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교구 진안본당 선인동공소는 1901년 설립됐다. 1992년도에 새로 봉헌한 선인동공소 전경.
전주교구 진안본당 선인동공소는 전북 진안군 진안읍 선인길 13-6(가림리 605)에 자리하고 있다. 가림리는 마이산 줄기 성수산 북쪽에 있는 마을로 동쪽으로는 진안읍 반월리, 서쪽으로는 마령면 동촌리, 남쪽으로는 백운면 노촌리, 북쪽으로는 진안읍 단양리와 이웃하고 있다.
가림리에는 선인동·은천·탄곡·원가림·사인동 5개 마을이 있다. 탄곡은 1636년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켜 남한산성을 방어하다 인조의 항복으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효종)이 청나라에 끌려갈 때 세자의 경호원 배종무관으로 동행했던 전동흘의 출생지이다. 전동흘은 귀국 후 포도대장·훈련대장·오위도총관을 역임했다. 그는 1658년 철산 부사로 부임해 억울하게 살해된 자매의 사건 전모를 밝혀 소설 「장화홍련전」에 나오는 철산 부사 정동우의 실제 모델로 널리 알려졌다. 이런 연유로 가림리 은천 삼거리에서 탄곡을 지나는 도로를 ‘장화홍련로’라 이름 지었다.
2015년 말 이후 선인동공소는 교우 개개인의 기도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선인동공소에 장식된 십자가의 길 14처.
박해 피해 신선골에 숨어든 교우들
마이산에서 뻗어내린 산줄기가 가림리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임진왜란 때 피난민들이 이곳에 숨어들어와 처음으로 마을을 이루었다. 특히 선인동은 ‘안골’이라 부를 만큼 가림리에서도 외진 산골 마을이다. 그래서 이 깊은 골짜기에 신선들이 살았다 해서 ‘선인동’(仙人洞)이라 불렀다.
신선이 살았다는 전설이 있을 만큼 깊은 산속 험하고 가파른 골짜기에 그리스도인들이 조선 왕조 치하 박해를 피해 숨어들어와 교우촌을 이루었다. 선인동 교우촌이 언제 생겼는지는 알 수 없다. 진안 땅에 그리스도인들이 숨어든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때부터다. 주로 충청도 지역에 살던 교우들이 금산과 고산을 거쳐 진안 용담 일대에 흩어져 살았다. 1866년 병인박해 때에 더 깊은 산속 어은동 일대까지 숨어들어 갔다. 아마도 선인동 교우촌도 이 시기에 생겼을 것으로 본다. 지금도 선인동 주민 대다수가 가톨릭 교우이다.
2026년 현재 설립 125주년이 된 선인동공소는 그간 성스럽게 살아온 교우들의 삶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빛바랜 예수 성심상이 있는 제단.
1901년 9가구 51명 교우로 첫발
선인동공소는 1901년 어은동본당 관할 공소로 설립됐다. 당시 12가구 중 9가구 51명이 교우였다. 초창기 공소는 초가였다. 아마도 공소 회장이나 신심 깊은 교우의 집을 공소로 사용했을 것이다. 당시만 해도 교우촌에 오로지 공소로 사용할 건물을 짓기는 쉽지 않았다. 진안 일대에 동학 농민군이 활동하고 있었고, 여전히 서양 종교에 반감을 갖고 있던 이들도 많아 외지인들 눈에 쉽게 띄는 공소를 짓는 것은 갈등의 불씨가 될 수 있었다. 또 교우들이 너무 가난해 공소 건물을 지을 형편이 되지 못했다.
더불어 신앙의 자유를 얻은 후 산골 교우촌에서 도시로 이주하는 교우들이 적지 않아 현실적으로 안정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이런 이유로 교우촌 대부분은 가정집을 주일마다 공소로 사용했다. 선인동공소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초대 대구대목구장 드망즈 주교는 1912년 11월 진안 일대 공소를 사목 방문한 후 “교우들은 훌륭했지만, 공소 건물은 그렇게 어울리지 않았다”고 평했다.(「드망즈 일기」, 1912년 11월 8일)
1988년 12월에 봉헌된 성모상.
