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7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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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격랑 속에도 가톨릭 신앙 수호한 알프스의 주교좌 성당

[중세 전문가의 간김에 순례] 83. 스위스 쿠어 성모 승천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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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동부 그라우뷘덴주의 주도 쿠어. 중앙의 붉은 지붕 건물군이 쿠어 성모 승천 대성당과 주교궁이 모인 주교좌 호프(Hof) 구역이고, 오른쪽 비탈의 흰 건물 단지가 옛 프레몽트레회 수도원과 장크트 루치우스 성당으로 현재 신학교로 쓰고 있다. 쿠어교구는 본래 밀라노관구에 속했으나, 843년 이 지역이 동프랑크 왕국에 속하면서 마인츠관구에 속했고, 1803년 이후 교황청 직속 면속 교구가 되었다. 오늘날 쿠어의 가톨릭 신자는 약 30에 달한다.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목조 주택 샬레’, ‘만년설로 뒤덮인 웅장한 산봉우리’. 우리가 생각하는 스위스의 이미지입니다. 스위스 여행 프로그램도 이러한 ‘이미지 소비’가 주축을 이루고, 정작 의미 있는 도시는 그냥 지나치기 일쑤입니다.

그런 도시 중 하나가 스위스 동부 그라우뷘덴주의 주도인 쿠어(Chur)입니다. 베르니나 특급, 빙하 특급의 출발지로 철도 여행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성지처럼 꼽는 곳이나, 생모리츠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죠. 하지만 2000년 전부터 알프스 횡단하는 길이 쿠어에서 시작되었고, 알프스 파노라마 철도도 그 루트를 따라 뻗어있습니다.

쿠어는 교회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곳입니다. 쿠어교구에는 초대 교회의 뜨거운 선교 열정부터 세속화와 종교개혁으로 얼룩졌던 교회의 아픈 과거 그리고 최근 갈등까지 유럽 교회사의 빛과 그림자가 고스란히 압축되어 있습니다.

 
쿠어 구시가지 위쪽의 주교좌 호프 구역. 왼쪽 성벽 안에 성모 승천 대성당과 주교궁, 참사회 건물이 모여 있다. 이곳은 1514년 막시밀리안 1세가 도시와 분리된 주교령으로 인정한 곳이어서, 종교개혁 시기에도 황제와의 전면전을 피하려던 신교 측과의 타협으로 가톨릭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오른쪽 뾰족한 첨탑의 장크트 마르틴 교회는 16세기 쿠어 종교개혁의 중심이 된 개신교 교회다.


라틴 세계와 게르만 세계 연결하는 관문

쿠어를 이해하려면 알프스의 지도를 입체적으로 그려보아야 합니다. 북쪽으로는 라인강을 따라 보덴호까지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유명한 생모리츠의 엔가딘 계곡이 펼쳐집니다. 그 계곡을 따라 고갯길을 넘으면 밀라노에 닿습니다. 즉 쿠어는 험난한 알프스를 관통하는 핵심 고갯길이 교차하는 요충지로 라틴 세계와 게르만 세계를 이어주는 관문이었습니다.

아침 일찍 쿠어역에 도착하면, 붉은 파노라마 열차가 여행자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발걸음은 역을 나와 남쪽 구시가지로 향합니다. 오래된 골목길을 따라 중세 마을을 지나면, 구시가지 가장자리 언덕 위로 로마네스크 종탑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주교좌 호프’라 불리는 대성당 주변 구역에 주교관, 참사회 건물들이 모여 있습니다. 계단을 지나 문루를 통해 올라가는 길이라 별도의 도시로 들어가는 듯합니다. 쿠어의 신앙과 역사를 품은 구역으로, 종교개혁 이후 아래에 위치한 구시가지와 역사의 결을 달리한 곳입니다.

 
장크트 루치우스 성당의 성 루치오 무덤. 8세기에 성 루치오를 공경하기 위해 세운 성당으로 1140년 프레몽트레회 수도원이 들어서며 로마네스크·후기 고딕 양식으로 증개축했다. 종교개혁 시기에 수도원은 해체되었지만, 성당은 남았다. 1811년 화재 뒤 재정비하여 19세기부터 쿠어 신학교 성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알프스 고개 오가며 복음 전한 ‘성 루치오’

쿠어교구는 알프스 이북 지역의 최초 교구 중 하나입니다. 호프 구역에 이미 5세기 무렵부터 첫 주교좌 성당이 있었습니다. 현재 성당은 12세기 중엽부터 약 120년에 걸쳐 지어진 것으로 로마네스크 양식에 초기 고딕 요소가 녹아들어 있습니다. 성당에 들어서면 좌우 스테인드글라스의 빛이 어둡고 묵중한 로마네스크 아치 공간을 물들이고 있는데, 돌기둥의 조각에서 알프스의 거침과 중세 신앙의 단단함이 느껴집니다.

