.

“혹시… 안 선생님 계십니까?”

안봉근은 청년의 눈을 보고 금세 알아차렸다. 유학생이었다. 돈이 떨어졌고, 며칠째 제대로 먹지 못했으며, 마지막 희망으로 누군가 소개해준 이름 하나를 들고 온 얼굴이었다. 봉근은 말없이 의자를 내밀고 따뜻한 콩물을 컵에 따라 주었다. 손가락이 곱아 컵을 잡는데도 시간이 걸렸다. 청년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봉근은 그의 호흡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자신도 같은 시간을 지나왔다. 낯선 사람, 낯선 언어, 낯선 계절 그리고 배고픔. 봉근은 콩을 주문하기 위해 모아둔 통에서 돈을 꺼내 신문에 싸서 유학생의 손에 쥐어주었다. “공부는 포기하지 마시오. 당신을 위해서도 조국을 위해서도.” 청년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그날 이후 두부공장은 더 자주 문이 열렸다. 누군가는 식사를 했고, 누군가는 잠을 잤으며, 누군가는 봉투 하나를 건네받고 사라졌다. 베를린 한복판에서 봉근은 그렇게 꺼지지 않은 불씨로 살아 있었다.

 
안봉근의 두부공장이 있던 베를린 칸트 슈트라세 132번지.


1936년 여름, 도시는 갑자기 떠들썩해졌다. 올림픽 때문이었다. 거리마다 깃발이 걸렸고 군복 입은 청년들이 거리를 누볐다. 나치는 자기 힘을 세상에 과시하고 싶어 했다. 안봉근은 이런 분위기가 불편했다. 너무 많은 깃발은 언제나 위험했다. 그 무렵 한국인들 사이에서 마라톤에 출전하는 한국인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우승 후보라는데.” “일본 대표로?” 그 마지막 말이 공기를 얼게 만들었다. 봉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며칠 뒤, 결과가 전해졌다. 1등 손기정, 3등 남승룡. 베를린의 신문들은 떠들썩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일장기를 가슴에 단 두 명의 한국 청년. 우승을 하고도 마치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진 한 장은 독일에서도 고국에서도 동포들의 가슴을 찢어놓았다. 그날 밤, 두부공장에는 평소보다 사람이 많았다. 아무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한참 뒤 누군가 중얼거렸다. “저 선수 마음은 어땠을까요.” 누군가 대답했다. “우리가 아는 마음이겠지. 나라 잃은 사람 마음.”

봉근의 두부공장에서 음식 냄새와 함께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큰길까지 흘러나왔다. 술잔은 이미 흥건하게 돌았고 서로 어깨를 흔들며 아리랑을 불렀고 올드랭사인에 맞추어 애국가를 합창했다.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과 남승룡을 축하하는 자리이자 올림픽에 참가한 한국인 선수들을 격려하는 자리였다. 봉근이 초대한 한국인 선수들은 마라톤의 손기정·남승룡, 농구 선수 이성구·장이진·염은현, 복싱 이규환, 축구 김용식 그리고 대표단장 정상희와 개인 자격으로 참가한 권태하였다.

“경기 전에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싶었으나 일본인들이 트집을 잡아서 출전이 무산될까 걱정이 되어서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애 많이 썼습니다. 멀리 타국에 사는 동포들에게 큰일을 하신 겁니다. 음식 걱정, 술 걱정은 말고 모두 맛있게 드십시오.” 봉근의 건배사에 맞추어 모두 잔을 비웠다. 식탁 위에는 봉근의 독일인 부인이 준비한 쌀밥, 두부와 닭고기국이 가득 차려져 있었다.

 
베를린에 도착한 올림픽 참가 대표단(맨 왼쪽이 손기정. 1936. 6. 17, 손기정기념관 소장)


‘마라톤 우승’이라니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아직도 꿈인지 생신지 모를 흥분 상태였다. 봉근의 눈에는 그들의 복잡한 감정이 혈관을 흐르는 피처럼 이 심장에서 저 심장으로 흘러가는 것이 보였다. 우승의 기쁨, 나라 잃은 서러움, 일장기를 달고 참가해야 했던 원통함까지. 저항 없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흘렀다.

거나하게 취한 누구는 소파에 누워 졸기도 하고 누구는 그동안 못 먹은 고향 냄새 물씬 나는 음식을 즐기느라 아직도 식탁을 떠나지 못했다. 봉근의 부인은 계속해서 음식을 내오고 활짝 열어 놓은 창문과 창문 사이로는 건조한 유럽의 바람이 들락거렸다. 8월이지만 그래도 밤바람은 시원했다. 어느새 편안함을 느낀 손기정도 한숨 돌리고 방안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그의 눈길이 벽에 걸린 액자에 멈추었다. 그의 궁금증을 알기라도 하듯 봉근이 액자를 내려서 기정에게 가져왔다.

“우리나라 국기 태극기라오. 나라를 잃은 내가 낯선 나라에서 버틸 수 있는 힘이기도 합니다.” “선생님, 믿지 못하시겠지만 전 태극기를 처음 봅니다. 우리나라 국기가 태극기라는 사실도 처음 알았어요.” 태극기를 처음 보았다는 기정의 고백에 마음이 무너졌다. “그럴 수 있지요. 손 선수나 남 선수가 태극기를 달고 뛰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소.”

 
태극기에 대한 손기정의 회고가 실린 『동아일보』.(1976. 1. 24)


기정은 선수단을 초대한 봉근이 안중근 지사의 사촌 동생으로 상해에서 지사의 가족들을 돌보았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독일에서 산 지 십여 년이 지났으며 독일 유학생들에게 크고 작은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것을 처음 들었다. 그는 유창한 독일어 실력으로 학교에서 강의도 했으며, 신문과 잡지에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알리고, 조선의 책들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출판했다. 게다가 독일에서도 꽤 유명한 박물관에 기증된 한국 민속품을 정리하는 일도 했다니 도대체 한 사람이 어떤 열정으로 그런 성과를 얻었을까 싶다.

독일에서 만난 봉근은 기정의 일생에서 잊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달리는 것만 좋아한 자신에게 태극기를 처음 보여준 사람이자 한 나라의 국기가 가진 의미와 무게감을 생생하게 전해준 특별한 사람이었다. 이제 기정에게 달리기는 독립운동이었다. 봉근은 달리는 것만이 능사였던 스물네 살 청년을 그렇게 민족주의자로 변화시켰다. <계속>

 


송란희(가밀라, 한국교회사연구소 학술이사)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가톨릭평화신문 공동기획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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