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길재 기자의 공소를 가다] 34. 전주교구 진안본당 봉암공소

전주교구 진안본당 봉암공소는 올해로 설립 141주년이 되는 유서 깊은 공소이다. 봉암공소 전경.
전주교구 진안본당 봉암공소는 전북 진안군 부귀면 부귀로 86-14 봉암리 원봉암 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마을 이름이 봉암(鳳岩)으로 불리는 데는 두 유래가 있다. 약 400여 년 전 봉황이 이 마을 한 바위에서 나와 그때부터 봉암 마을이라 했다는 것이다. 봉황이 나왔다는 바위는 오늘날 흔적조차 없다. 다른 하나는 마을 뒤편에 마치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세의 봉란산(鳳卵山)이 자리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봉암 마을의 옛 이름은 ‘미실’이었다. 해발 1126m 운장산 어귀에 자리한 고랭지 마을로 쌀이 많이 나서 불린 이름이다. 지금도 봉암 저수지 농업용수로 주민 대부분이 벼농사뿐 아니라 풍부한 농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공소 입구 옆 마당에 모신 성모상.
봉암공소는 오래된 교우촌이다. 진안 지역에 그리스도인들이 본격적으로 교우촌들을 이루고 산 것은 1866년 병인박해 이후다. 대부분 전라도 고산에 살던 교우들이 진안의 깊은 산골로 숨어들었다. 하지만 한국 천주교회사 기록에 따르면 1801년 신유박해 이전부터 충청도 금산과 용담, 내포 지방 교우들이 진안 지역으로 이주해와 살았고, 그들 중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덕산, 전주 숲정이, 여산, 나주 무학당 등지에서 순교했다.

봉암공소는 ‘일치와 성덕’을 지향으로 교우들이 매일 기도로 살아가는 모범적인 공소이다. 봉암공소 내부.
교우 30명 미실공소, 10년 새 교우 8배로
봉암공소는 조선대목구 소속 파리외방전교회 교황 파견 선교사 리우빌(Liouville, 한국명 유달영, 1855~1893) 신부가 1885년에 설립했다. 당시는 ‘미실공소’라 불렀다. 미실공소 설립 당시 교우 수는 30명에 불과했으나 10년 후인 1896년에는 232명으로 크게 성장했다.
리우빌 신부는 1874년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해 1878년 사제품을 받고 교황 파견 조선 선교사로 임명됐다. 그는 제6대 조선대목구장 리델 주교가 체포돼 옥에 갇히는 바람에 조선에 입국하지 못하고 만주대목구에 2년간 머물면서 우리말과 글, 그리고 한자를 익혔다. 그런 다음 1880년 두 차례 시도 끝에 그해 11월 조선 입국에 성공해 황해도와 서울, 충청도에서 사목했다. 그는 1884년 제7대 조선대목구장 주교로 블랑 신부가 임명되자 주교의 옛 임지를 맡아 6년간 전라도 지역을 사목했다. 이후 서울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교수로 사제 양성에 헌신하다 1893년 4월 장염으로 인한 복막염으로 선종했다.
봉암공소가 10년 사이 8배 가까이 교세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교우들의 열심함 때문이었다. 그들은 조선 왕조 치하에서 박해를 경험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철저히 기도 생활을 했고, 진실하게 살았다. 누구에게도 편파적이지 않았고, 마을의 가난한 사람을 돌보며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신심 깊고 열심한 봉암공소 교우들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박해를 피해 봉암에 정착해 교우촌을 이루었던 그분들의 많은 후손이 아직도 공소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바쁜 농사철에도 제일 먼저 공소를 찾아와 기도로 하루를 시작한다. 봉암공소 교우들의 기도 지향은 ‘일치와 성덕’이다. 이제 나이가 지긋해진 교우 모두가 하나 되고 하느님 앞에 부끄럼 없는 성덕을 키워가게 해달라고 나날이 기도하고 있다.

봉암공소는 ‘일치와 성덕’을 지향으로 교우들이 매일 기도로 살아가는 모범적인 공소다. 지금의 봉암공소는 공소 설립 100주년을 맞아 공소 교우들과 옛 본당과 지금의 본당 교우들의 도움으로 지어졌다. 봉암공소 제대.
경운기 10대 몰고 와 새 공소 건립 힘 보태
지금의 봉암공소 건물은 공소 설립 100주년을 기념해 1985년 9월 12일 봉헌했다. 그해 관할 본당인 한들본당이 폐쇄돼 진안본당 공소로 개편됨에 따라 공소 신축 계획이 무산될 위기에 처했었다. 그런데 한들공소 청년들이 공소를 짓는데 돈을 보태진 못해도 힘은 보태겠다며 봉암공소를 찾아왔다. 이들은 공소 터를 파고 경운기 10대를 동원해 한들에서 모래 자갈을 싣고 왔다. 봉암공소 교우들이 급하게 시멘트를 구해 그날 기초공사를 마무리했다. 이렇게 66.12㎡(20평) 규모의 공소 건물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공소 교우 중 건축일 경험이 있던 몇몇이 나서 벽돌을 쌓고 미장을 했다. 그렇게 공소와 사제방이 있는 집이 번듯하게 세워졌다. 제대와 십자가, 성상, 십자가의 길 14처 등은 진안본당이 지원해 공사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이렇게 봉암공소는 공소 교우들과 옛 본당과 현 본당의 교우들이 힘을 합쳐 지은 하느님과 그 백성의 집이다.
봉암공소 교우들은 새 공소 건립과 함께 레지오 마리애 ‘샛별의 모후’ 쁘레시디움을 창단하고 가톨릭 농민회 활동도 시작했다. 지금은 진안본당 관할 공소 가운데 이 두 활동을 가장 활발히 하는 공소가 됐다. 16명 레지오 단원 가운데 8명이 성경을 완독했고, 그 절반이 완필했다. 또 이들 모두 매일 평균 묵주 기도 300단을 하고 있다.

어은동공소와 한들공소의 십자가의 길 14처 성화와 똑 닮은 봉암공소 14처 성화들이 유서 깊은 공소의 흔적을 잘 보여준다.
신심 깊은 교우들의 기도 체험 풍성
기도를 통한 체험도 크다. 봉암공소 교우들이 몇몇 기도 체험을 자랑했다. 교통사고로 다리를 절단해야 했는데 교우들의 기도로 절단 없이 완치되었고, 한 교우가 대학병원에서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받고 장례 준비를 해 놓았는데 공소에서 끊임없이 기도해 완치됐다고 한다.
봉암공소는 봉암 마을 주택가 안에 있다. 여느 옛날 시골집처럼 벽돌 집에 시멘트로 마감해 놓았다. 건물 안팎이 모두 흰색으로 칠해져 깔끔하다. 공소 입구 옆 마당에 성모상을 마련하고 아담한 정원을 꾸며놓았다.
공소 내부는 단출하다. 입구 왼편 벽면에 긴 책상 하나를 두고 그 양쪽에 의자를 놓아뒀다. 여기서 교우들이 기도하고 레지오 회합을 한다. 친교 모임도 갖는다. 책상 뒤편 중앙에 나무 제대가 있다. 정갈한 흰색 제대포 위에 예수 성심상과 성모상, 촛대가 놓여 있다. 그 뒤로 십자가가, 양쪽 벽면에 십자가의 길 14처 성화가 설치돼 있다. 십자가의 길 14처 성화는 어은동과 한들공소의 그것과 똑 닮았다.
올해로 공소 설립 141주년이 된 봉암공소는 여전히 ‘일치와 성덕’의 모범을 보여주는 유서 깊은 공소다.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