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흙살림연구소 이태근 회장이 6일 충북 청주 사무실에서 1996년 당시 한마음한몸운동본부로부터 받은 상장을 들어올리며 밝게 미소 짓고 있다.
충북 괴산·청주에 위치한 사단법인 흙살림연구소. 이곳은 이태근(프란치스코) 회장이 한국의 농업 생태계를 ‘생명의 농업’으로 바꾸기 위해 지난 35년간 온몸을 바쳐 일궈온 터전이다. ‘흙은 생명의 어머니’라는 사명 아래 그가 이끌어온 흙살림의 역사는 한국의 자생적 유기농업의 역사 그 자체이기도 하다. 제31회 농민 주일(19일)을 맞아 흙살림연구소 청주센터를 찾아 우리 땅에 맞는 유기농법을 연구해 친환경 농업 확산에 앞장서고 있는 이 회장을 만났다.
(사)흙살림연구소가 유통하는 친환경 방울 토마토. 흙살림연구소는 유기 농법을 보급, 활성화할 뿐만 아니라 농민들이 생산한 친환경 유기 농산물의 전국 유통을 맡아 농민들의 지원군 역할을 하고 있다.
자연의 중심, 흙의 가치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께서 인간을 흙으로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잖아요. 동양 철학의 오행(木火土金水)에도 보면 자연의 중심에 흙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지금 어떤가요. 아이들은 흙 한 번 밟지 못하고, 온 땅을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깔아 흙을 감춰버렸습니다. 흙을 우습게 아는 사회는 결코 오래갈 수 없어요.”
이 회장에게 흙은 지구 상 모든 피조물에 생명을 주는 존재이자, 모든 것의 종착지다. 그의 생각을 반영하듯 흙살림연구소 청주센터 사무실 곳곳에는 ‘흙의 가치’를 적은 현판이 달려있다. 흙을 살려 농민과 소비자, 환경 모두를 살리겠다는 창립 정신을 잊지 않고자 한 이 회장의 뜻이다.
그가 본격적으로 ‘농촌의 흙’에 발을 디디기 시작한 때는 43년 전이다.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학을 졸업하고 학생운동에 투신하던 그는 1984년 농민운동에 동참하고자 충북 괴산으로 내려왔다. 당시 가톨릭농민회가 벌이던 농촌 공동체 운동과 연대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농민회가 추진하던 ‘소 배내기’ 운동에 함께했다. 외국에서 원조받은 암소를 농민에게 주고 새끼를 낳으면 송아지는 농가가 갖고, 어미 소는 다시 옆집에 나눠 협동과 자립을 돕는 소 배내기 운동에 함께하며 농촌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때는 우리 농촌이 더 어려웠어요. 10년 동안 열심히 수입 농산물 개방 반대 시위에 참여하고, 농가 부채 탕감운동과 농협 민주화운동도 이끌었죠. 그런데 한 10년을 해보니 깨달음이 오더라고요. 정치하는 사람들 보고 맨날 ‘사회를 바꾸라’고만 요구할 게 아니라, 우리 먼저 바뀌는 운동을 해야겠다고요.”
생명 살리는 유기농업
농업 운동에 투신하던 그는 그렇게 농민들이 스스로 생명을 살릴 대안을 찾기로 결심했다. ‘요구하고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닌, 실질적인 생명 운동이 필요하다’는 사명감으로 화학비료와 농약 과다사용으로 죽어가는 우리 흙을 살리기 위해 전공을 살려 기술적으로 토양과 국민 건강을 지키는 농법을 찾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합성 화학비료와 농약을 쓰지 않고 유기물·미생물로 토양 생물활동을 증진해 농업 생태계를 건강하게 보전하며 작물을 재배하는 유기농 기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당시 우리나라 유기농 기술은 대부분 일본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화산재 토양이고 한국은 화강암 기반 토양으로, 근본부터 다릅니다. 흙이 다르면 그에 맞는 미생물도 달라야 하죠. 우리나라의 전통 된장·간장·김치는 세계 최고 수준의 발효 문화잖아요. 우리도 충분히 우리 미생물을 만들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 길로 이 회장은 과학자였던 몇몇 친구, 농민들과 협력해 1991년 흙살림연구소의 전신 ‘괴산미생물연구회’를 설립해 우리 흙에 맞는 미생물 연구에 돌입했다. 흙·농민·소비자의 생명을 진정으로 위하는 유기농업을 통해 안전한 농산물 생산 문화를 만들겠다는 결심이었다. 연구회는 1993년 흙살림연구모임·연구소로 개칭했고, 1996년 사단법인으로 등록하며 현장에서 유기농업 확대·보급에 앞장서게 된다.
