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9월 2일
기획특집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가난한 교우들에게 땅 주고 배움 열어준 ‘새 삶의 터전’

[리길재 기자의 공소를 가다] 33. 전주교구 진안본당 한들공소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한들공소는 강당식 장방형 시멘트 벽돌 건물로 제단과 마주하는 출입구 위에 종탑과 십자가를 세워 놓았다.


전주교구 진안본당 한들공소는 전북 진안군 진안읍 중평길 4-6(연장리 1375-1)에 자리하고 있다. 너른 평야에 마을이 자리 잡아 대평(大坪)이라 쓰고, 순우리말로 ‘한들’이라 불렀다.

조선 왕조 치하 박해가 끝나고 신앙의 자유를 얻은 후 전라도 지역 선교는 파리외방전교회 조선대목구 선교사 블랑·리우빌·조조·로베르·보두네 신부가 사목하면서 교세를 확장했다. 1882~1911년 당시 오늘날 전라북도 지역에 있던 공소는 모두 473개였다. 박해를 피해 경기도와 충청도에서 이곳으로 숨어들어온 교우들 대부분은 가난했고, 높은 산 깊은 골짜기에 교우촌을 이루고 화전으로 연명했다.“


세상의 쾌락에서 멀리 떨어져서 그들의 초가를 내려다보는 높은 산으로 마치 울안의 땅에 갇혀있는 듯이 둘러싸여 기도와 밭일로 일생을 보내는 이들은, 세속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수도자들과 비슷하다. 이 황량하고 외딴 환경에도 불구하고 내 사랑하는 은둔소는 마음이 곧은 많은 사람이 모이는 장소가 되었으니, 그들은 진리와 하늘의 길을 찾아 이리로 온 것이다.”(한 선교사가 쓴 교우촌에 관한 보고, 서울교구 연보, 1878~1903년도 보고서, 138쪽)

이들 중 초대 전주본당(현 전동본당) 주임인 보두네 신부는 전주뿐 아니라 진안·용담·장수·남원·무주 지역을 관할했다. 제8대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는 신부 혼자 이 넓은 지역을 효율적으로 사목할 수 없다고 판단, 전주본당 관할에서 진안·장수·무주·남원 지역을 떼 1900년 9월 진안 어은동본당을 설립하고 초대 주임으로 김양홍(스테파노) 신부를 임명했다.

어은동본당은 설립 초기 여전히 전주본당 공소로 취급돼 보두네 신부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무엇보다 초대 주임으로 발령받았을 때 김양홍 신부는 사제품을 받은 지 1주일밖에 안 된 새 신부였다. 이러한 현실 속에 보두네 신부는 진안과 장수를 오가는 길목에 자리한 한들에 1901년 공소를 설립했다.

어은동본당이 설립될 때만 해도 주변 골짜기에 범이 들끓었다. 이러한 지리 환경 때문에 어은동이 본당으로서 크게 성장할 수 없다며 읍내로 본당을 옮겨야 한다는 교우들의 여론이 높았다.

 
전주교구 진안본당 한들공소는 1901년 설립돼 올해로 125년 된 유서 깊은 신앙 공동체다. 한들공소 전경.


성당 지을 터와 살림 밑천, 통째로 내놓다

1918년 제2대 어은동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이상화(바르톨로메오) 신부는 교우들의 뜻에 따라 본당을 옮기기에 마땅한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진안읍을 둘러보고, 박해를 경험한 신심 깊은 교우들이 많은 마령면 덕천리 장재동공소도 살펴봤다. 그러다 진안을 중심으로 전주와 장수를 오가는 딱 중간 지점에 있는 한들공소를 본당 자리로 낙점하고 초대 대구대목구장 드망즈 주교에게 보고했다. 드망즈 주교는 1922년 한들본당을 신설하고 어은동본당을 폐쇄, 한들 관할 공소로 개편했다.

이상화 신부가 본당을 어은동에서 한들로 옮긴 것은 단순히 교통 요지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들에 살던 박덕화(다미아노)씨가 이 신부를 데리고 성당 지을 터를 보여주면서 본당을 이곳으로 옮기면 이 땅을 기증하고 건축 자금도 대겠다고 약속했다.

박덕화씨는 블랑 신부를 도와 병인박해로 초토화된 전라도 교회를 재건하는 데 앞장섰던 박중현(안드레아) 회장의 손자이다. 강경에서 중국 상인들을 상대로 장사해 많은 돈을 벌었을 뿐 아니라 박해 때 몰수됐던 할아버지의 땅도 되돌려받아 큰 부를 쌓았다. 그는 옹기를 팔아 번 돈 전부를 길에서 만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준 할아버지의 성품을 닮아 본당을 옮길 때 어은동에서 한들로 이사 온 교우들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논밭을 사서 무상으로 나눠줬다.

