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7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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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강단과 박물관에서 한국 역사와 문화 알리다

[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문화 독립운동가, 안봉근 요한 세례자 - (5.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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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봉근(왼쪽)과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공부하던 조카 안진생.(안중근의 동생 안정근의 아들)


하일브론 강단 등서 문화·역사 강의

드레스덴 박물관 큐레이터 눈에 들어

한국 민속품 정리·논문 완성 도와

농기구·초가 모형까지 손수 제작

동아시아 문화전 상설 전시로 결실



드레스덴 폭격 소식에 귀국 결심

고국으로 향하는 기차 탔지만

해방된 조국에서 그의 흔적은 없었다




제노바에서 출발한 기차는 밀라노를 거쳐 알프스를 넘어가고 있었다. 기차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변할 즈음 안내 방송이 이탈리아어에서 익숙한 독일어로 바뀌었다. 인스브루크와 뮌헨을 지나면 곧 베를린에 도착할 것이다. 꼬박 하루의 여정이었다. 봉근은 문득 기차를 탄 채로 이렇게 고국으로 돌아가면 좋겠다 싶었다.

1941년 독일 정부는 중국인과 독일인 간의 결혼이 무효라고 선언했다. 중국인과 독일인 부부는 심지어 집에서 쫓겨났고 독일인 부인은 체포되어 머리카락을 깎이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 중국 여권을 가지고 독일인 부인과 살던 봉근은 두부공장 문을 닫고 사촌 조카 진생이 있는 이탈리아 제노바로 향했다.

진생은 사촌 안정근의 아들로, 러시아 하바로브스크에서 태어났다. 봉근이 상해에서 바쁜 정근을 대신해 진생을 아들처럼 돌보았다. 진생은 상해에서 초중고등학교와 베이징 보인대학을 졸업하고 이탈리아로 건너가 제노바대학교에서 조선공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봉근의 제노바 방문은 단순한 피신이 아니었다. 평생의 꿈을 이루고 싶은 의지도 있었다. 1914년 처음 빌렘 신부가 독일로 공부를 하러 가자고 했을 때는 기계학을 하고 싶었지만 스파이 혐의를 받고 감옥살이만 하다가 송환되었고, 1920년 다시 독일에 왔을 때는 생활비도 없는 형편에 공부는 꿈도 꿀 수 없었다.


강연장에서 조선의 역사를 풀어낸 이방인

봉근은 1924년 수도원을 떠나 세상 밖으로 나와 문을 두드렸다. 독일어 실력도 상당히 늘어 바덴-뷔르템부르크주 하일브론시 평생교육원에서 슬라이드를 가지고 중국·일본·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비교하는 강연 기회를 얻었다. 강의는 호평을 받았고, 1930년에는 드레스덴에 있는 블라제빗져 학교로부터 강연 요청을 받았다. 고학년을 대상으로 하는 특별 수업에서 한국의 오랜 역사와 아름다운 문화를 이야기했다. 강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봉근에게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드레스덴민족학박물관의 큐레이터 마르틴 하이드리히입니다. 지난번 학교에서의 강연을 흥미롭게 들었습니다. 얼마 전에 우리 박물관이 수백 점의 한국 유물을 매입했는데 이를 정리하기 위해 사람을 수소문하던 중이었습니다. 독일어를 잘하면서도 한국 문화를 잘 설명할 수 있는 미스터 안이 적격입니다.”

봉근은 즉시 답장을 보냈고 하이드리히와 만났다. 박물관은 빌헬름 베르타 밴쉬 재단의 연구비 지원을 받아 봉근을 채용했다. 봉근이 맡은 박물관에서의 주요 업무는 ‘한국 민속품 정리’와 ‘한국의 농업’을 주제로 하는 하이드리히의 논문 완성을 돕는 일이었다. 봉근은 수장고로 안내되어 독일인 발터 슈퇴츠너가 1929년에 수집해 왔다는 한국의 민속품을 보자마자 말을 잊지 못했다. ‘어릴 적 할머니에게서 듣던 제주 섬의 물건들을 여기서 만나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놀람과 반가움에 봉근은 울컥 눈물을 쏟았다.

봉근의 할머니 ‘고 안나’는 제주 잠녀 출신이었다. 제주 앞바다를 누비던 할머니는 황해도 해주로 물질 왔다가 할아버지 안인수를 만나 혼인해 6남 3녀를 낳았다. 할머니는 가끔 알아들을 수 없는 제주 말을 쓰기도 하고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제주 사람들 이야기나 바닷속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할머니는 봉근이 열 살 때 뮈텔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고 열다섯 살 봉근의 혼례식도 보고 2년을 더 살다가 빌렘 신부에게 종부성사와 노자성체를 받고 돌아가셨다.

“닥터 하이드리히, 아무래도 말로만 설명하는 것보다는 모형을 만들어서 설명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내가 고향 황해도에서 사용하던 농기구 몇 개와 한국의 초가를 만들었습니다. 다른 학예사들도 같이 보면 좋겠습니다.”

