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7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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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종사목의 든든한 협력자이자 신앙생활 연구에 헌신한 참군인

[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믿음에 충성한 백인대장, 신치구 베르나르도 장군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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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치구 장군.


3대가 한집 살던 독실한 가톨릭 집안

유아세례 받고 복사 서며 성장


“치구야, 손에서 묵주 놓지 말아라”

할머니의 신앙교육 늘 함께 해




신치구(베르나르도, 1932~2023)는 6·25전쟁을 겪고 육군 중장으로 예편한 군인이었다. 그의 삶을 빛낸 것은 계급장이 아니라 평생 간직한 가톨릭 신앙이었다. 전쟁터에서는 묵주를 손에서 놓지 않았고, 군에서는 군종사목의 든든한 협력자였으며, 예편한 뒤에는 한국 교회의 신앙생활 연구와 평신도 사도직을 위해 헌신했다. 총을 든 군인이자 십자가를 품은 평신도였던 그의 삶은 오늘날 우리에게 신앙인의 책임과 용기를 다시 묻고 있다.

 
옛 김천 대가족 기념사진. 맨 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신치구.


지극한 신부님 사랑

1961년 3월 어느 일요일, 저녁 어스름이 깔릴 무렵이었다. 제5사단이 주둔하고 있는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조치미(사직리) 부대 정문 근처는 가끔 군용 차량이 오갈 뿐 별다른 움직임이 없이 조용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고함소리가 들렸다.

“당신이 뭔데 우리 신부님한테 기합을 줘? 가만두지 않을 테니 당장 나와라!”

35연대 본부 중대장 신치구 대위가 연대장 관사 앞에서 칼빈 소총을 휘두르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매사 침착하고 태도가 신중한 신 대위의 격한 행동에 모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동료 장교들이 말리는 사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신 대위의 아내가 남편을 붙들고 애걸했다.

“기랑이 아버지, 제발 진정하세요! 도대체 왜 이러세요.”

소란은 20여 분 만에 가라앉았다.

사건의 발단은 부하 병사가 신 대위에게 군종 신부님이 연대장으로부터 기합을 받고 있다고 알려준 것이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신치구가 이에 격분하여 소동을 피운 것이다.

나중에 밝혀지기를, 연대장이 정문 앞을 지나는 한 병사의 복장 상태를 시정해주었는데 마침 그 병사가 신학생이었고, 이를 본 부하병사가 신학생을 군종신부라고 잘못 알려준 것이었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신 대위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지만 헌병대가 체포하러 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장교 품위손상, 총기 난동, 직속상관에 대한 모욕 및 협박 등 군법회의에 회부되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연대장은 이 사건을 불문에 부치고 더 이상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평소 신 대위를 아끼던 연대장 김희제 대령은 합리적인 성품의 지휘관이었다. 며칠 뒤 신 대위에게 이렇게 묻긴 했다.

“신 대위, 신부가 뭐냐? 신부가 누군지는 몰라도 나보다 더 존경하는 모양이구나!”

신 대위가 군의 위계질서를 거스르면서까지 보호하려 했던 군종신부는 1959년에 입대한 서울대목구 소속의 김병기(암브로시오) 신부였다. 독일제 오토바이를 타고 이 부대 저 부대로 종횡무진 미사를 다니시던 분이다. 신 대위의 막무가내 신부 사랑은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밴 구교 집안의 전통에 힘입은 바가 컸다고 봐야 한다.

 
김천고 동기들과 함께한 기념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신치구 장군.


친가와 외가 모두 천주교 집안

신치구는 1932년 경북 김천시 성내동 183-1번지에서 아버지 신종태와 어머니 김희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치구의 조부는 슬하에 4남 4녀를 두었는데, 부친은 그중 셋째 아들이었다. 집안은 전형적인 대가족으로 3대가 한집에서 살고 있었다. 백부는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분가해 살았고 삼촌과 고모들, 사촌들까지 모두 북적거리는 사랑 넘치는 집안에서 자라났다.

치구의 조부는 농사를 지었고, 부친은 김천 시내에서 포목상을 운영했다. 칸살이 넓은 집안은 언제나 잘 정돈되어 있었고 마당 우물가에 심겨있던 석류나무는 해마다 탐스러운 열매를 맺었다.

