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 치하 100년 박해기 1만여 명의 순교자 가운데 80 이상이 무명 순교자이다. 그들 대부분은 노인·여자·어린이·천민 등 사회 약자로 생매장 등 가장 비참한 죽임을 당했다. 사진은 해미 국제 성지 생매장터에서 발굴한 무명 순교자들 유해.
조선 순교자 1만여 명 중 1800여 명 신원 확인… 80 이상은 무명
무명 순교자 대부분 사회적 약자·법 보호 밖 무자비하게 형벌 자행
순교자들, 한양 포도청·해미·여산 숲정이 등에서 비참한 죽음 당해
한국 가톨릭교회가 1784년 늦가을 한양 수표교 이벽의 집에서 거행된 첫 세례식을 통해 복음의 씨앗을 내린 후 1874년 12월 흥선대원군이 실각해 병인박해가 끝날 때까지 약 100년간 조선 왕조 치하에서 박해를 받았다.
가톨릭교회가 이 땅에서 본격적으로 박해받기 시작한 것은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운 진산 사건으로 일어난 1791년 신해박해 때부터다. 이 박해로 첫 순교자가 탄생했다. 바로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이다. 동시에 배교자도 배출했다. 당시 가톨릭 신앙 공동체를 이끌던 최필공(토마스)·최필제(베드로)·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 등이 배교하고 석방됐다. 이처럼 신해박해는 순교자뿐 아니라 배교자를 배출한 첫 번째 박해였다.
한국 가톨릭교회는 조선 왕조 치하 100년 박해기 동안 약 1만 명이 순교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 추정의 근거는 달레 신부가 저술한 「한국천주교회사」에 있다. 이 책이 병인박해 순교자를 8000여 명으로 기록해 이전 신유·기해·병오박해 순교자들을 고려하면 조선 왕조 치하 순교자가 대략 1만 명에 이를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더불어 제8대 조선대목구장 뮈텔 대주교도 파리외방전교회에 보내는 1900년 보고서에 “1866년 병인박해 이전 조선 교회 신자 수는 약 2만 5000여 명이었고 박해로 인한 순교자는 1만 명으로 추산한다”고 밝혔다.
조선 왕조 치하 100년의 박해기에 순교한 1만여 명의 순교자 가운데 이름이 밝혀져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이가 대략 1800명 정도다. 나머지는 모두 ‘무명 순교자’다.
9월 순교자 성월 특집 ‘신앙의 영광’ 마지막 편은 이들 무명 순교자에 관한 이야기다.
신앙 위해 목숨 내놓은 무명 순교자들
조선 왕조 치하 박해기 1만여 명 순교자 가운데 80 이상이 ‘무명 순교자’다. 어디서 어떻게 순교했는지 세세히 알 수 없을뿐더러 이름도, 성도, 나이도 모른다. 103위 순교 성인들처럼, 124위 복자와 같이, 하느님의 종 133위처럼 시복 시성 대상자가 되어 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무명의 순교자들은 하느님을 고백하기 위해 기꺼이 제 목숨을 내놓은 증거자들로서 한국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모범으로 공경받고 현양되고 있다.
순교자는 신앙을 위해 기꺼이 자기 목숨을 내놓은 사람이다. 순교자의 어원은 헬라어 ‘μάρτυς’(마르투스)이다. 우리말로 ‘증거자’ ‘목격자’를 뜻한다.
가톨릭교회에서 순교자로 인정받기 위해선 다음의 세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첫째, 실제로 죽음을 당해야 한다. 둘째, 그 죽음이 그리스도교 신앙과 진리를 증오하는 자에 의해 초래돼야 한다. 셋째, 그 죽음을 그리스도교 신앙과 진리를 옹호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조선 왕조 치하 박해기에 순교한 1만여 명의 순교자들은 이 세 조건을 충족시킨 이들이다. 비록 배교를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형장으로 끌려가 목숨을 잃은 이들도 죽음 순간 통회했을 것이다.
