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거래 통해 순환 경제 배우는 유럽
중고시장 통해 소비 습관 되돌아 보기도
한국은 공공기반 부족으로 체험 어려워
송미혜씨 아들 로이가 다른 친구들에게 보낼 장난감을 고르고 있다.
아이의 성장은 빠르다. 몇 달 전 꼭 필요했던 물건이 어느새 쓸모를 잃고, 작아진 옷과 손이 가지 않는 장난감이 집에 남는다. 다시 필요한 물건이 생기면 부모는 또 선택해야 한다. 새것을 살지, 다른 아이가 쓰던 것을 들일지, 빌려 쓸지.
중고거래가 일상 깊숙이 들어왔고, 장난감을 빌려 쓰는 곳도 늘었다. 하지만 물건을 다시 쓴다는 것은 값싼 육아용품을 구하는 문제만이 아니다. 이미 가진 물건을 어떻게 내보낼지, 남이 쓰던 물건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그 과정에서 아이는 무엇을 경험하는지가 함께 걸려 있다.
cpbc가톨릭평화방송·평화신문은 6~8월 3개월간 국내와 독일·네덜란드의 가정과 재사용 현장을 오가며 ‘새것이 아닌 육아’가 일상에서 어떻게 이뤄지는지 들여다봤다. 중고거래와 대여부터 벼룩시장과 이웃 간 나눔까지, 방식은 저마다 달랐다. 그 안에는 물건을 덜 사는 것으로만 설명되지 않는 부모와 아이들의 이야기가 있었다.
장난감이 남긴 자리
로이(3)·로아(1) 두 아이의 엄마 송미혜(37)씨 집. 거실과 창가 선반, 베란다 곳곳에 아이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가득했다. 손이 가지 않는 장난감도 그대로 남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송씨는 “실제로 가지고 노는 건 30가 채 안 된다”고 했다.
엄마는 장난감을 줄여보기로 했다. 부모가 고르고 버리는 대신, 아이와 함께 남길 것과 다른 아이에게 보낼 것을 나눴다. 처음에는 장난감과 헤어지기 싫어하던 로이가 친구에게 보내준다는 말에 하나씩 골라내기 시작했다. 정리를 이어가던 로이가 남은 장난감을 보며 말했다. “이거 다 줘도 돼.”
로이는 보내기로 한 장난감에 인사를 건넸다. 정리를 마치자 장난감이 있던 자리가 비었다. 훤해진 거실에서 로이는 그림을 그리며 놀았다. “아이는 준비가 됐는데 제가 안 돼서 그동안 못 버리고 있었나 봐요.”
첫째를 키우며 물건을 사고, 쌓고, 다시 정리하는 과정을 겪은 뒤 둘째때는 달라졌다. 필요한 물건을 미리 사두지 않기로 했다. “필요할 때 중고로 거래하든 물려받든 하면 되더라고요.”
뮌헨 벼룩시장 ‘플로막’에서 박슬기씨 아들 필립과 딸 아리아드네(오른쪽)가 자신의 중고 장난감을 팔고 있다.
내 장난감은 50센트
지난 7월 4일 독일 뮌헨의 벼룩시장 ‘플로막(Flohmarkt)’ 현장. 판매대와 돗자리 위에 옷과 책, 장난감이 놓였다. 부모와 함께 나온 아이들이 물건 사이를 오갔다.
뮌헨에서 10년째 사는 박슬기(39)씨 가족도 이곳을 찾았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봄·가을이면 한 달가량 주말마다 플로막을 찾아다녔다. 시장에 가기 전에는 필요한 것과 사고 싶은 것을 구분하고 예산을 정한다. 아이들은 팔 장난감을 골랐다.
아들 필립(9)은 이날 내놓을 장난감에 값을 매겼다. “50센트, 20센트⋯.”
손님이 오자 자신이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설명하고 돈도 직접 받았다. 이날 번 돈은 20유로. 이 돈으로 축구카드를 산단다. 딸 아리아드네(5)는 다른 판매대를 둘러보다 3유로를 내고 작은 유니콘 인형 두 개를 골랐다.
박씨는 아이들과 플로막에 다니는 이유로 소비 습관을 꼽았다. “직접 필요한 곳에 돈을 쓰고, 오래 쓸 물건을 고르는 거죠. 쓰레기를 줄이는 생활도 알려줄 수 있고요. 학교에서도 아이들이 직접 물건을 사고파는 벼룩시장이 열려요.”
새 물건을 사지 않고도 충분히 아이를 키울 수 있느냐고 묻자 박씨는 곧바로 답했다. “당연하죠.”
직접 사고팔아 본 아이들
한국에도 새 제품을 사지 않고 육아용품을 마련할 통로는 이미 넓게 열려 있다. 중앙육아종합지원센터에 따르면 장난감·도서대여 서비스를 운영하는 육아종합지원센터는 2016년 82곳에서 2025년 128곳으로 늘었다. 분소 등을 포함한 사업장은 같은 기간 162곳에서 310곳으로 늘었다. 2025년 한 해 장난감 대여만 약 295만 건에 달했다. 온라인 중고거래까지 더하면 선택지는 더 많아진다.
