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쳉스토호바의 야스나 구라 수도원. 1382년에 헝가리 부다의 성 바오로회의 수도자가 초대받아 정착하며 시작됐다. 106m 높이의 첨탑 아래 성모 소성당에 ‘검은 성모’ 이콘이 모셔져 있다. 17세기 초 지그문트 3세 바사 국왕의 명으로 성소 보호와 전쟁 대비를 위해 성벽·보루가 갖춰졌고, 제2차 북방 전쟁 중 1655년 초겨울 스웨덴 군을 물리친 이후 국가 성지로 자리 잡았다. 출처=셔터스톡
최근 몇 년 사이 폴란드는 우리 뉴스에 자주 등장합니다. K2 전차, K9 자주포 등 한국 방산 장비가 폴란드군 현대화 사업에 채택되면서입니다. 한국 무기의 우수함에 뿌듯함을 느끼지만, 조금 더 들여다보면 이 뉴스 뒤에는 폴란드의 아픈 역사가 깔려 있습니다.
폴란드는 한때 리투아니아와 함께 중동부 유럽의 광대한 땅을 품은 강국이었습니다. 그러나 넓은 국토와 지정학적 위치는 축복이자 시련이었습니다. 오늘날 중동의 석유와 바닷길이 국제정치의 긴장을 낳듯, 근대에 광물과 산업 기반이 풍부한 슐레지엔은 주변국이 탐내던 땅이었습니다. 결국 18세기 말 이웃 세 국가에 분할되어 폴란드는 한동안 유럽 지도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독립한 후에도 나치 독일에 점령당하고 공산주의 압제를 겪기도 했지요. 오늘날 폴란드가 안보 문제에 민감한 데에는 이런 뼈아픈 과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시간 속에서도 폴란드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켜냈습니다. 매 순간 성모님께 나라의 아픔과 희망을 함께 봉헌하며 버텼기 때문입니다. 오늘 순례지는 그 정신적 힘이 된 폴란드 최대 성모 성지, 쳉스토호바(Częstochowa)의 야스나 구라 수도원입니다.
수도원 성당인 성 십자가와 성모 승천 바실리카. 1463년 고딕 성당으로 축성된 뒤 1690년 화재 후 후기 바로크 양식으로 개축되었다. 성모 승천과 성모 대관을 주제로 한 주 제대는 1720년대 브로츠와프 출신 요한 아담 카링거가 제작했다. 성 십자가의 발견과 성모 영광과 정결을 주제로 한 천장 프레스코화는 카롤 단크바르트의 작품이다. 1906년 준 대성전으로 승격됐다.
나지막한 언덕에 높이 솟은 첨탑
야스나 구라 수도원은 폴란드 남부 바르타강 유역의 도시 쳉스토호바에 자리합니다. 1382년 오폴레의 브와디스와프 공작이 헝가리에서 첫 은수자 성 바오로회 수도자들을 초대해 쳉스토호바 언덕과 성모 소성당을 맡기면서 시작됐습니다. 지명들이 낯설겠지만, ‘검은 성모’ 이콘에 대해선 들어보셨을 겁니다. 수도원 시작부터 함께한 이 성화가 야스나 구라를 폴란드 신앙의 중심지로 만들었습니다.
쳉스토호바역을 나와 잠시 걸으면 수도원으로 곧게 뻗은 성모 마리아 대로가 나타납니다. 야스나 구라 수도원 첨탑은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높이 솟아 있습니다. 야스나 구라는 우리 말로 ‘밝은 산’이라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나지막한 언덕에 가깝습니다. 대로 끝에 이르면 공원 중심에 성벽과 보루로 둘러싸인 흰 수도원 건물이 요새처럼 서 있습니다.
성문처럼 생긴 여러 문을 지나면 순례자로 북적이는 안마당이 나옵니다. 그 안쪽에 고딕 양식의 바실리카와 성모 소성당이 나란히 붙어있습니다. 성 십자가와 성모 승천에 봉헌된 바실리카 내부는 화려한 바로크 장식으로 가득합니다. 1690년 화재로 고딕식 천장이 무너진 뒤 후기 바로크 양식으로 개축한 겁니다. 하지만 여느 왕궁의 화려함과는 결이 다른 장엄함이 느껴집니다. 수많은 순례자의 봉헌과 감사, 회개와 청원의 기억이 축적된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야스나 구라 수도원 성모 소성당. 검은 성모 이콘을 모신 곳으로 펜스 위에는 수도회의 펠리치안 라틴스키 신부가 1655년 스웨덴군이 포위공격에 실패하고 철수한 사건을 그린 유화가 걸려 있다. 양쪽 벽에는 치유에 대한 감사, 청원의 마음으로 봉헌한 묵주·메달·은판·성물 등이 빼곡히 걸려 있다.
