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2월 29일에 열린 전역식 행사장에 나란히 앉은 신치구 장군과 부인 백옥현(로사) 여사.
36년 군 생활 마치고 차관 지낸 뒤
공직서 완전히 물러나
교리신학원 청강생으로 2년 개근
꿈꾸던 공소회장의 길 좌절되자
번역·저술 작업하며 본당서 봉사
북한선교위원회 후원회장 맡아 활동
“연구소 만들어보라”는 신부 제안에
가톨릭 신앙생활연구소 설립 준비
신치구는 1987년 육군 중장으로 예편했다. 스무 살 청춘에 참전용사로 시작하여 36년간의 군 생활을 훌륭하게 마치고 군문을 떠나던 날 그는 개인적인 소회를 이렇게 밝혔다.
“임시장교로 시작했다가 점차 군인을 나의 천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하느님께서 주신 직업이라 생각하며 이 직을 소홀히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의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군을 위하고 나라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다. 돌이켜 생각해 볼 때 조금도 후회가 없고 오히려 나 자신이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예편과 동시에 그는 국방부 차관으로 취임하여 1년간을 봉직한 다음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차관직을 그만둘 무렵 그는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좋은 자리로 옮겨갈 수 있었다. 당시 여당의 국정 자문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으니 가만히 있어도 국영기업체 사장 자리 정도는 따 놓은 당상이었다. 그러나 그는 낙하산 인사로 얻게 되는 자리를 사양했다. 가까운 지인들조차 권유했지만 그의 대답은 단호했다.
“나는 평생 군인으로만 산 사람이다. 그 분야에 대해서 아는 게 없는데 어떻게 그 자리를 맡을 수 있는가. 마치 일반 회사원에게 군대 지휘를 맡기려는 것과 같다!”
사람들은 신앙인 신치구 장군의 진면목이 공직에서 물러난 이후에 더 확실히 드러났다고 말한다. 그는 그 전에 누렸던 지위와 영광에 일체 미련을 두지 않았다. 그는 보통의 겸손한 가톨릭 신자로서 오로지 주님을 섬기는 일을 하고자 했다.
신치구는 육군 교육사령관을 마지막으로 군을 떠났다. 1987년 12월, 신치구 장군을 위한 전역미사가 50여 명의 사제 공동집전으로 봉헌됐다.
자연인으로서 첫 번째 행보를 보더라도 그랬다. 차관직에서 물러난 바로 그날 오후 신치구는 피정센터 ‘수원 말씀의 집’에 단출한 짐가방을 내려놓았다. 그곳에서 열흘을 보내고, 이어서 ‘왜관 베네딕도 피정의 집’으로 옮겨가 근 한 달 동안 긴 피정의 시간을 보냈다. 그는 홀로 기도와 묵상의 시간을 가지면서 인생의 세 번째 단계,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의 일에 봉사하는 일을 설계하고자 한 것이다.
신치구 장군의 이어지는 행보는 빈틈이 없어 보였다. 피정을 마치는 대로 바로 혜화동의 교리신학원에 청강생으로 등록한 것이다. 앞으로 어떤 봉사활동을 하게 되든지 간에 먼저 성경과 교리에 대해서 공부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전 과목 청강생으로 2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수업에 출석했다. 1990년 말에 있었던 졸업식 때 그는 수료증도 받을 수 있었다.
사실 그는 교리신학원 공부를 마치는 대로 고향으로 내려가 공소회장으로 살고자 했었다. 예편 직후 그는 고향의 적당한 마을을 정해 집을 지었다. 25평짜리 집칸은 양쪽에 방을 두고 중간에 대청마루를 깔았다. 이웃들과 친교를 나누며 동네 사람들을 하느님 백성으로 인도하며 사는 삶을 꿈꾸었다. 사실 젊은 날 전방 시절부터 그의 집은 언제나 공소와 같았다. 단칸방의 가난한 군인 살림이었지만 가톨릭 공동체로서는 한없이 풍성한 곳이었다. 쌀이 몹시 귀하던 때, 주일마다 모이는 신학생 병사들과 군종신부들을 위해 세끼 밥상을 차리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신 장군의 부인 백옥현(로사, 89)씨는 그 시절이 천국 같았다고 말한다. 신 장군의 공소회장의 꿈은 김천 지역의 정치인이 그의 낙향을 극구 반대하고 나서면서 결국 이뤄지지 못했다.
