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교구 진안본당 장재동공소는 박해 시기 옹기점 교우촌이었다. 1964년 새로 지어진 장재동공소 전경.
전주교구 진안본당 장재동공소는 전북 진안군 마령면 추장길 146-4(덕천리 1358)에 자리하고 있다. 마령(馬靈)은 고려 때 마이산에서 신마(神馬)가 나타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진안군 남서부에 위치한 마령면은 동남으로는 백운면, 서남으로는 성수면, 북으로는 부귀면과 접하고 있다. 만덕산 서북 골짜기에서 발원한 덕천이 추동과 장재동, 대동을 적시고 신덕 마을을 휘돌아 신정천과 합수해 이 일대를 덕천리라 했다. 이처럼 덕천리에는 장재동, 추동, 놋점이, 내동 등 여러 부락이 있는데, 그중 유일하게 장재동만이 조선 왕조 치하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숨어들어온 그리스도인들이 교우촌을 이루어 살던 마을이다.
1918년 봉헌됐을 때 축성된 것으로 보이는 옛 제대.
십자가와 비둘기 새긴 옹기, 믿음의 표식
장재동 교우촌 그리스도인들의 생업은 ‘옹기’를 굽는 일이었다. 한국 가톨릭교회의 특징을 ‘옹기장이 신앙’이라 표현할 정도로 옹기는 한국 교회 박해사와 떼려야 뗄 수 없다.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깊은 산 속 험하고 가파른 골짜기로 숨어 들어가 화전을 일구고 옹기나 숯을 팔아 목숨을 이어갔다.
하지만 우리 신앙 선조들은 옹기를 단순히 생계 수단으로만 여기지 않고 신앙 증거의 징표로 이용했다. 십자가 모양의 넝쿨을 그리거나 비둘기와 포도나무 등을 무늬로 자신만의 신앙 고백을 옹기에 새겼다. 옹기는 이 믿음의 표식으로 단순히 음식이나 물건을 담는 용기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보화를 담은 그릇으로 변화한다. 단순히 믿음의 표식이 새겨졌다고 해서가 아니다. 이 옹기들은 질가마 안에서 함께 기도하고, 성사를 고대하던 교우들 믿음의 결실이기 때문이다. 신앙을 생활과 정신, 노동 안에서 실현함으로써 그 믿음을 완전한 사랑으로 변화시킨 신앙 선조들의 놀라운 삶의 결정체다.
교우촌 그리스도인들은 옹기를 팔러 이 마을 저 고을로 다니면서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들은 읍내 장에서 옹기도 팔뿐더러 세간의 눈을 피해 성직자와 교우들과 연락을 취했다. 그렇게 사제를 만나 성사를 받고, 교우들에게 세상 돌아가는 정보도 얻어 교우촌으로 돌아갔다. 또 빈털터리로 쫓기던 박해 시절, 옹기 일은 그나마 안전하고 넉넉한 밥벌이였다. 신변에 위협을 느끼면 더 좋은 흙과 땔감이 있는 곳을 찾아 나서는 척하고 신속히 은신처를 옮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옹기 덕에 박해 시기 그리스도인들은 목숨을 부지하고 기본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장재동공소는 1890년에 설립돼 2026년 올해로 136년 된 유서깊은 신앙 공동체이다. 장재동공소 내부.
옹기 팔러 다니며 사제 만나고 성사받다
장재동공소는 1890년 전주(현 전동)본당 주임 보두네 신부가 설립했다. 이보다 앞서 조선대목구 소속 파리외방전교회 교황 파견 선교사 리우빌 신부가 덕천리 일대에 복음을 전해 1882년 널틔공소, 1883년 가래골공소를 설립했다. 장재동공소 설립 당시 교우 수는 27명에 불과했는데 10년 뒤에는 88명으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였다.
1896년 진안 지역을 사목 방문한 제8대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는 12월 5일 장재동 공소를 들렀다. 신앙의 자유를 얻은 뒤여서인지 장재동 교우들은 옹기 굽는 일을 관두고 농사짓는 일로 생업을 바꾸었다. 뮈텔 주교는 그의 일기장에 “장재동은 논농사와 담배 농사를 짓는 마을”이라고 적었다.
