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교구 진안본당 소토실공소는 진안읍 진장로 488(물곡리 1320-4)에 자리하고 있다. 물곡리는 진안읍 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계곡에서 흘러내려 온 물길이 거꾸로 거슬러 흐르는 듯 보여 붙여진 이름이다. 소토실은 예전에 솥을 만드는 ‘솥점’이 있어서 ‘솟점’으로 불렸다가 ‘소토실’이 됐다는 이야기와 마을이 마치 ‘솥터’처럼 생겨서 ‘솟터실’로 불리다 ‘소토실’이 됐다는 유래가 있다.
소토실공소는 두 그리스도인 가정이 이주해와 모범적인 신앙의 삶으로 마을 전체를 교우촌으로 바꾸었다. 소토실공소 내부.
술과 노름에 빠져 가난에 허덕이던 사람들
소토실 마을에 가톨릭 신앙이 전래된 것은 1900년께다. 신경운(마르코)과 송태로(프란치스코) 가정이 이 마을로 이사와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당시 소토실 주민뿐 아니라 물곡리 사람들은 술과 노름에 빠져 나태한 삶을 살아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였다. 신심 깊은 그리스도인이었던 신경운과 송태로는 사람들에게 복음과 가톨릭 교리뿐 아니라 성실함의 모범을 삶으로 증거했다. 두 그리스도인 가정은 세상의 소란과 쾌락을 멀리하고 기도하는 모습과 검소하고 겸손한 삶을 보여줬다. 가난하고 곤궁하기는 마찬가지지만 행복하고 사랑 넘치는 가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 이 모습을 본 소토실 주민들과 물곡리 사람들이 차츰 그리스도인 가정을 신뢰하고 그들에게 찾아와 가톨릭 교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후 소토실 주민들의 삶의 자세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술과 노름을 끊고 근면하게 살았다. 하루를 기도로 시작해 기도로 마감했다. 한두 명이 세례를 받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물곡리 30여 명의 주민이 그리스도인이 됐다. 소토실은 교우촌이 됐고, 1908년 어은동본당 관할 공소가 됐다. 이후 소토실공소 교우들은 지금까지 쉬는 신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고 자랑할 만큼 신심 깊은 신앙 공동체로 이어오고 있다.
소토실공소 교우들은 지금까지 한 사람의 쉬는 신자가 없다고 자부할 만큼 신실하게 살고 있다. 소토실공소 내부.
신앙인의 모범 보여준 신경운과 송태로
소토실공소 설립 당시 전라도 지역 교회는 일제와 갈등이 심했다. 전주본당 초대 주임 보두네 신부는 1908년 2월 14일 진안 주둔 일본 수비대에 폭행을 당했다. 일제는 1907년 11월 조선 의병을 뿌리 뽑기 위해 고을마다 ‘자위단’을 조직해 의병 진압과 토벌에 앞장세웠다. 문제는 일제가 조선인들을 강제로 자위단에 가입시킨 것이다. 그러면서 자위단 운영 비용을 강제 징수했다. 이런 민폐로 가난한 주민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래서 보두네 신부는 교우들에게 자위단의 요구에 일절 응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교우들이 보두네 신부의 지시를 따르자, 진안 수비대는 어은동 주임 김양홍 신부와 교우들을 잡아들였다. 보두네 신부가 직접 진안 수비대를 찾아가 수비대장을 만나 부당한 처사를 따지자 보초병들이 달려들어 그를 구타하고, 총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내리쳐 큰 상처를 입혔다. 보두네 신부는 이를 뮈텔 주교에게 보고했고, 프랑스 영사가 조선 통감부에 항의했다. 이 일로 진안 수비대장과 경찰대장이 경질됐고, 통감부에서 배상금을 지급하고 부통감 소네 아라스케가 보두네 신부에게 유감을 표해 일단락됐다.
김양홍 신부 또한 일제로부터 지속적인 구금과 폭행을 당했다. 1908년 4월 8일 김 신부는 총기를 소지했다는 이유로 수비대에 체포됐다. 김 신부는 1907년 가을 판공 때 사냥꾼 교우들의 총기 5정을 사제관에 보관해뒀다. 그러던 중 어은동을 지나던 의병들이 교우들을 찾아와 총이 있으면 달라고 해서 한 교우가 총 1정을 내줬다. 이것이 빌미가 돼 일본 군인들이 김 신부와 교우들을 체포했다. 20여 일 만에 석방된 김 신부는 진안에서 어은동성당으로 가는 도중 일본군에 또다시 잡혀 하루 온종일 묶인 채 모진 매를 맞은 후 풀려났다.