1990년 12월 가톨릭 교리신학원 졸업사진. 맨 뒷줄 가운데가 신치구.
그 다음 그는 번역과 저술 작업을 시작했다. 신학생 병사 때부터 인연을 맺어온 양덕배 신부의 권유로 일본어판 「마리아의 복음」을 읽게 되면서 처음으로 번역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를 살아온 그에게 일본어는 낯설지 않았고 그는 평소 종교서적을 늘 탐독해 오던 터였다. 「성모의 생애」 번역 작업에 매달리고 있었는데 그 즈음 그의 모습은 매우 놀라운 변모였던 게 틀림없었다. 전철역에서 교정원고지를 들고 있던 그를 만난 옛 군대 동료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신형, 오랜만이오! 그런데 어찌 된 일이오?”
동료의 눈에는 낡은 가방을 둘러메고 운동화를 신은 신 장군의 차림이 무슨 사업에 실패한 사람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자기 사업체를 운영하던 옛 부하는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을 주시라고도 했다.
대부분 사람들의 눈에는 신 장군의 행동이 세상 물정에 어둡고 답답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세속적인 잣대에 흔들리지 않았고 초탈한 자세로 오로지 신앙생활에 충실하게 사는 삶에서 큰 만족을 느꼈다. 1991년에 나온 「성모의 생애」는 독자들의 호응을 받았고, 이어서 「나자렛의 요셉」의 역서도 출판했다. 그가 직접 지은 책으로는 「12사도의 생애」가 있다. 그는 살아가면서 예수님 가까이에 있던 인물들을 탐구해 보고자 하는 소망을 품게 되었다. 사랑하는 예수님을 좀 더 잘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온전히 신앙생활에 몰입하게 된 그는 당연히 본당 봉사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오랜 세월 교적을 두었던 가락동 본당에서 예비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쳤고 사목회 회장직을 맡았으며 성체분배자와 복사로도 활동하였다.
1992년 6월 명동대성당에서 북한선교위원회 ‘침묵의 교회’를 위한 바자회가 열렸다. 왼쪽부터 홍성철 전 장관, 함제도 신부, 신치구, 김수환 추기경, 이동호 아빠스, 영원한 도움의 수녀회 김영자 수녀.
또 이때 한국 주교회의의 상임위원회인 ‘북한선교위원회’ 후원회장직도 기꺼이 맡아서 일했다. 이제 그의 호칭은 ‘신 장군’에서 ‘신 회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평생 전방 너머로 바라보던 북한 지역 선교를 위해 일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위원회 활동을 하던 때 중국의 연길을 방문하기도 했는데, 길림성 장춘시 소팔가자 성당에 성 김대건 신부의 동상 건립을 위한 준비와 옛 함흥교구 소속 본당 실태를 파악하여 필요한 지원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때 만난 중국인 신부가 새벽녘에 신자들이 씻을 물을 준비해 주었는데 그곳 신자들은 이를 당연히 받아들이던 모습이 기억에 많이 남았다.
1991년 말, 당시 교리신학원장이던 유병일 신부가 신치구 회장에게 뜻밖의 제안을 했다.
“베르나르도 회장님, 교회를 위해 연구소를 하나 만들어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유 신부는 교회 내 연구기관들이 대부분 성서학이나 영성신학, 신심에 대한 연구에 치중하고 있으니 이와는 차별화된 연구소의 필요성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신자들의 신앙생활 상태를 확인하여, 이를 바탕으로 한국 교회 발전을 위한 비전을 제시하고, 국민 정서에 맞는 교회를 만드는 것이 연구소의 목적이 될 것이었다.
평신도가 선뜻 나서기에 어려워 보였지만 그것이 바로 포인트였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평신도가 먼저 세운 교회의 백성이야말로 교회의 중흥을 위해 나서는 데 가장 적격자일 수 있었다. 그날 밤부터 신 회장은 가톨릭 신앙생활연구소 설립을 위한 계획안의 틀을 잡기 시작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