흙살림연구소 이름이 농민들에게 알려진 첫 계기는 뜻밖에도 ‘재래식 화장실 미생물’을 보급하면서였다. 농민들에게 미생물의 중요성과 효능을 알리고 유기농법에 대한 관심을 끌고자 먼저 택한 길이었다. 이 회장의 연구회가 개발한 미생물을 화장실에 뿌리면 악취가 마법처럼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괴산 전역의 농가에 “이 친구가 만든 미생물을 뿌리니 화장실 냄새가 사라졌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는 주변 농가에 미생물을 활용한 유기농법의 가치를 알리는 계기가 됐다. 이후 그는 퇴비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친환경 퇴비 부숙제, 음식물 쓰레기 발효제 등 13종류의 미생물 제품과 각종 미생물 농자재 등을 생산·보급하며 농가 환경 개선을 끌어낼 수 있었다.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1996년 서울대교구 한마음한몸운동본부가 수여하는 제4회 천주교 환경상을 받기도 했다.
이후 전국에 15개 흙살림 지부를 창립하며 친환경 농업 정보 교류, 유기농업의 전국적 보급에 힘쓰게 됐다. 농민들의 삶과 이 땅의 생명을 살리는 연구자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2005년에는 농업회사법인인 흙살림푸드를 설립해 유기농법으로 토마토를 생산·유통하는 활동에도 나섰다. 설립 35년째를 맞은 현재 흙살림연구소는 미생물과 유기농법, 친환경농업 재배기술 연구 분석·개발, 친환경농자재 생산판매 등에 앞장서는 ‘친환경 유기농업 종합 플랫폼’으로 발전했다.
(사)흙살림연구소 직원들이 서울의 초등학교·어린이집에 공급할 친환경 농산물들을 손질하고 있다. 이화원 기자 제공
끊어진 자연 순환 연결이 생명 살리는 길
이 회장이 평생 추구해온 유기농업의 핵심은 ‘순환’이다. 이 회장은 “현대 화학농법은 흙보다 ‘석유’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며 “비료와 농약, 비닐을 끝없이 만들어내는 석유는 결국 환경만 오염시킬 뿐”이라면서 비료 없이도 자연 순환 속에 지속해온 우리 전통 농업을 이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초제 한 병 사서 싹 뿌리면 농사짓기 얼마나 편합니까. 하지만 제초제는 환경에도 좋지 않을 뿐더러 물로 유입되면 우리 건강도 상하죠. 흙에 제초제가 쌓이면서 이로운 미생물들까지 죽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농민이 화학비료에 기댑니다. 하지만 음식물 찌꺼기나 배설물은 좋은 자원이 됩니다. 그냥 한 곳에 쌓아두면 바다와 흙을 오염시키는 ‘폐기물’이 되지만, 잘 발효시켜 땅으로 돌려보내면 좋은 퇴비가 됩니다. 결국 끊어진 순환을 이렇게 다시 연결하는 게 생명을 살리는 길입니다.”
이 회장은 “기후위기 극복을 위해서라도 자연 순환을 살리는 데에 정책적 여력을 쏟아부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농업 정책 당국이 생산성에만 집중해 스마트팜과 같은 ‘석유 중심 농업’에만 예산을 쏟아붓는데, 진짜 대안은 탄소를 흡수하고 물과 흙을 살리는 유기농업에서 찾아야 한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유기농업을 실천하는 농민들을 위한 ‘인센티브’도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유기농업을 실천하는 농민들은 우리 물과 토양, 환경을 살리기 위해 우렁이를 넣고, 손으로 풀을 뽑아가며 미생물을 이용한 친환경 제초제를 뿌리며 농사를 짓습니다. 굳이 어려운 이 일을 택하는 이분들이야말로 진정한 환경 운동가 아닙니까? 이들에게 분명한 지원이 있어야 합니다.”
이 회장은 “도시와 농촌의 순환을 되살리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다”며 도시 소비자들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전했다. 크고 깨끗한 농산물만 선호하는 소비 행태가 농촌의 변화를 저해하는 주범이라는 것이다.
“학교 급식에 유기농 감자가 들어가면 모양이 못생겼다고 기계로 깎고 사람이 또 깎아서 알맹이의 30~40를 그냥 버립니다. 영양분이 많은 껍질을 다 버리는 게 얼마나 큰 사회적 낭비입니까. 소비자가 무조건 크고 깨끗한 것만 달라고 요구하면 농민들은 결국 화학비료를 더 쓸 수밖에 없죠. 조금 못생기고 작아도 땅을 살린 생명 농산물을 감사한 마음으로 기꺼이 택해주는 소비자들의 의식 변화야말로 창조질서 보전을 향한 가장 아름다운 신앙의 실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