깊은 침묵 속에 성모 마리아의 대관식 장면과 그리스도의 수난을 주제로 한 황금빛 목조 제단화가 주 제대 공간을 밝히는데, 마치 섬세한 금실로 짠 신앙의 직물처럼 보입니다. 주 제대 아래 지하 소성당에 쿠어교구의 수호성인인 성 루치오의 성물함이 모셔져 있습니다.

성인은 2세기 말 쿠어 인근의 프레티가우 출신 귀족으로 알프스의 험준한 고갯길을 오가며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분입니다. 한때 브리타니아, 즉 영국에서 복음을 전하러 온 왕 루키우스로 알려졌지만, 지명을 잘못 표기하면서 생긴 착각이었을 겁니다.

공의회 문서상 쿠어교구의 초대 교구장은 아시니오 주교입니다만, 이 지역 신자들 마음속에는 성 루치오가 교구장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교회사에서는 문서의 기록보다 신앙의 기억이 더 오래되기도 합니다.

 
로마네스크의 아치와 초기 고딕 요소가 섞인 쿠어 대성당의 본랑과 황금빛 목조 제단화(1492). 제단화는 야코프 루스가 성모 승천과 예수 수난을 주제로 피나무를 깎아 만든 날개 제단화로 후기 고딕 예술의 절정을 보여준다.


신교로 돌아선 도시, 가톨릭으로 남은 구역

칼뱅이나 츠빙글리 때문에 스위스를 종교개혁의 나라로 생각하기 쉽지만, 쿠어의 사정은 복잡합니다. 종교개혁으로 구시가지는 신교로 돌아섰지만, 성벽으로 둘러싸인 대성당과 주교궁이 있는 구역은 가톨릭으로 남았습니다. 1514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가 이곳을 도시와 분리된 특별한 주교령으로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황제의 조치는 쿠어의 오랜 역사, 주교가 세속 영주이기도 했던 제국법적 지위, 중세 말 제후 주교와 지역 공동체의 갈등이 빚어낸 결과였습니다. 특히 1367년 재정난에 몰린 제후 주교가 주교령의 세속 통치권을 합스부르크 가문에 넘기려 하자 대성당 참사회와 쿠어 시민, 주변 골짜기 공동체는 교구가 어느 개인의 세속 영지가 아니라고 맞섰습니다. 이때 결성한 ‘하느님의 집 동맹’은 이후 주교의 세속 권력을 통제하며 지역 자치 전통의 한 축이 되었습니다. 제후 주교와 시민들의 갈등이 역설적으로 쿠어의 신앙을 지켜내게 된 겁니다.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교회 쇄신이 더해지며 이 지역은 가톨릭이 강한 지역이 됩니다.

이런 역사로 쿠어 대성당 참사회는 주교 선출권이라는 독특한 전통이 있습니다. 교황청이 세 명의 후보 명단을 보내오면, 이 중 한 사람을 참사회가 비밀 투표로 선출합니다. 물론 최종 임명권은 사도좌에 있습니다. 근대에 들어 매우 드문 사례지만, 쾰른대교구와 마인츠교구도 비슷한 절차를 밟습니다.

물론 사람들로 이뤄진 교회가 늘 일치의 모습을 보인 것은 아닙니다. 2020년에는 참사회의 의견 불일치로 새 교구장을 선출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공석이 장기화되자 결국 프란치스코 교황이 직접 임명권을 행사해 화합의 길을 열어야 했습니다.

호프 구역 위쪽 비탈길에 장크트 루치우스 성당이 있습니다. 옛 프레몽트레회 수도원으로 성 루치오의 무덤 위에 세워진 수도원입니다. 종교개혁기에 수도원장이 반역죄로 몰려 처형당하고 수도원은 폐쇄됐지만, 현재 그 자리는 미래의 사제들을 길러내는 신학교로 부활했습니다. 쿠어에서 인간사의 굴곡진 갈등 속에도 끝내 당신 빛을 밝히시는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를 깨닫습니다.

 


<순례 팁>

※ 취리히 중앙역에서 직행열차로 1시간 20분. 밀라노에서 자동차로 3시간 30분. 쿠어 역에서 대성당까지 20분(1.2km). 대성당에서 신학교까지 3분.

※ 쿠어 대성당 미사 : 주일 및 대축일 7:30(참사회 미사), 평일 6:30, 8:00(목), 9:00(화), 18:00(토), 19:00(금) / 장크트 루치우스 성당 개방 8:00~17:00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이 마련한 2026·2027 유럽 수도원 성지 순례. 문의 및 신청: 분도출판사, 010-5577-3605(문자)

차윤석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6-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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