1839년 기해박해 순교자 신태보(베드로) 복자가 문초를 받을 때 나눈 관장과의 대화는 우리 순교자들이 얼마나 굳센 믿음으로 주님을 증거했는지 잘 보여준다. “관장이 ‘네가 말한 대로라면 천주교에는 그릇됨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지금 임금이 금하고 있느니, 그러면 임금이 잘못한 것이냐?’ 물으니 신태보는 ‘진리를 최종적으로 확인하기까지 임금이 금하는 것은 정당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먼저 깨달은 사람이 그것을 포기하는 것은 결코 정당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저는 정당합니다. 나라님이 이 진리를 알기 전에 백성들이 먼저 알고 그것을 실천할 수도 있는데 바로 지금 우리나라에서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신태보 약전 중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민초들, 비참하게 순교
조선 왕조 치하 박해기 무명 순교자들은 신분이 낮은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노인·여자·어린이·평민·천민이었다. 대다수가 가난하고 힘없는 민초였기에 그 어떤 형법 조항으로부터도 보호받지 못했다. 특히 1866년 병인박해 당시 그리스도인에 대한 무자비한 형벌이 가해졌고 불법 남형이 횡행했다. 관리들은 ‘선참후계’(先斬後戒 - 먼저 목을 베어 처벌한 뒤에 경계하는 규율로 엄하게 다스린다)라는 명목 아래 그리스도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였다.
무명 순교자들은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가장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조선 왕조 치하 박해기 한양 포도청에서 순교한 794위 순교자 대부분이 교수형을 당하거나 매 맞아 죽었다. 이들 순교자 대부분은 시신을 내보내던 광희문을 통해 신당리 공동묘지에 버려졌다.
매 맞아 죽는 것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병인박해 때 해미에서는 충청도 각지에서 끌려온 그리스도인들을 빠르게 처형하기 위해 깊은 구덩이를 파고 한꺼번에 생매장했다. 이것도 모자라 교우들의 팔을 묶어 진둠벙이라는 웅덩이에 산채로 수장시켰다. 또 너른 바위에 그리스도인들을 자리개질 하듯 메다꽂아 머리를 박살 내 죽였다. 그리고 여러 명을 눕혀놓고 돌기둥을 떨어뜨려 한꺼번에 죽이기도 했다. 혹여 아직 숨이 붙어있는 이가 있으면 군졸들이 횃불로 눈을 지져 마지막 숨통을 끊었다. 이처럼 잔혹하게 죽임을 당한 해미의 무명 순교자가 1000명이 넘는다고 한다.
여산 숲정이에서는 고산·금산·진산 등지에서 잡혀 온 그리스도인들을 결박한 채 얼굴에 물을 흠뻑 먹은 백지를 올려놓아 질식사시켰다.
20세기 들어 발굴한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에서는 머리가 없는 유해가 대부분이었다. 참수된 이들도 있지만, 대다수가 머리가 으깨져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체포를 피해 죽음을 면한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무명 순교자들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들은 무명 순교자들의 시신을 직접 수습해 안장하고, 무덤 주인이 순교자임을 표시하기 위해 십자가나 묵주를 함께 넣었다. 신리와 청양 줄무덤, 성거산, 배티, 손골 등이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이 있는 성지다.
기록 없는 순교자들도 신앙 모범으로 현양
무명 순교자들은 신앙을 위해 제 목숨을 서슴없이 바칠 수 있는 용덕(勇德)만 갖춘 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였고, 교회 서적을 읽거나 교리 공부를 충실히 한 이들이었다. 그리고 미사를 비롯한 성사를 경험한 이들이었고,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성실히 한 그리스도인이었다. 이를 뒷받침하듯 정하상(바오로) 성인은 「상재상서」에서 “목숨을 바쳐 순교함으로써 거룩한 가톨릭교회가 진실된 가르침임을 증명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우리의 본분”이라며 “가톨릭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고 증언했다.
무명 순교자들은 기록이 없다 해서 잊힐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박해자 앞에서 신앙을 증언한 후 순교하는 것을 최고의 신앙 고백으로 받아들였다. 이처럼 주님에 대한 믿음 하나로 목숨을 던진 무명 순교자들은 하느님을 따르는 신앙인에게 훌륭한 모범이다.
무명 순교자들은 한국 교회에서 가장 가난한 순교자들이요, 가장 비참한 죽음을 맞은 순교자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기쁜 얼굴로 죽음을 맞이했다”는 목격자들의 증언처럼 삶을 영광스럽고 거룩하게 마감한 참 신앙인이다. 무명 순교자들은 땅에선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평범한 이웃 같은 존재이지만 천상에선 하느님 안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이름을 새긴 참 그리스도인들이다.
신앙을 대물림해준 모든 무명 순교자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현양하고 살아가는 것이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의 도리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