집안에서 둘째 손주로 태어난 치구는 주로 조모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는데, 할머니는 치구를 각별히 아끼셨다. 할머니는 치구가 아직 중학생일 무렵, 손주의 장래를 위해 따로 장만해둔 논 30마지기를 보여주시면서 ‘너는 아무래도 농부가 되기에는 몸이 허약하니 커서 도편수가 되는 게 좋겠다. 보통 목수보다는 수고를 적게 하면서 수입이 많은 것 같더라’고 일러주셨다. 할머니의 바람과 달리 치구는 나중에 목수 몇을 거느리는 도편수가 아니라 수만 명의 병사를 거느리는 장군이 되었다.

치구의 친가와 외가 모두 천주교 신앙을 일찍이 받아들인 집안이었다. 친가 쪽으로는 할머니가 1900년 천주교에 입교한 후 모든 자녀를 신앙의 길로 인도하였다. 주일이나 대축일에는 온 가족이 다 함께 미사에 참여하기 위해 김천 시내 황금동에 있는 성당으로 향하곤 했다.

외가 쪽 역시 열성적인 천주교 집안으로 외조부는 김천본당 선산 이례공소 회장을 지내신 분으로, 인근에서 신심이 두터운 어르신이라고 소문이 나 있었다. 외가 입구에 마련된 공소에서는 주일마다 신자들이 모여 공소예절을 드렸고 저녁마다 만과(저녁 기도)를 올렸다. 집안에서 외가 쪽으로 사촌 중에 사제가 한 분 났고 친가, 외가 쪽 모두 수도자가 한 분씩 났다.

어릴 적부터 치구와 사촌들은 만과와 묵주신공을 드린 뒤에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는데,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저녁 기도 시간이 어린 손주들에게는 고통이었으나 할아버지 할머니의 꾸중을 피하려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해마다 성탄 미사는 늘 기다려지는 일이었다. 성탄 자정미사에 참여하기 위해 멀리 공소에서 오는 신자들은 읍내 친척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기도 했다. 추운 날씨에도 노래와 성극을 접하는 일은 언제나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자정미사가 끝나면 새벽 두시나 되어서 귀가했는데, 따뜻한 방에 둘러앉아 먹는 갱시기라고 하는 김치죽은 꿀맛이었다. 치구는 전방 근무 시절 병사들과 미사를 드린 후에도 이 전통을 지켰는데 겨울밤 뜨거운 죽을 후후 불며 다 같이 행복해하던 모습은 오래도록 추억으로 남아있었다. 그의 집안에서는 성탄 미사 후 김치죽을 먹는 전통을 8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김천고 시절 신치구.


손주를 위해 끊임없이 바친 할머니의 기도

치구는 태어나자 바로 유아세례를 받았고 동네에서 자랄 때는 서당에서 천자문을 익혔다. 김천 공립보통학교(현 김천초등학교)를 다닐 무렵 치구는 복사를 섰는데 그 시대에는 당연히 라틴어로 응답송을 했다. 어려운 발음에 우물쭈물하다가는 여지없이 본당 신부님의 불호령을 받아야 했다.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토요일마다 찰고를 받고 고해성사를 하는 것이었는데, 아이들이 지은 죄가 생각이 나지 않아 ‘고할 게 없다’고 하면 “신부님은 우리 본당에 성인 났네!” 하시면서 무안을 줬다. 그래서 아이들이 생각해낸 고해 내용은 주로 “성체를 영하기 전에 냉수를 마셨습니다”였다. 어린 치구의 신앙을 키워주신 그 엄하고 무서운 호랑이 신부는 후에 주교품에 오른 최재선 주교로, 전장에 나간 치구에게 가장 먼저 성탄 카드를 보내준 자상한 신부였다.

조국 해방과 혼란한 정국을 거치는 동안 신치구는 김천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각별한 할머니의 신앙교육이 언제나 함께했다. 할머니는 늘 말씀하셨다. “치구야, 묵주 기도를 해라. 손에서 묵주를 놓지 말아라. 성모님이 너를 지켜주실 것이다!”

고향에서 밤낮없이 손주를 위해 끊임없이 바친 할머니의 간절한 기도 덕분에 치구는 전쟁터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성모님은 신치구 베르나르도를 끝까지, 병사에서 별 셋을 단 장군이 될 때까지 지켜주셨다. <계속>

 


권은정 (유스티나 루이제, 작가, 전문 인터뷰어)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가톨릭평화신문 공동기획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6-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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