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8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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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탄도 총탄도 비껴간 목숨, 손엔 늘 묵주를 쥐고 있었다

[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믿음에 충성한 백인대장, 신치구 베르나르도 장군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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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에서 전우들과 함께한 신치구(맨 왼쪽).


대학 진학 중 6·25전쟁 터져 징집

어느날 죽은 병사 곁에서 밤새 연도

그날 밤 기도가 훗날 자신을 살린

보속이 되었다고 굳게 믿어


6·25전쟁 중 갑종 간부 후보생 입교

평생 군인으로 살아가게 된 전환점


24주 장교 후보 교육 중 첫 외박날

성당 찾아가 신앙의 허기 채워




1951년 9월 신치구(벨라도)는 포항 보충대에 도착했다. 1950년에 대구대학교 법학과에 진학했지만 전쟁이 터지면서 한 학기 만에 징집영장이 나왔다. 보충대 충원 요원으로 부대에 남게 된 어느 날 저녁 내무반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하사관이 들어와 말했다.

“여기 종교를 가진 자가 있나?”

“예, 접니다.”

신자를 특별히 좋은 곳에 배치하기 위해 물어보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신치구는 재빨리 손을 들었다.

“너, 따라와.”

하사관은 24인용 천막 앞에 서더니 말했다.

“오늘 밤은 이 천막에서 새우도록 한다.” 천막 안 휑한 공간에 시신 한 구가 안치되어 있었다. 하사관은 고인의 빈소를 밤새 지켜 줄 신자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함께 징집되어 온 청년의 시신이었다. 번쩍 손을 든 일이 후회막급이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두려움이 몰려왔다. 정신을 집중해 기도를 드리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연도를 바치려고 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수없이 바쳤던 연도의 단 한 줄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성인 호칭 기도부터 시작했다.

“성녀 마리아, 망자를 위하여 빌으소서”, “성 요셉 망자를 위하여 빌으소서.”

그다음으로 생각이 나지 않아 이제는 가족들을 떠올리며 기도를 이어나갔다. 할아버지·할머니·큰아버지·고모님들의 얼굴이 떠오르며 눈물이 흘러나왔다. 성 안드레아, 성 야고보⋯. 성 벨라도, 성 갸오로, 성 로무왈도, 성 고스마, 성 요한 금구, 성녀 막달레나, 성녀 데레사, 성녀 안나⋯ 망자를 위하여 빌으소서.

긴 연도에 이어 묵주 기도를 바치는 사이 길고 긴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죽은 이의 영혼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를 바쳤다. 치구는 홀로 죽어간 그 병사의 운명에 곧 전쟁터로 나갈 자신의 운명을 덧대어 생각하였다. 신치구에게 그날 밤의 기도는 평생 가장 진지하고 절박한 기도였다. 후에 그는 미리 드린 보속 덕분에 자신이 치열한 전쟁터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6·25 전쟁 당시 육군 소위 신치구.


부대생활에 적응할 즈음 신치구는 부대 서무계로부터 갑종간부 후보생 선발시험에 응시하라는 통보를 받게 되었다.

“갑종 간부가 무엇입니까?”

“육군 소위가 된다는 말이다.”

“저는 소위가 되는 것보다 지금 이대로 병사가 좋습니다. 응시하지 않겠습니다.”

서무계는 눈을 부라리며 절대 안 된다고 했다.

“휴전 회담이 진행되고 있으니 곧 전쟁이 끝날 것이다. 걱정하지 말고 교육을 꼭 받아라!”

그렇게 해서 신치구는 광주 상무대 보병학교에 갑종 간부 후보생으로 입교하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 학교로 돌아갈 날만 기다리던 그가 평생 군인으로 살아갈 삶을 시작하게 된 전환점이었다.