뮌헨 플로막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아이들이 직접 물건을 사고판다는 점이다. 이런 경험이 아이의 소비 태도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살펴본 연구도 있다. 스페인 카스티야라만차대학교 연구진은 두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중고 의류시장을 운영하도록 했다. 한 학교에서는 돈으로 옷을 사고팔았고, 다른 학교에서는 물물교환을 했다.
시장 운영에 참여한 학생 중 40명을 조사한 결과, 학생들은 의류 소비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배우고 자신의 소비 습관을 돌아보게 됐다고 답했다. 중고 의류를 향한 부정적 인식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는 반응도 나왔다. 연구진은 중고시장이 지속가능한 선택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행동 변화를 이끄는 교육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레오니 카위퍼르스씨 아들 닉이 ‘클로딩 루프’에 입지 않는 옷을 담고 있다.
이웃집을 도는 옷가방
6월 29일 찾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는 이웃끼리 옷을 나누는 ‘클로딩 루프(Clothing Loop)’가 일상이었다. 옷이 든 가방을 이웃끼리 차례로 전달하는 방식이다. 필요한 옷은 꺼내고 필요 없어진 옷을 넣은 뒤 다음 집으로 보낸다. 코로나19로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옷을 바꾸기 어려워지면서 시작됐다.
레오니 카위퍼르스씨는 세 아이와 함께 클로딩 루프에 6년째 참여하고 있다. 그가 속한 루프에는 51가구가 연결돼 있다. 가방이 집에 도착하면 아이들도 함께 옷을 살펴본다. 마음에 드는 것은 고르고, 작아졌거나 입지 않는 자신의 옷은 내놓는다.
“아이들이 무언가를 나눠주는 것도, 가방에서 직접 고르는 것도 아주 좋아해요.”
클로딩 루프에는 가격표가 없다. 집에 도착한 가방을 열어 필요한 옷을 꺼내고, 자신의 옷을 채워 다음 집으로 가져가면 되는 단순한 방식이다.
창립자 니숑 홀레륑씨는 “지금 세상에 있는 옷만으로도 앞으로 여섯 세대를 입힐 수 있을 만큼 충분하다는 연구 결과를 봤다”고 했다.
“진정한 지속가능성은 완벽하게 해내는 소수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실천하는 아주 많은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클로딩 루프는 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어요.”
트루 장난감 바자회에서 중고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
아이를 위한 공공시설, 우리 동네에 있다면
도시계획을 중심으로 아동·청년의 사회 참여를 연구하는 네덜란드 흐로닝언대학교 조교수 외즐렘누르 아타올 박사는 7월 1일 cpbc와의 인터뷰에서 한국과 유럽의 육아 방식 차이를 부모 개인의 능력이나 성향에서만 찾아서는 안 된다고 봤다. 아이가 놀면서 다른 사람과 관계 맺을 수 있는 공간, 부모가 안심하고 아이를 내보낼 수 있는 환경 같은 일상의 조건이 가족의 행동을 좌우한다는 것이다.
아이를 위해 무엇을 살지 결정하는 일은 부모 개인의 선택처럼 보이지만, 주변 환경도 떨어져 있지 않다. 아이가 놀고 어울릴 공간이 부족하면 부모는 돈을 내고 이용하는 공간이나 물건에 기대기 쉬워진다. 반대로 물건을 빌리고 나누거나 이웃과 바꿀 기회가 가까이 있다면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
아타올 박사는 “쇼핑센터처럼 부모의 구매력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공간과 달리, 아이에게는 소비하지 않고도 머물고 활동하며 다른 사람과 관계 맺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순환의 문화와 경제’를 둘러싼 새로운 교육과 탐색도 필요하다고 했다.
“공공도서관과 어린이 공간, 부모와 아이가 함께 참여하는 행사처럼 일상에서 이용할 기반이 동네에 있다면, 아이의 성장 과정은 분명히 달라질 겁니다.”
나눠 쓰는 연습
국내에도 이런 가치를 전하려는 곳들이 있다. 6월 마지막 주일 경기도 고양시 사단법인 ‘트루’의 장난감 재사용 바자회. 아이들은 진열대 앞에 쪼그려 앉아 장난감을 하나씩 살폈다. 바닥에 앉아 기차를 굴려보는 아이도 있었다. 마음에 드는 장난감을 고르면 부모와 함께 살펴본 뒤 바구니에 담았다.
박준성 트루 이사장은 아이가 쓰던 장난감을 다른 아이와 나누는 경험을 “나눠 쓸 줄 아는 훈련”이라고 표현했다.
박 이사장은 “버리기 전 아이와 물건에 관해 이야기하고, 다른 아이가 다시 쓸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과정이 중요하다”며 “장난감 재사용 바자회도 단순히 중고 장난감을 싸게 파는 행사가 아니라, 이런 경험이 하나의 ‘문화’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국내 재사용 기반은 대여와 중고거래를 중심으로 커져 왔다. 반면 아이가 직접 자신이 쓰던 물건을 내놓고 남에게 건네거나 바꾸는 활동은 주변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트루 장난감 바자에도 차로 1시간 넘게 온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독일에서 아이들과 플로막을 다니며 중고품을 사고팔아 온 박슬기씨에게 한국으로 돌아가서도 지금의 생활방식을 이어갈 수 있을지 물었다.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제가 태어나고 자란 나라를 사랑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남의 시선을 중요하게 여기잖아요. 결국 트렌드를 따라가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