6·25 때 빨치산 강요 거부한 서정학 총살
선인동공소는 1950년 6·25 전쟁 때 큰 환란을 겪었다. 진안 일대가 산악 지대여서 전쟁 동안 인민군 빨치산들이 출몰했다. 그래서 산에 살던 교우들은 낮엔 경찰과 군인들에게, 밤엔 빨치산들에게 시달려야만 했다. 1951년 5월 17일 빨치산들이 선인동공소를 습격했다. 주민 신영철이 빨치산에게 선인동에 청년 다수가 숨어있다고 일러바쳤다. 빨치산은 그날 이들을 끌고 가려고 선인동을 습격, 서정학(마카리오)을 비롯한 교우 5명과 일반인 2명을 체포했다. 빨치산은 이들에게 자신들과 함께 무장 투쟁을 하자고 강요했다. 6명의 청년은 저항하지 않고 그들을 따라 나섰지만, 서정학만은 거부해 그 자리에서 총살됐다. 산으로 끌려갔던 청년들은 고문을 받은 후 풀려났다.
지금은 교우 20명 안팎, 성사는 진안성당서
선인동공소는 가파른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다. 초가였던 공소는 함석 지붕의 목조 건물로 바뀌었고 1992년 12월 10일 지금의 조립식 건물로 새로 지어졌다. 공소 마당에 있는 성모상은 1988년 12월 19일 세워졌다. 선인동에는 1970년대 50세대가 넘는 교우들이 살았지만, 산업화 이후 많은 이가 이주해 지금은 교우 수가 20명 안팎이다. 선인동공소는 지금도 진안본당 활동 공소이지만 2015년 이후 교우 개개인의 기도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공소 교우 대부분은 진안성당에서 성사생활을 하고 있다.
2015년도 이후 교체되지 않은 달력과 못이 빠져 겨우 매달려 있는 십자가의 길 성화.
기울어진 성화, 빛바랜 예수 성심상… 그럼에도 신앙은 계속 이어진다
선인동공소는 조립식 건물로 지어진 지 34년이나 돼 지붕이 내려앉지 않도록 외부에 쇠파이프로 보강 공사를 해놓았다. 내부는 강당 구조로 단조롭다. 회중석 규모로 봐서는 새 건물을 봉헌하던 1990년대 초반만 해도 적지 않은 교우들이 있었던 듯하다.
제단에는 나무 제대와 십자가, 독서대가 있고, 십자가 양옆으로 예수 성심상과 성모자화가 장식돼 있다. 공소 양쪽 벽면에는 십자가의 길 14처 성화가 있다. 해가 늦게 뜨고 빨리 지는 산골 환경을 고려해 최대한 채광을 높이기 위해 큰 창들을 많이 만들어 놓았다.
제대 벽을 장식하고 있는 예수 성심상은 붉은 색 겉옷이 흰색으로 보일 만큼 빛이 바랬고, 몇몇 십자가의 길 성화는 못이 빠져 겨우 매달려 있다. 입구 안쪽 한쪽에 걸려 있는 달력은 2015년도 마지막 장만 남아있다. 성수대 또한 어느 부분 틈이 생겼는지 성수가 흘러내린 자국이 있다.
겉보기엔 다소 을씨년스러워도 선인동공소는 125년간 이어온 영적 내공을 보여준다. 사멸이 아니라 생명에로의 흡수를 드러내는 공간이다. “고통 없이 영광 없고, 죽음 없이 부활 없다”는 말처럼 선인동공소는 신앙을 향한 영의 의지가 육의 의지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웅변한다.
공소 설립 125년 동안 변변한 기록 하나 없고 신앙의 터전인 공소 건물은 주저앉기 일보 직전이지만 하느님께 기도하고, 거룩한 것을 말하고, 성스럽게 살아갔고 살고 있는 교우들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