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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재 털어 ‘신앙생활연구소’ 설립… 김수환 추기경 전집 18권 완간 결실

[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믿음에 충성한 백인대장, 신치구 베르나르도 장군 - (5·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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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월 서울 광화문 희명빌딩으로 이전한 가톨릭신앙생활연구소 개소식에서 김수환 추기경과 신치구 회장.
 

교회 통계 자료집 최초 발간 등

12년간 연구소 헌신 후 서울대교구 이관

전방 부대 시절부터 김 추기경과 인연

불모지였던 군종교구 발전 초석 놓아




1992년 5월 신치구 회장은 사재를 털어 가톨릭신앙생활연구소를 설립했다.

그에게는 따로 물려받은 재산도 없었고, 재산을 불릴 재주 또한 없었다. 주변의 지지와 격려가 큰 힘이 되었다. 그중에서 부인의 숨은 공로가 제일 클 것이다. 평생 박봉으로 살면서도 교회를 위해서는 월급의 반이라도 선뜻 내놓는 남편을 지지하고 남편이 하는 일은 무조건 따랐다. 신 회장은 그런 아내의 공을 드러내 놓고 칭찬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맏아들 신정환(토마스) 교수는 아버지께서 가장 많이 하신 말씀이 “쓸데없는 말을!”이라고 했다. 공치사나 자랑으로 들릴 말은 한마디도 입 밖에 내지 말라고 엄명했다고 한다. 신 장군이 꼿꼿한 삶을 살아온 바탕엔 가족의 한결같은 지지와 성원이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군인 가족은 이사가 유난히 잦은데, 신 장군 가족은 20번 정도 했다. 초등학교 시절 6번 전학을 했다는 맏아들 신 교수는 어렸을 적부터 이삿짐을 싸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누구보다 민첩하게 짐을 싸서 둘러메곤 했다고 한다.

신 장군 가족들의 군 경력도 화려하다. 장남은 육사 교관, 차남 신기수(클레멘스)는 특전사, 맏사위 방대춘(루카)은 군의관, 둘째 사위 김병태(미카엘)는 장군으로 예편하였다. 신 장군이 의자(義子) 관계를 맺은 홍관식도 군의관 출신이다. 손주들도 모두 육군 병장으로 전역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전방부대 근무지를 따라다닌 맏딸 신기랑(베르나데트)에게 사병식당이나 연병장 같은 공간은 낯설지 않다. 둘째 딸 신기선(루치아)의 출생지는 철원 최전방 지역이었다. 병사들의 훈련지인 산과 강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신 장군의 자녀들에게 군부대는 영원한 고향이기도 하다.

서울대교구에 연구소 설립 허가를 요청했을 때, 총대리 김옥균 주교는 ‘연구소 설립 허가는 신치구(베르나르도) 형제가 운영할 동안만 승인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그리고 개인적인 운영에는 어려움이 있을 테니 교구청 총대리 산하에서 운영비 지원을 받으면서 해보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권유했다. 그러나 신치구 회장은 고마운 제안을 거절했다.

“제도권 속에 있게 되면 연구 활동에 구속을 받기 마련이고, 서울대교구 산하에 있게 되면 타 교구와의 협조에 어려움이 예상됩니다. 아무래도 저 개인이 직접 운영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런 소신을 바탕으로 평신도의 힘으로 연구소가 설립되고 운영위원회와 연구위원회가 꾸려졌다. 연구소 운영에 가장 큰 힘이 되어준 이는 김수환 추기경이었다. 각 교구 주교들과 신부들, 많은 교우가 자문과 후원으로 도움을 주었다.

 
3군단장 관사를 방문한 김수환 추기경과 신치구 장군.


가톨릭신앙생활연구소는 한국 가톨릭교회의 정확한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 첫 사업으로 신자들의 신앙생활 실태조사에 착수했다. 전국 교구의 20에 해당하는 본당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 의미 있는 결과를 도출했다. 이를 바탕으로 최초의 천주교 통계 자료집을 발간해낼 수 있었다.

