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교구 점촌동본당 산북공소는 유교의 예법을 따르는 장수 황씨 집성촌에 세워진 가톨릭 신앙의 못자리이다. 산북공소 전경.
안동교구 점촌동본당 산북공소는 경북 문경시 산북면 한두리시장길 3-2(대상리 96-4번지)에 자리한다. 원래 이 고장은 조선 세종 때 18년간 영의정을 지낸 황희의 고손(高孫) 황사웅이 이곳에 이주해 터를 잡고 장수 황씨 집성촌을 이뤄 살면서 도와 덕을 닦는 군자들이 사는 마을이라 이름 하여 ‘도촌’(道村)이라 불렀다. 이후 사람이면 마땅히 지켜야 할 큰 도리를 수행하는 마을이라 해서 ‘대도리’(大道里)라 쓰고, 우리말로 ‘한두리’라 불렀다. 그리고 마을 가운데로 흐르는 개울을 경계로 위아래로 나눠 한두리·아랫한두리로 불렀고, 한자어로 대상리(大上里)·대하리(大下里)라 했다.
문경을 비롯한 경상도 북부 일대에 그리스도인들이 살기 시작한 때는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다. 1815년 을해박해 때 청송·진보·영양·안동 등지에서, 1827년 정해박해 때 상주와 순흥에서 교우들이 체포됐는데 이들 대부분이 신유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이주한 충청도 출신 교우들이었다. 따라서 경상도 북부 지역 가톨릭 신앙공동체는 충청도 신자들에 의해 형성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산북공소는 양쪽 벽에 많은 창을 내어 낮 동안 빛이 공소 안에 가득하도록 해놓았다.
옹기 마을에서 경상도 북부 중심지로 성장
조선 왕조 치하의 박해가 끝나고 신앙의 자유를 얻은 후 1897년 경상도 북부 지역에 첫 번째로 공소가 공식 설립된다. 바로 점촌동본당의 뿌리인 ‘표석골공소’다. 초대 대구대목구장 드망즈 주교는 1922년 표석골공소를 공평본당으로 승격, 상주 퇴강본당과 함께 경상도 북부 지역의 첫 본당으로 설립했다.
점촌(店村)은 조선 시대 상주군 영순면에 속한 옹기와 기와를 구워 팔던 마을이었다. 이 작은 마을은 일제강점기 철도가 놓이면서 500여 세대가 사는 상업 도시로 부흥했다. 이후 문경 일대를 관할하는 관청이 들어서 경상도 북부 지역의 중심지로 괄목하게 성장했다.
경상도 북부 지역의 사회 경제 중심이 옮겨지면서 교회의 중심 사목지도 자연스럽게 따라서 이동했다. 제2대 대구대목구장 무세 주교는 1942년 공평에 있던 본당을 함창으로 옮겼다. 공평 교우들은 쉽게 본당 사목구를 양보하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해방 직후인 1947년 점촌 언덕 위에 있던 옛 일본 신사 터를 사들여 성당을 지었다. 공평 교우들은 산허리 경사면을 평탄하게 고르고 시멘트 축대 위에 흙벽돌로 길이 20m, 높이 3.5m의 성당을 짓고 그 위에 나무 지붕을 씌었다. 이 일로 공평 교우들은 많은 빚을 졌다.
“한껏 치장하긴 했지만 새 성당은 위치며 모양이며 실패에 가깝다. 그래도 우리 공평 교우들이 스스로 발의해 자신들의 재원과 봉사로 이룩한 숭고한 위업이다. 그들의 희생에 대한 대가는 참담했다. 8년 동안이나 공소로 있었고 번거로운 일도 많았다.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성당은 인민군 야전병원이 됐다. 유엔군의 즉각적인 반격으로 탈환했지만, 유리창 하나도 성한 게 없었다. 지붕과 바닥은 구멍이 뚫렸다. 지금도 온전히 복구되지 못했다.”(아르놀드 렌하르트 신부, 1956/1957년 점촌동본당 연대기. 「분도통사」 1637쪽)
1953년 11월 말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최영호(비안네) 신부가 부임하면서 공평공소는 점촌동본당으로 승격했다. 더불어 왜관수도원이 1956년부터 1986년까지 30년간 경상도 북부 지역을 ‘왜관감목대리구’로 관할하면서 점촌 일대는 새로운 복음화의 전환기를 맞이했다.
1956년 7월 제6대 주임으로 부임한 아르놀드 렌하르트 신부는 관할 사목구에 필요한 지역마다 공소를 많이 설립해 선교에 힘썼다. 산북공소 또한 그가 1957년에 설립한 공소다. 산북공소는 처음에는 마을 지명에 따라 ‘대상리공소’로 불리다 1959년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렌하르트 신부는 젊고 유능한 목수들로 직접 건축팀을 꾸려 공소를 지었다. 하도 많은 공소 건물을 지어 교우들은 렌하르트 신부를 ‘석회 인간’, 그의 건축팀을 ‘석회 부대’라 불렀다. 그는 연길수도원 선교사로 활동하다 중국 공산 당국에 체포돼 남평 강제노동수용소에서 2년간 수감 생활을 하면서 곡괭이와 삽질에 이골이 났다. 그는 솔선수범해 곡괭이로 공소가 지어질 땅을 파고, 삽으로 시멘트를 퍼 날랐다.
알빈 슈미트 신부가 설계한 지금의 점촌동성당도 렌하르트 신부가 지었다. 렌하르트 신부는 교우들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변변한 하느님의 집이 있어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 그는 한겨울에도 맨발에 차가운 고무신을 신고 성당에 오는 교우들을 보고 늘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성당 건축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직접 농사를 짓고 돼지를 키웠다.
시골 공소로는 큰 규모
산북공소는 1960년 8월 석회 인간과 석회 부대에 의해 지어져 봉헌식을 했다. 넉 달 후인 12월 점촌동본당 새 성당을 축성, 봉헌했다. 지금의 산북공소는 1989년 11월에 증축한 건물이다.
산북공소는 웬만한 시골 성당 규모다. 코로나19 팬데믹 이전 공소에 나오는 교우가 60여 명이 넘었다고 하니 이해가 된다. 너른 마당에 야트막한 흰색 공소 건물이 정겹다. 산북공소는 3단 돌 축대 위에 벽돌집으로 지어졌다. 출입구 정면에 종탑을 내고 함석 지붕으로 마감해 놓은 것이 6·25 전쟁 이후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한국 교회에서 유행하던 건축 양식을 그대로 따랐다.
공소 내부는 공간을 나누는 기둥들 없이 강당 형태로 단순화해놓았다. 내부 벽은 모두 흰색 칠감으로 마감돼 있다. 바닥은 원목으로 치장해놓았다. 회중석 양쪽 벽에 각 6개의 창을 내어 낮 동안 공소 안에 늘 빛이 들어오게 해놓았다.
제단은 제대가 꽉 찰 만큼 아주 좁다. 제대 뒤로 감실과 십자가, 루르드의 성모상이 모셔져 있다. 제단 뒤편에 두 개의 방을 만들어 하나는 고해실로, 나머지 하나는 다용도실로 사용하고 있다. 고해실은 나무 칸막이로 사제석과 고해자석으로 구분해 놓았다. 그리고 오래된 제대 십자가와 예수 성심상, 성모상이 안치돼 있다.
산북공소는 도와 예, 덕을 숭상하는 전통 깊은 유교 마을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가톨릭 신앙의 못자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