약탈의 상처 간직한 ‘폴란드의 여왕’
발걸음은 검은 성모 이콘이 모셔진 성모 소성당으로 향합니다. 검은 석조 마감이 되어 있는 소성당 입구에 들어서면 폴란드인의 마음속에 성모님이 깊이 자리하게 된 1655년도의 사건을 그린 유화가 눈에 들어옵니다.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스웨덴으로부터 대대적으로 침공을 받았습니다. 이 시기는 ‘대홍수’라 부를 정도로 나라 전체가 위태로웠던 때였습니다. 스웨덴군은 야스나 구라 수도원을 포위했지만, 수도자와 수비대, 신자들은 성모님께 의탁하며 버텼습니다. 결국 40일 만에 스웨덴군은 퇴각합니다.
폴란드인들은 이 사건을 전투의 승리로만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기울어져 가는 나라가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표징으로 여겼습니다. 이듬해 폴란드 국왕은 리비우 대성당에서 성모님을 나라의 여왕으로 선포합니다. 이후 야스나 구라의 성모님은 ‘폴란드의 여왕’이라는 호칭으로 공경받고 있습니다.
제대 위에 검은 성모 이콘이 모셔져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미사와 기도가 끊이지 않습니다. 전통적으로 순례자는 무릎을 꿇은 채 제대를 돌며 성모님에게 자신을 의탁합니다. 그런데 이콘을 자세히 보면 성모님 뺨에 칼자국이 보입니다. 1430년 수도원이 후스파 세력에게 약탈당했을 때 훼손된 상처입니다. 이후 복원할 때 이 칼자국을 나라와 신앙 공동체가 겪은 상처로 받아들였기에, 그 부분만 복원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습니다.
쳉스토호바의 ‘검은 성모’. 전승에 따르면 성 루카가 그린 비잔틴 성모자 이콘을 원형으로 삼았다고 한다. 성모자 위에는 보석과 금속 장식으로 만든 ‘성의’와 왕관이 덧입혀져 있는데, 푸른 망토는 금색 별과 백합문으로 장식되어 있다. 성모의 뺨에는 1430년 약탈 때 생긴 칼자국이 남아 있다. 1717년 9월 클레멘스 11세 교황의 대관이 이루어졌다.
박해 견디며 공동체가 의탁한 ‘밝은 산’
18세기 말 폴란드는 러시아·프로이센·오스트리아에 의해 분할되어 1795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나라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그렇다고 민족의 기억까지 사라진 건 아니었습니다. 언어와 신앙으로 정체성을 붙잡았습니다. 교회가 억압받고 많은 수도원이 폐쇄되는 과정에서도 야스나 구라 수도원은 살아남아서 폴란드인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20세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공산 정권의 박해 속에서도 검은 성모의 사본은 폴란드 본당들을 순회하며 신자들을 하나로 모았습니다. 신앙이 정치적 수단이 된 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성모 신심으로 인간 존엄과 공동체의 자유를 지키려는 마음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여러 차례 야스나 구라를 순례해 조국뿐 아니라 우리 교회와 인류를 성모님께 봉헌한 것도 이런 마음이었을 겁니다.
야스나 구라는 밝고 환한 산입니다. 그 빛으로 세상의 상처와 어둠을 치유하는 곳입니다. 요즘 힘과 경쟁의 논리, 진영의 언어에 인간의 존엄조차 짓밟히는 순간을 자주 봅니다. 신앙은 세상의 피난처가 아니라, 상처 입은 공동체를 기억하고 약한 이의 편에서 다시 옳은 길을 묻는 힘일 겁니다. 상처 입은 검은 성모의 얼굴을 보며, 신앙으로 무엇을 지켜나가야 하는지 묵상해 봅니다.
<순례 팁>
※ 바르샤바와 크라쿠프에서 쳉스트호바까지 직행열차가 있다.(각각 2시간, 1시간 30분) 역에서 수도원까지 약 2㎞로 도보 30분.
※ 바실리카 미사 : 주일 및 대축일 05:30, 06:30, 08:00, 09:00, 10:00, 11:00, 13:00, 17:00, 19:00. 평일 05:30, 06:00, 06:30, 07:00, 07:30, 08:00, 09:00. 성모 소성당에서 수시로 순례 미사가 봉헌된다. 수도원 보물실과 600주년 박물관을 둘러볼 것.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이 마련한 2026·2027 유럽 수도원 성지 순례. 문의 및 신청: 분도출판사, 010-5577-3605(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