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9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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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예수님과 같은 죄명으로 죽는구나’ 위로”

간첩 누명 쓰고 사형선고 받았던 재일동포 2세 이철(레미지오)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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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 옥살이 중 세례 받고 김수환 추기경에게 견진
교도관 통해 약혼녀와 교환한 묵주로 옥중 사랑 지켜
2015년 재심서 무죄 선고… 일본 이쿠노본당서 봉사





뿌리를 찾아 한국에 유학 온 재일동포 2세 청년은 결혼을 두 달여 앞두고 간첩 조작 사건에 휘말려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 그의 아버지는 대한민국계 재일동포 단체인 ‘재일본대한민국민단’ 히토요시지부장이자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자신이 간첩일 리 없다는 호소도 소용없었다. 약혼녀와 함께 서울구치소에 수감됐고,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됐다. 그렇게 13년 가까운 억울한 옥살이가 시작됐다.

언제라도 사형이 집행돼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암담한 세월, 그를 지탱한 힘은 신앙이었다. 그 과정에는 그를 신앙적으로 또 삶의 순간에서 큰 도움을 준 김수환 추기경과 주님께서 보내주신 신자들이 있었다. 재일한국양심수동우회 회장이자 오사카-다카마쓰대교구 이쿠노본당 사목회장을 지낸 이철(레미지오, 77)씨 이야기다.

올해는 이씨가 1976년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뒤 옥중에서 가톨릭 신자로 다시 태어난 지 꼭 50년 되는 해다. 지난 8월 14일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에서 봉헌된 유경촌 주교 선종 1주기 추모미사에서 그를 만나 지난 삶과 신앙 여정을 들었다.

 


“제가 대학생이던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 일본은 학생운동이 아주 활발했어요. 마르크스나 레닌·마오쩌둥·김일성 관련 서적도 자유롭게 읽었죠. 그런데 재일동포 학생들이 일본에서 그런 책을 읽고 학생운동에 관심을 가졌던 것까지 한국에 오면 죄다 반공법에 걸리는 거예요. 정권이 필요할 때 언제든 잡아올려 사건으로 만들 수 있는 ‘어항 안의 붕어’ 같은 존재였죠.”

1975년 겨울 새벽, 고려대학교에서 유학하던 그는 서울 안암동 하숙집에서 갑자기 중앙정보부 요원에게 체포됐다. 하숙집 딸이자 약혼녀였던 민향숙(마리아)씨도 붙들렸고, 두 사람은 서울구치소(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 갇혔다. 간첩으로 몰린 데 이어 하루아침에 사형수가 돼버린 이씨를 가장 자주 면회하며 빨래를 해주고 영치금까지 챙겨준 이는 예비 장모 조만조(체칠리아, 2005년 선종)씨였다. 그의 억울함을 굳게 믿은 조씨는 늘 “하느님께서 도와주신다”며 기도를 당부했다. 그 정성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고자 이씨는 세례를 받기로 했다.

“솔직히 처음에는 장모님을 생각해서 믿는 척했어요. 세례를 받고 이듬해 옥중 견진성사 때 마침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주례해주셨는데, 그때 해주신 말씀이 큰 전환점이 됐습니다. 추기경님은 ‘용기를 내어라. 2000년 전 예수님께서도 그 당시로 치면 국가보안법 같은 죄로 사형을 당하셨다’고 하셨죠. 그때 ‘나도 예수님과 같은 죄명으로 죽는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예수님이 무척 가깝게 느껴지고 큰 위로가 됐어요.”

 


하루에 많게는 6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현실을 보며 ‘다음은 내가 될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머리를 맴도는 나날이었다. 미사와 묵주 기도로 마음을 다스리던 그에게 유독 친절하게 대해주는 이가 있었다. 당시 서울구치소의 가톨릭 담당 교도관이자 세례 대부였던 작사가 김지평(요한 사도)씨였다. 서울구치소 여자사동에 수감돼 있던 약혼녀 민씨가 3년 6개월형을 확정받고 광주교도소로 이감되기 전날, 교도관 김씨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하려 했다. 하지만 보안과장은 이씨를 ‘빨갱이’라고 몰아붙이며 만남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김씨는 두 사람 사이에 기념할 만한 물건이라도 대신 전해주겠다고 나섰다.

“제가 가진 게 묵주뿐이라 그걸 드렸죠. 그분이 가져가더니 이번에는 마리아가 쓰던 묵주를 제게 가져왔어요. 그 뒤로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상대방의 묵주로 기도하며 수감생활을 견뎠죠. 제가 출소할 때까지 서로 그 묵주를 간직했는데, 지금은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내 재일동포 양심수 전시실에 전시돼 있어요.”

이씨는 한국을 찾을 때마다 전시실에서 관람객들에게 자신의 수감생활을 직접 들려주기도 한다. 특히 학생들을 만나면 자신을 “이 형무소에서 살았던 할아버지”라고 친근하게 소개하며 그 시대를 증언하고 있다.

1988년 10월 3일 마침내 그는 감형을 거쳐 출소했다. 그리고 그달 28일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민씨와 13년 늦은 혼인을 했다. 주례자는 김 추기경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부부가 일본으로 돌아간 뒤에는 여권을 발급받지 못해 한국 땅을 밟지 못했다. 그러던 중 이쿠노성당에서 이씨 부부를 우연히 다시 만난 김 추기경이 귀국 후 국가안전기획부에 여권을 발급하지 않는 이유를 대신 따져 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씨는 여권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그리고 2001년 천주교인권위원회 초청으로 출소 13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았다. 2015년 재심에서는 마침내 무죄를 선고받았다.

옥중에서 얻은 신앙으로 고난의 세월을 견뎌낸 이씨는 지금도 열심한 신자다. 일본인과 재일동포, 베트남 이주민 등 다양한 민족이 어우러진 이쿠노본당에서 오랫동안 여러 직책을 맡아 공동체를 위해 봉사해왔다. 그는 그렇게 고난 속에서 자신이 받았던 위로와 사랑을 이제 또 다른 이웃에게 건네며 살고 있다.

이학주 기자 goldenmouth@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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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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