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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진단] 아이들은 어른의 뒷모습에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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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고교야구 대회에서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한 학교 선수들이 상대 팀 또래들을 향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조롱하는 듯한 구호를 외친 것이다. 지난 5월 어느 커피 회사가 일으킨 논란을 빗댄 구호였다. 이 일을 두고 젊은 세대의 극단화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다시 높아졌다. 그런데 필자의 심정은 솔직히 서글펐다. 그 아이들이 제대로 그 말의 뜻을 알고서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런 극단이 어느 한쪽만의 일은 아니다. 몇 해 전 일부 온라인 여성 커뮤니티에 남성을 향한 혐오의 언어가 넘쳐나더니, 급기야 잠든 아버지에게 흉기를 들이댄 모습이라거나, 가톨릭의 성체를 심각하게 훼손하여 인증 사진을 올린 충격적인 일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사실 방향만 다를 뿐 닮은꼴이다. 이 모든 것들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물음이 닿는 곳은 결국 교육, 특별히 가정과 학교 교육이다.

먼저 가정 공동체를 보자. 지난해 미성년 자녀를 둔 가구의 맞벌이 비중이 처음으로 60를 넘었다. 홑벌이로는 버티기 어려운 시대가 부모에게서 아이와 마주 앉을 시간을 앗아간 것이다. 밥상머리에서 예의를 배우고 어른의 뒷모습에서 염치를 배우던 자리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번듯한 교육철학을 가지고 아이를 기른다는 것이 사치처럼 느껴지는 시대다.

학교는 어떤가. 지난해 사교육에 참여한 학생 한 명이 다달이 쓴 돈이 평균 60만 원을 넘어섰다. 공교육보다 사교육에 마음을 두는 이들이 더 많아지고 있다. 여기에 교권마저 추락하면서 교사가 아이들에게 인격으로 다가설 기회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입시와 관련한 공부를 가르칠 시간은 넘치는데 가르치는 어른이 인간됨이란 무엇인지를 보여줄 시간은 갈수록 부족해진다.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이 온라인이다. 아이들은 익명의 그늘에서 걸러지지 않은 정보를 삼키고, 조롱과 혐오가 놀이처럼 통하는 문화를 공기처럼 들이마신다. 게다가 이 공간에 발을 들이는 나이는 우리 짐작보다 훨씬 어리다. 문제는 그곳에 “그건 아니지!” 하고 제대로 된 기준을 중심으로 잘 식별할 수 있도록 바로잡아줄 선생님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여기까지 왔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교육이 살려면 가르치는 이가 먼저 존중받아야 하고, 그러려면 어른들부터 서로 존중하며 살아야 한다. 그런데 이게 참 어렵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사에서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모범이, 원형이 되어주는 이들이 필요하다. 종교가 있어야 할 자리가 바로 여기다. 교회는 사람을 사람으로 기르는 오래된 지혜를 간직해온 곳이고, 그 지혜는 신자만의 것이 아니라 인류가 함께 물려받은 유산이다. 오늘날 학교라는 제도의 뿌리가 중세 수도원에 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다만 그 지혜가 오늘 설득력을 가지려면, 먼저 교회 구성원들이 저마다의 가정과 일터에서 그렇게 살아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일 수 있겠다.

한나 아렌트는 「과거와 미래 사이」(1968)에 실린 ‘교육의 위기’에서, 교육이란 새로 온 이들을 이 세계로 맞아들일 만큼 그들을 사랑하는지 결단하는 어른 세대의 책임이라고 했다. 부끄러워해야 할 쪽은 아이들이 아니라 우리 어른들이다. 부정적인 정서가 각인되듯이 긍정적인 정서도 각인될 수 있다. 아이들이 가정과 학교의 어른들에게 좋은 것들을 계속해서 배워나가는 풍토를 함께 만들어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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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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