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성가정 축일 미사에서 신부님께서 하신 강론 말씀이 아직도 깊이 남아 있다. “사실 우리가 성가정을 본받으려고 애쓰지만, 부모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은 결코 키우기 수월한, 이상적인 자녀의 표본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신부님의 농담 섞인 말씀에 성당 곳곳에서 작은 웃음소리들이 들려왔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는 왠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뜨끔했다.
열두 살의 예수님이 성전에 남아 자신을 애타게 찾던 부모에게 “제가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반문했던 일화를 떠올려 보면, 과연 마리아와 요셉의 마음이 어땠을지 감히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하지만 두 분은 아들의 그 낯설고 이해하기 힘든 행보를 억지로 통제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기도로 품어내며, 자녀가 하느님의 뜻 안에서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조용히 곁을 내어주셨다.
그에 비해 부모로서 나의 모습은 어떠한지 조용히 생각해보게 되었다. 아이들에 관한 기도를 할 때면 늘 “하느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귀한 선물들이니, 하느님의 뜻 안에서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조력자의 역할을 잘해낼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시오”라고 청하곤 한다. 그러나 일상으로 돌아오면, 그 다부진 다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만다. 나는 어느새 ‘엄마’라는 막강한 이유를 내세워 나의 시간과 기준 안에서 아이들을 통제하려고 안달난 나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바쁜 아침 시간에 내 뜻대로 빠르게 움직여주지 않는다고 언성을 높이고, 주말 어린이 미사를 갈 때도 아이들의 태도가 내 마음에 쏙 들지 않으면 여지없이 잔소리를 쏟아낸다. 아이들이 각자의 색깔과 속도로 자라나는 고유한 존재임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불안함과 내 욕심 때문에 자꾸만 아이들을 내가 짜놓은 틀 속에 억지로 맞추려 드는 것이다.
신부님의 강론을 다시금 곱씹으며 나 스스로 묻게 된다. 마리아와 요셉 성인이 보여주신 성가정의 진짜 위대함은 흠결 없는 평온함이나 말 잘 듣는 자녀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녀를 향한 부모의 ‘통제권’을 기꺼이 하느님께 내어드린 그 경이로운 ‘수용’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자녀가 부모의 기대와 전혀 다른, 때로는 낯설고 두려운 길을 택하더라도 꺾거나 원망하지 않고 끝까지 믿어주는 것. 그것이 부모가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하고도 어려운 조력일 것이다.
기도 따로, 현실 따로인 나의 얄팍하고 통제적인 마음을 깊이 반성해본다. 내가 진정으로 짓고 싶은 성가정은 내 입맛에 맞게 아이들을 빚어내는 곳이 아니라, 아이들 안에 심어진 하느님의 뜻이 아름답게 피어날 수 있도록 묵묵히 물을 주고 기다려주는 곳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되뇌어본다.
자녀들을 내 뜻대로 움직이는 지배자가 아니라, 좌충우돌하더라도 아이들의 걸음을 믿고 응원하는 넉넉한 조력자가 되기를. 그렇게 조금씩 진짜 성가정을 닮아갈 수 있기를 간절하게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