이렇게 1922년 6월 한들본당 성당 터가 결정되자 바로 7월에 착공, 12월에 목조 7칸의 성당과 5칸의 사제관을 완공했다. 드망즈 주교가 1924년 10월 한들성당을 방문, 봉헌식을 주례했다.

 
한들공소는 1959년 지금의 시멘트 벽돌 건물로 다시 지어졌지만, 제대와 감실 등 성당 비치 성물들은 1922년 완공한 옛 목조 성당 때부터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들공소 제단.


글 모르던 아이들, 강습소에서 배움을 얻다

어은동에서 한들로 옮긴 본당은 크게 성장했다. 성체회·영신회 등 신심 단체가 조직되고, 주일 미사마다 성가대가 연주하는 서양 관현악기 소리를 듣기 위해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또 아동 교육을 위해 1933년 해성학교를 설립했고, 생활 형편이 어려워 학교에 가지 못한 지역 아동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는 강습소도 열었다.

한들본당은 1952년 진안본당이 신설되면서 폐쇄, 공소로 개편됐다. 1959년 7월 목조 건물이던 한들공소는 지금의 시멘트 벽돌 건물로 새로 지었다. 한들공소는 1977년 12월 31일 진안읍 마령·부귀·백운·성수면을 관할하는 본당으로 다시 승격됐다가 1985년 1월 폐쇄된 후 지금까지 진안본당 관할 공소로 이어오고 있다.


진안군 문화유산 된 125년 신앙의 못자리

한들공소는 2016년 12월 진안군 문화유산 유형 제11호로 지정됐을 만큼 진안 지역 가톨릭교회사와 향토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 신앙 못자리이다. 연장리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한 한들공소는 강당식 장방형 시멘트 벽돌 건물로 제단과 마주하는 출입구 위에 종탑과 십자가를 세워 놓았다.

공소 내부는 1959년 시멘트 벽돌 건물로 새로 지은 이후 여러 차례 보수 공사를 거치면서 예스러움을 찾아볼 수 없다. 바닥은 테라조 타일로 바뀌었고, 제단은 빨간 매트로 깔끔하게 마감돼 있다. 옛 제대는 분리돼 성찬례를 거행하던 제대는 제단 중앙에 자리하고 있고, 성체를 모셔두던 감실은 반원형 제단 벽면에 설치돼 있다. 그나마 옛 제대 원형을 상상해볼 수 있는 기본 틀이 어렴풋하게 남아 있어 다행이다. 제대와 감실, 십자가, 독서대, 촛대는 장식으로 봐서 아마도 본당 봉헌 때 갖추어 놓은 그대로인 듯하다.

더불어 제대 뒷벽을 장식하고 있는 예수 성심화와 성모 성심화, 그리고 십자가의 길 14처 성화 또한 마찬가지인 듯하다. 십자가의 길 14처 성화가 중국 상해 서가회 성 나자로 수도원 토산만 공예관에서 제작해 어은동공소에 설치해 놓은 14처와 똑같기 때문이다.

 
한들공소 교우들은 성모동굴을 짓기 위해 10년간 저축했다. 1935년에 지어 봉헌한 성모동굴.


10년 모은 쌈짓돈으로 지은 성모동굴

한들공소 성모동굴은 대구대교구청에 있는 루르드 성모 발현 동굴을 본떠 1935년에 지은 것이다. 이 성모동굴을 짓기 위해 제2대 주임 이상화 신부와 교우들이 10년간 저축을 했다.

한들공소는 가난한 이들에게 구원의 희망을 보여준, 올해로 설립 125년 된 유서 깊은 신앙 공동체다. 박중현 가문의 도움으로 성당이 지어졌고, 가난한 교우들이 논밭을 일구며 정착할 수 있었던 땅이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에게 무상으로 글을 가르쳐 배움의 길을 열어준 자리이다.

한들공소는 희망 없이 좌절하던 이들에게 십자가에 다가섬, 그리스도와 그의 신앙 공동체 안에 들어섬이 ‘새 삶’임을 100여 년간 증거해온 거룩한 집이다. 이곳을 드나드는 이가 많고 적음을 떠나 단 한 명이라도 구원의 희망을 얻어갈 수 있도록 이 거룩한 집을 잘 보존해 나가야 한다.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6-09-02

관련뉴스

말씀사탕2026. 9. 2

마르 12장 30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