당시 병사들은 아무도 장교가 되려는 마음이 없었다. 그때는 다들 소위를 소모품이라고 불렀다. 적의 포탄이 앞에서 날아올 때 쉬쉬하는 비행음이 ‘소위소위’ 하며 소위를 잡으러 온다고도 했다. 소리가 비슷하게 들리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전쟁터에서 희생될 비율이 제일 높은 계급이 소위라는 의미였다. 최소 편성 단위인 소대의 지휘관으로서, 적과 맞서는 최전선에서 ‘나를 따르라!’고 하는 이들은 주로 소위였으니 말이다. 부대에서는 항상 소대장이 부족했다. 부족한 소위 인원을 보충하기 위해 2~4주 간격으로 250명 내외의 장교를 배출했다. 짧은 양성 기간 동안 기본 교육만 받고 전선에 배치되어야 했다.

24주의 장교 후보 교육 기간 동안 치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두 가지 배고픔이었다. 훈련의 강도에 비해 식사량이 언제나 부족한 군인에게 배고픔은 적보다 더 무서운 것이었다. 그리고 신앙의 허기였다. 당시 부대에서는 미사는 물론 공소예절도 드릴 처지가 못 되었다. 어딘가에 군종 신부님이 계신다는 말을 소문으로만 들었다. 교육이 절반쯤 지나 마침내 첫 외박이 허락되었을 때 맨 먼저 찾아간 곳은 식당이었다. 주린 배를 채운 병사가 그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성당이었다. 치구는 외박이 허락되는 6주 동안 미리 알아둔 광주 시내 남동성당으로 찾아가 주일 미사에 참여하였다. 허름한 군복 차림의 군인에게 말을 걸어오는 이 하나 없는 외로운 처지였지만, 성체를 받아 모실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신자 병사 치구는 정말로 행복했다.

 
전쟁터에서 전우들과 함께한 신치구(왼쪽 둘째 열).


1952년 7월 5일 신치구는 갑종 간부 제22기생 육군 소위로 임관하게 되었다. 신치구 소위는 군번 21553을 부여받고 동부전선 건봉산 일대에서 방어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보병 제11사단으로 전속 명령을 받았다. 부대의 전훈은 ‘공은 부하에게, 명예는 상관에게, 책임은 나에게’였다. 신치구 소위는 중포중대 관측장교로 보병의 관측 임무를 맡았다. 적군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관측소(OP)를 정하고 적의 동태를 살피고 보병의 사격 요청에 따라 중대에 사격 목표 지점을 알려 탄착을 유도하는 임무였다.

남북 군대는 양측 모두 험준한 산악지대에 강력한 방어 거점을 구축하고 있으면서 제한적인 기습과 포격을 밤낮없이 되풀이하고 있었다. 1952년 가을 신 소위는 아군 최전방 600고지 건봉산 후사면 진지에 서 있었다. 그의 앞으로 진짜 ‘소위소위’ 하면서 152밀리 박격포탄이 날아와 눈앞에 떨어졌다. 하지만 그는 죽지 않았다. 불발탄이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이 그때뿐이었겠는가. 금성지구 전투에서는 관측병 4명과 적진에 완전히 포위된 적도 있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지만 후방 진지 천막 안으로 날아온 포탄에 그 전우들을 잃고 말았다. 그도 역시 적의 총탄을 가슴에 맞고 쓰러진 적이 있었지만 우연히 입었던 방탄조끼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 휴전을 앞둔 시점 최전방에서 16일간이나 계속된 적근산 전투가 벌어졌을 때는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포탄 속에서 생사의 갈림길을 오갔다. 그리고 마침내 1953년 7월 27일 밤 10시를 기해 포우(砲雨)가 멈췄다. 전쟁이 끝난 것이다.

“예수여, 우리를 구하소서!” 처절한 전쟁터에서 애원과 절규로 하느님을 찾아 외치던 기도는 감사기도로 바뀌었다. “예수, 마리아, 요셉 감사합니다!”

치열한 전투에서 그의 믿음은 어머니의 젖줄 같은 의지처가 되었고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치구는 하느님의 자비와 성모 마리아의 통공이 그를 죽음의 구렁에서 보호해주셨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참호에서 잠들 때도 할머니가 주신 묵주를 꼭 쥐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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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은정 (유스티나 루이제, 작가, 전문 인터뷰어)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가톨릭평화신문 공동기획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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