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8월 12일
기획특집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GOP 철책서 건넨 성모님 상본, 택시 기사 품에서 다시 만났다

[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믿음에 충성한 백인대장, 신치구 베르나르도 장군 - (3)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21사단 백두산성당 봉헌식을 주례한 김수환 추기경과 신치구(뒷줄 오른쪽).

 


대령으로 전방 GOP부대 지휘할 때

순찰하는 병사들에게 성모 상본 건네


비육사 출신 화려한 인맥 없이 장군 진급

교황청은 교황 기사 훈장 수여

김 추기경, ‘군종사의 전설’이라며 축하




1978년 광주 상무대에서 전투병과 교육사령부 참모장을 지낼 때였다. 어느 날 시내에서 택시를 탔는데 기사가 백미러로 신치구 장군을 계속 보는 듯했다.

“혹시 저 15사단에서 근무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네, 그런데요?”

“그럼, 1974년 당시 50연대장님 아니십니까?”

“맞습니다.”

반가운 기색이 역력한 기사는 잠시 신호를 기다리는 사이 지갑에서 재빨리 무언가를 꺼내 보여주었다. 귀퉁이가 다 닳은 작은 성모님 상본이었다.

“제가 50연대에서 철책 근무를 할 때 연대장님께서 주신 상본입니다. 군 생활 동안 이 상본의 성모님이 제 어머니가 되어주셔서 두려움을 이기고 마음의 평화를 얻었습니다. 저도 천주교 신자입니다.”

그 택시 기사는 신 장군이 장병들에게 뿌렸던 신앙의 씨앗이 맺은 열매였다.

 

 

한국전쟁 후 38사단 동료들과(가운데).

 


GOP(General Outpost)는 6·25전쟁 이후 군사분계선에서 남쪽으로 2㎞ 떨어진 남방한계선 철책을 따라 설치된 일반전초를 말한다. 이곳 근무 장병은 야간에 경계근무를 하기에 밤낮이 바뀐 생활을 한다. 병사들은 실탄을 장전한 소총과 수류탄을 휴대한 채 생활하며 언제든 전투가 가능한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등 항상 긴장 속에서 살았다.

1969년 한신 대장이 제1 야전군 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신앙의 전력화’를 위해 ‘전군 신자화 운동’을 주창하고 이를 전체 군대로 확산시키고 있었다. 군의 신앙 전력화와 신자화 운동은 휴전선 철책 경계를 담당하는 병사들에게는 특히 적극 권장되었다. 확고한 신앙은 유물론 공산주의에 맞서는 정신 무장이 되고, 각종 안전사고와 월북을 예방하는 데 효과적이기 때문이었다. GOP 근무에 투입되기 전에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수계나 세례를 주기 위해 군종 스님, 목사, 신부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그러나 양적인 팽창을 우선시하다 보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1974년 2월 말 토요일 오후 400여 명의 장병을 대상으로 세례식이 거행되었다. 사단장과 각 연대장 및 군인 가족 신자들과 서울에서 온 열심한 신자들, 군목과 민간 목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단상에서 세례식을 지켜보던 연대장 신치구 대령의 눈에 한 병사의 군복 상의 주머니에 십자 표시 배지가 두 개 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세례식 후 그 병사를 불러 배지에 대해 물으니 이렇게 대답했다.

“예, 하나는 전에 세례받을 때 것이고 하나는 오늘 세례식에서 받은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을 도외시한 채 문제 사병의 선도와 사고 예방 등 군의 안전을 위한 현실적인 목적으로 접근한 ‘전군 신자화’는 부대 내 각 종교의 세례자 수를 합하면 전체 부대원 숫자보다 더 많이 나오는 결과를 내기도 하였다. 신앙은 어떤 명분이든 세속적인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신치구 대령은 제대로 된 군인 신자 양성에 힘쓰기 시작했다. 1975년 주님 부활 대축일을 앞두고 30명의 병사가 천주교 신자로 탄생했을 때 그는 마치 한 부대를 얻은 것 같았다.

 

 

50연대 군종 사제들과 수도자와 함께 한 신치구 대령(오른쪽에서 네 번째).