연구소는 전국의 신학대학을 순회하면서 학술토론회를 주관하고, 학술대회도 정기적으로 열었다. 격월간으로 회보를 발간하고 학술논문집을 간행하기도 하는 등 기존의 여러 교회 연구소와는 차별되는 활동을 왕성하게 펼쳤다. 그리고 총 20권에 달하는 신앙생활 총서를 발간하였는데, 이를 통해 연구소는 한국 교회 발전과 신자들의 실질적인 신앙생활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연구소 활동의 업적 중 신 회장이 가장 공을 들인 일은 「김수환 추기경 전집」 간행이었다. 신 장군은 김수환 추기경이야말로 한국 교회의 가장 큰 자산이라고 생각했다. 그분의 정신을 신자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하여 김 추기경의 강론과 저술, 어록을 집대성해 기록으로 남겨두는 일은 반드시 해야 할 사명이라고 여겼다. 개인적으로 그에게 김 추기경은 정신적 지주이자 친근한 말벗이었다.

그와 김 추기경의 인연은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6년 대구의 2군 사령부 감찰부 검열장교 시절, 가톨릭 시보(현 가톨릭신문) 사장이던 추기경을 만나게 되면서 두 사람은 오랜 세월 든든한 벗으로 지냈다. 5공화국 시절 김 추기경은 신 장군이 사단장·군단장으로 있던 최전방 부대를 자주 방문했다. 김 추기경은 당시 급박한 국내 정치 상황과 복잡한 문제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쉬고 싶을 때 그곳을 찾았다. 산사와 같은 산골 공관에 오면 평소 불면증으로 고생하던 추기경이 단잠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이 가장 반가운 일이었다.

김 추기경의 「참으로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1994년)부터 시작해,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등 총 18권으로 된 「김수환 추기경 전집」(2001년)은 추기경의 팔순을 기념해 완간됐다. 이 전집은 추기경 개인의 기록을 넘어 한국 천주교회의 귀중한 사료로 자리매김했다. 그해 한국 평협은 신 회장의 이 업적을 기려 가톨릭 대상(문화부문)을 수여했다.

 
2001년 6월 27일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에서 열린 「김수환 추기경 전집」 출판기념회. 맨 왼쪽이 신치구 가톨릭신앙생활연구소 회장이다.


신 회장은 사명감을 가지고 연구소에 전력투구하였지만, 건강 문제로 그 활동을 접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연구소는 12년간의 활동을 마치고 2004년 5월 서울대교구로 이관되었다.

세 번에 걸쳐 큰 수술을 치른 후 신 회장은 신앙 경험을 나누는 강의를 위해 국내외로 다니며 회고록 집필과 기도 생활에 전념했다. 신치구는 효성스러운 4남매와 사위들과 며느리 박채연(베로니카)과 주이진(루피나), 그리고 7명의 손주에게 신앙의 유산을 온전히 물려주고 2023년 2월 15일 91세를 일기로 하느님 품으로 돌아갔다. 신치구 장군은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그는 국가에 충성한 자랑스러운 군인이었고, 하느님에 대해 절대적인 믿음을 지킨 훌륭한 신앙인이었다. 신치구는 군인 신자의 길을 개척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가 군에서 첫 미사를 드리던 1950년대 당시, 군대 내 천주교는 거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오늘날 군종교구의 성당과 공소는 250여 곳에 이르고, 매년 새롭게 태어나는 군인 신자가 3만 명에 달한다. 군종교구 발전에 헌신한 그의 공로는 군종 역사와 함께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또 ‘가톨릭신앙생활연구소’를 통해 그가 이뤄낸 업적은 교회 발전을 위한 평신도의 역할에 대해 깊은 생각 거리를 제공한다.

우리 앞을 살다 간 신앙 선조들의 공덕은 그들만의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그 뒤를 따르는 후손들을 위한 ‘등경 위의 등불’(마르 4,21 참조)이 된다. ‘믿음의 백인대장 신치구 장군’의 행적은 우리 신자 모두가 걸어가는 길을 비추는 한 줄기 밝은 빛이 되었다. <끝>

 

권은정 (유스티나 루이제, 작가, 전문 인터뷰어)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가톨릭평화신문 공동기획

※지난 10개월 동안 연재해주신 필자들과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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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6-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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