본당 신부가 아무 죄도 없이 일본군에 속절없이 붙잡혀 매 맞고 수모를 당하자 교우들이 크게 낙담했다. 한국인으로서 프랑스인 성직자와 달리 일제에 대항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좌절과 무력함을 느낀 김양홍 신부는 뮈텔 주교에게 전출을 청했다.
2026년 올해로 설립 118년을 맞은 소토실공소에 관한 사료는 거의 없다. 1957년 물곡리 중심지인 궁동에 공소를 이전할 목적으로 땅과 헌 집을 매입했다는 기록과 전주교구 이태주(알로이시오) 신부가 1974년 12월 8일 자 전주교구 주보 ‘숲정이’에 실은 소토실공소 체험 원고가 전부다.
“구부러진 길목을 하나하나 지날 때마다 어린아이를 등에 업은 아줌마들, 점퍼 차림의 아저씨들, 곱게 단장한 시골 색시들, 하얗게 수염이 나신 할아버지, 모두가 길모퉁이에 서서 손을 흔들고 인사를 한다. 이에 답하여 손을 흔드시는 신부님, 한쪽은 양 떼를 찾는 인자한 목자이고, 한쪽은 목자를 맞이하는 순박한 양 떼들이다. 모두가 기쁨에 가득 찬 모습들이다. (⋯) 블록과 슬레이트로 이어진 조그마한 공소 집에 70여 명의 신자가 모여든다. 신부님의 강론과 고해성사, 대인 영세와 어린이 보례 그리고 간단한 교리 강좌, 미사, 14처 건립으로 진행된 4시간 이상의 공소 행사는 목자와 양 떼의 협력으로 은총 속에 끝났다.”
1996년에 봉헌한 소토실공소는 2005년 수해를 이겨냈다. 소토실공소 제단 한켠에 모셔진 성모상과 그리스도 성화.
마을 휩쓴 물살, 공소는 묵묵히 견뎌냈다
지금의 소토실공소 건물은 1996년 12월 21일 봉헌됐다. 올해로 만 30년 됐다. 소토실공소는 26번 국도변에 있다. 경사 지대를 평탄하게 다져 그 위에 슬레이트 패널 건물을 지었다. 2005년 8월 소토실은 큰 수해를 입었다. 산골짜기를 타고 흘러내린 거친 물살이 마을을 휩쓸었다. 교우들의 집과 논밭, 축사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가축들의 피해도 컸다. 노환에 충격이 겹친 몇몇 교우는 헬기로 병원에 후송됐다.
공소 외벽 전면에 곰팡이가 가득 끼어 있는 게 그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소토실공소는 이 재난을 묵묵히 견뎌냈다. 공소는 단조롭게 꾸며져 있다. 바닥에 무늬목 장판이 깔려 있고, 양쪽 벽면에는 십자가의 길 14처가 장식돼 있다. 창은 색유리 시트지로 마감돼 있다. 뒤편에는 1987년 정묘년 봄에 박순석 씨가 쓴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이다’라는 붓글씨 액자가 있다.
소토실공소는 참되고 성숙한 신앙이 마을 전체를 변화시킨 ‘증거’다. 술과 노름에 빠져 있던 사람들을 신앙으로 이끌고 그 신앙이 118년째 단 한 명의 냉담자도 내지 않을 만큼 신실하게 이어져 오고 있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그렇다 해서 소토실공소 교우들이 신앙 안에서 피안의 삶만 산 것도 아니다. 1985년 정부가 소고기 수입 개방을 하려 하자 소몰이 시위를 벌여 농민의 생존권을 스스로 지켰다.
어느 누구도 자기 스스로 구원의 길을 끝까지 갈 만큼 강하지 않다. 하지만 ‘함께’라면 그리고 주님께서 당신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면 그 구원의 길은 후손들에게까지 이어질 것이다. 소토실공소 교우들은 이를 삶으로 증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