 


신치구 대령은 전방 GOP부대를 지휘할 때마다 신부님과 수녀님의 부대 방문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이들은 매번 기도서와 빵과 음료수를 한가득 싣고 나타나셨는데 특히 정명조 아우구스티노 군종신부(후에 초대 군종교구장 주교)가 챙겨온 성모님 상본 1000매는 그 역할을 제대로 했다. 철책선을 따라 야간 순찰에 나섰을 때 신 대령은 병사들에게 상본을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

“고향의 어머니 대신 하늘의 어머니가 너를 보호해주실 것이다. 이 상본을 잘 간직하도록!” 그때 상본을 받은 장병 중에 천주교를 알게 된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가 99보병여단장으로 경기도 서해안 경계를 담당하고 있었을 때는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고 근무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가까운 왕림본당의 수녀들에게 야간 초소 위문을 요청했다. 수녀들이 기꺼이 해안선 초소 위문에 나섰는데 병사들은 환호하며 반가워하였다. 11월 겨울 밤바람을 뚫고 따뜻한 호빵을 준비해온 수녀님들은 새벽이 될 때까지 남양만의 해안선을 다 돌았다.

그가 부임하는 부대에 종교 행사가 있을 때마다 근처 본당의 신부와 수녀들이 기꺼이 달려와 봉사를 해주었다. 또 본당 행사가 있을 때는 부대에서도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부대와 인근 본당 사이에 일종의 자매결연 관계가 형성되었다. 특히 신치구 장군의 이·취임식 같은 경우에는 부대 행사와 천주교 행사가 구분이 안 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신치구는 1978년 1월 육군준장으로 진급하였다. 1951년 군 입대 후 25년 6개월 만에 마침내 별을 달게 되었다. 신치구 장군은 장성 진급 축하 인사를 건네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가 단 별은 하느님께서 달아주신 별입니다!”

사실 그는 육사 출신도 아니고 어디 내세울 만한 화려한 인맥도, 정치적 연줄도 없었다. 오로지 그가 믿는 가장 든든한 ‘빽’은 하느님이었다. 하느님에 대한 굳센 믿음 하나로 험난하지만 바른 길을 최선을 다해 걸어온 것이다.

 

 

5사단 참모들과 기념촬영한 신치구.(뒷줄 오른쪽)

 


소장으로 진급한 1983년에 그는 아주 특별한 경사를 맞이하게 되었다. 성 그레고리오 교황 기사 훈장을 받게 된 것이었다. 교황청은 신치구 베르나르도가 군 입대 이후 소속 부대의 가톨릭 장교단에서 보인 열성적인 활동과, 군부대 내 성당 건립과 군인 세례자 배가운동을 위해 애쓰고, 군종단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공로를 인정해 훈장을 수여한다고 하였다. 한국군 장교로서는 신치구가 최초로 받은 훈장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이때 축하 인사에서 “신치구 장군은 군종 사목에 각별한 지원을 해줘 살아있는 군종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군종 사제들 사이에서 그는 군종사의 전설로 통한다”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군종 신부는 전쟁 중인 1951년 2월 군종 제1기 신부 11명으로 탄생했으며, 6·25전쟁 동안 40명이 전선에서 사목하였다. 그 후 각 교구 사제의 10를 군종 신부로 파견하기로 하면서 1978년 4월 총 10명의 신부가 군종사관 후보생으로 입교하였는데, 제2대 군종교구장과 의정부교구장에 오른 이기헌 주교도 그중에 있었다.

신치구 장군은 군 생활 동안 도합 27명의 군종 사제와 함께했다. 소위 시절부터 장군에 이르는 긴 세월 동안 군종 사제의 업무를 돕기 위해 실로 물불을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했으며, 신학생 병사를 물심양면으로 보살폈다. 그가 군 현장에서 군종 신부를 도운 이유는 간단하고 분명했다. 하느님 백성을 돌보고자 나선 사제가 그 직무를 잘 수행하도록 보조하는 일은 평신도 신자로서 마땅한 임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80년 3월 광주교구의 김성용 프란치스코 신부는 99보병여단장 신치구 장군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성경에 나오는 백부장처럼 신심이 깊은 사람이오.” <계속>

 

 


권은정 (유스티나 루이제, 작가, 전문 인터뷰어)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가톨릭평화신문 공동기획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6-08-12

관련뉴스

말씀사탕2026. 8. 12

필리 1장 11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