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두 시, 병실 보호자 의자에 앉아 있던 이는 결국 휴대폰을 켠다. 손가락이 떨리는 채로 오늘 있었던 일을 적어 내려간다. 몇 초 뒤, 화면에는 흠잡을 데 없이 다정한 문장들이 도착한다. “얼마나 힘드셨을지 짐작이 갑니다, 당신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문장은 매끄럽고 위로는 정확하다. 마음이 무너지는 순간, 사람보다 먼저 찾는 것이 화면인 시대다. 그런데 이상하다. 몇 번을 다시 읽어도 가슴 한편은 여전히 헛헛하다.
이 헛헛함에는 이유가 있다. 텍사스대학교, 하버드대학교, 토론토대학교, 히브리대학교 소속 연구자들이 함께 참여한 국제공동연구팀은 2026년 7월 발표한 논문에서 이른바 ‘인공지능(AI) 공감의 역설’을 정리했다. 낯선 사람에게 위로의 글을 받아 든 이들에게 그 글을 누가 썼는지 밝히지 않고 평가하게 하면, 사람들은 오히려 AI가 쓴 문장을 인간이 쓴 문장보다 더 공감적이라고 평가했다. 문장이 더 매끄럽고, 더 세심하며, 감정을 더 정확히 짚어냈기 때문이다.
이 결과는 의사나 위기 상담 훈련을 받은 상담원과 견주었을 때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 글이 AI가 쓴 것임을 알게 되는 순간, 평가는 곧바로 뒤집혔다. 같은 문장인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덜 공감적이라 느꼈다. 결정적으로, 실제로 누구의 위로를 받을지 고르게 했을 때는 더 뛰어나다고 스스로 평가했던 AI가 아니라 사람을 선택했다.
왜일까? 연구팀은 몇 가지 짐작되는 이유 가운데, 인간의 공감이 품이 드는 일이라는 점을 첫손에 꼽는다. 누군가의 아픔을 듣는 것은 내 마음의 일부를 내어 주는 일이다. 듣는 사람도 함께 무거워지고, 함께 잠 못 이루기도 한다. 인간의 위로는 그래서 한정되어 있다. 시간과 마음의 여력이 있어야 하고, 때로는 자신의 아픔마저 밀어두어야 가능하다.
AI는 이 무게를 지지 않는다. 슬픈 사연 뒤에 곧바로 다음 사용자의 즐거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AI는 아픔을 이해하고 적절한 언어로 옮길 수 있지만, 그 아픔을 자기 몸으로 나눠지지는 못한다. 공감이라는 말 그대로, 함께 느끼려면 느낄 몸과 시간과 대가가 있어야 한다. 인간의 위로가 서툴러도 뭉클한 이유는 정확한 문장 때문이 아니라, 그 말 뒤에 뜬눈으로 지새운 밤과 무거워진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곁에 있는 이가 아파하면 자신도 모르게 표정이 굳고 몸이 움츠러든다. 이유를 설명할 수 없어도 함께 아파하는 이 반응이야말로 오랜 세월 사람과 사람을 묶어온 끈이었다. 병자를 찾아가 손을 잡고, 상을 당한 이 곁에 말없이 앉아 있는 일이 그래서 의미가 있다. 정확한 위로의 말이 없어도,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위로이기 때문이다.
AI는 언제나 정확하고 지치지 않는 위로를 건넬 수 있다. 그러나 그 위로에는 대가가 없기에, 받는 이의 마음 깊은 곳까지는 가닿지 못한다. 진짜 위로는 나를 덜어 상대에게 건네는 데서 시작한다. 오늘 누군가의 아픔 앞에서, 당신은 정확한 말을 고르고 있었는가, 아니면 함께 아파하고 있었는가. AI가 공감한다? 그래도 인간만이, 아파한다.

글 _ 최홍규 안토니오(EBS 디지털교육기획부 연구위원, 미디어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