보두네 신부는 1900년 9월 어은동공소를 본당으로 신설했지만, 진안 마령면, 부귀면, 성수면 공소들을 전주본당 관할로 그대로 뒀다. 이 지역 공소마저 어은동본당에 내주면 당시 전라도 선교의 중심지인 전주본당의 교세가 너무 빈약해진다고 판단해서다. 이처럼 장재동공소를 비롯한 이 지역 공소 교우들이 수가 많았을 뿐 아니라 신심도 누구보다 깊고 두터웠다.
장재동공소는 1890년에 설립돼 2026년 올해로 136년 된 유서깊은 신앙 공동체이다. 장재동공소 내부.
본당 승격 좌절됐지만 영신회 조직해 활동
초대 대구대목구장 드망즈 주교는 1918년 11월 19일 장재동공소 봉헌식을 주례하고 미카엘 대천사를 공소 수호성인으로 선포했다. 장재동공소는 2년 뒤인 1920년 가래골공소와 합쳐져 꽤 큰 공소가 됐다. 새로 지은 공소 건물뿐 아니라 교우들도 박해를 겪은 신심 깊은 이들이 대다수여서 장재동공소는 이후 늘 본당 후보지로 거론됐다. 그러던 중 1921년 10월 31일 어은동본당 제2대 주임 이상화(바르톨로메오) 신부가 장재동공소로 사제관을 옮겨 이듬해 7월 초까지 생활해 그 기대감을 더했다.
하지만 이 신부는 장재동공소가 어은동처럼 산골짜기에 자리해 장래 발전 가능성이 적다고 판단, 한들공소에 새 본당을 설립했다. 본당 승격 기대가 컸던 장재동공소 교우들은 실망하지 않고 1926년 여교우 30명이 ‘영신회’를 조직해 한들본당에서 모범적인 신심 활동을 실천했다. 장재동공소 영신회는 회원이 선종할 경우 위령미사 1대를 드리고, 해마다 회원들을 위한 생미사와 연미사 1대를 드리는 것이 주요 활동이었다.
현 장재동공소 건물은 1964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그해 11월 5일 완공해 봉헌했다. 공소 마당에 있는 성모상은 1988년 11월에 축복했다. 이때만 해도 공소 교우 수가 129명이었고 주일이면 한 명도 빠지지 않고 공소 예절에 참여할 만큼 신앙 선조들의 신심을 그대로 계승해온 모범적인 교우촌 공소였다. 젊은이 대부분이 도시로 빠져나가 교세는 예전만 못하지만 지금도 ‘옹기장이 신앙’은 한치 흐트러짐 없이 굳건하다.
장재동공소는 벽돌집을 지어 시멘트로 마감한 강당식 건축물이다. 내부 바닥은 비닐 장판으로 마감돼 있고, 벽도 무늬목 시트지로 치장돼 있다.
장재동공소 입구 창문 한 쪽에 놓인 1961년 성탄 찰고 우수 상장.
136년 증언하는 옛 제대와 빛바랜 찰고 상장
인상 깊은 것은 옛 제대이다. 나무 제대 문양 장식으로 보아 아마도 1918년 드망즈 주교가 첫 공소 건물을 봉헌할 때 축성할 제대일 것이다. 제대 위에 놓여 있는 예수 성심상도 어은동공소와 봉암공소에 똑같은 것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같은 시기 작품인 듯하다.
공소 양측 벽면 너른 창 사이로 십자가의 길 14처가 설치돼 있다. 인쇄된 성화로 꾸며진 십자가의 길 14처는 어은동과 한들공소의 성화와 비슷하지만, 그보다 후대 인쇄본인 듯하다.
공소 입구 창문 한쪽에 1961년 주님 성탄 대축일에 받은 ‘찰고 우수’ 상장이 자랑스럽게 놓여 있다. 비록 빛은 바랬지만 신심 깊은 신앙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음을 웅변하는 듯하다. 변하지 않는 질그릇 속 신앙의 보화로 전주교구 이명재(베네딕토)·이완재(타대오)·이금재(마르코) 신부를 배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