봉근의 여문 손끝에서 농기구, 절구, 지붕에 얹는 이엉까지 한국의 물건들이 미니어처로 마술처럼 완성될 때마다 독일인 학예사들은 감탄했다. 하이드리히는 1931년 출판한 한국 민속학에 대한 논문에 안봉근의 기여가 얼마나 컸는지를 정확하게 적고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작업이었음을 밝히는 것으로 봉근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다.

 
독일 드레스덴박물관에서 초가 모형을 만드는 안봉근. 개인 소장


하이드리히 논문에 남은 안봉근의 기여

봉근 덕분에 한국의 민속품은 빠르게 정리되었고, 민속품들은 1932년 드레스덴 츠빙거 궁전에서 중국과 제주의 일상 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문화전으로 시작해 1941년까지 상설 전시되었다. 봉근은 제주의 민속품 외에 박물관에서 그동안 수집해온 한국의 유물을 정리하는 일에 참여하고 싶었으나, 박물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예산 문제로 계속할 수 없게 되었고 다시 베를린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독일은 패전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커지고 있었다. 그나마 아직 베를린이나 뮌헨은 겉으로는 안정적이었다. 봉근은 제노바로 떠나기 전, 뮌헨에서 이미륵과 장극을 만났다. 봉근의 주선으로 둘 다 베네딕도회 수도원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장극은 천주교 집안의 아들로 큰형 장면은 신학교 선생이었고 둘째 형 장발은 서울 명동성당 제단의 14사도화를 그린 화가였다.

장극은 미륵처럼 경성제국대학교 의과대학을 중퇴하고 1935년에 독일로 왔다. 미륵은 의학에서 생물학으로 학교도, 학과도 바꾸었고 1928년에 뮌헨대학교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장극은 베를린 공과대학교 항공학과 입학 1년 만인 1939년 독일 국가 시험을 통과했다. 아시아인 최초였으니 스물일곱 살 한국 청년의 쾌거였다. 그들에게 받은 자극과 격려 그리고 진생의 도움 덕분에 봉근은 제노바에서 경영학 공부를 마칠 수 있었다.

1943년 7월 봉근은 베를린 중앙역에 도착했다. 그는 어느새 50이 넘었다. 기차역을 나가기도 전에 함부르크가 연합군의 폭격을 받아 도시가 파괴되고 사람들이 죽었다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카페에서 라디오를 듣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고 폭격으로 부서진 도시 사진이 실린 호외가 거리에 뿌려졌다. 봉근은 옛집이 있던 칸트 슈트라세에 거처를 마련했다. 우선 한국인 유학생들의 상황을 알아봤으나 베를린에도 유학생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해 12월 카이로에서 미·영·중 3국 정상들이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자유 독립하게 할 것을 결의한다”고 선언했다. ‘일본 패망 시 한국이 독립한다’는 말이었다. 봉근은 가슴이 뛰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이 노력한 결실임을 멀리서나마 추측할 수 있었다.

 
안봉근 요한 세례자


마침내 오른 귀국길

1945년 2월 13일 봉근은 아름다운 도시 드레스덴이 연합국의 폭격을 받아 잿더미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봉근은 자신이 박물관에서 정리한 조선의 물건들과 직접 만든 모형들이 눈앞에서 불타는 환영을 보았다. 더 이상 독일에 남을 수 없었다. 평생의 경험을 조국을 위해 쓰기로 다짐한 봉근은 귀국을 결심했고 여름이 되기 전 기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를 타고 스위스 바젤을 거쳐 마르세유에서 싱가포르, 홍콩을 거쳐 상해로 가는 배를 탈 셈이었다. 상해에만 도착하면 조선으로 가는 건 쉬운 일이라는 생각에 봉근은 가슴이 벅차오르며, 오래전 미륵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1914년 해주를 처음 떠날 때 아내 루갈다가 두루마기를 한 벌 해주었어. 독일이 비가 많이 오고 춥다는 이야기를 들었는지 솜을 두툼하게 넣었지. 떠나는 날 지어준 사람 맘 좋으라고 두루마기를 차려입고 배를 탔어. 일본을 떠날 때까지는 괜찮았는데 배가 남쪽으로 갈수록 더워서 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데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거야. 신부님이 일본에서 구해준 양복이랑 구두는 독일 가서 입으려고 아껴 두었거든. 싱가포르에 도착했을 때는 어쩔 수 없이 갑판으로 올라가 두루마기 아랫단을 뜯고 솜을 뽑아서 저 넘실대는 바다로 눈송이처럼 날려 보냈어.”

8월 15일 일본은 항복했고 조선에서는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해방된 조선이나 전후 유럽에서 안봉근을 본 사람은 없다. (끝)

 


송란희(가밀라, 한국교회사연구소 학술이사)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가톨릭평화신문 공동기획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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