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분히 애도할 시간이 필요하다
옥천에선 8년 전에 일가족 사망사건이 있었다. 2024년에는 여중생 킥보드 사망사건이 있었고, 최근에 추석 명절이 끝나고 일가족 사망사건이 또 발생했다. 작은 지역에서 이런 사건이 발생하면 지역은 온통 트라우마를 겪는다. 애써 지우려고 하는 마음과 애도하는 마음 사이에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을 잃고 만다.
슬픔은 심연으로 흐른다. 가늘고 길게 이따금 툭툭 감정선을 건드린다. 8년 전 그때도 그랬다. 엘리베이터를 오르내리며 등굣길에 늘 마주하며 해맑게 웃었던 아이와 아이 엄마를 더 이상 보지 못한다는 것이 애달팠다. 기억은 표백되지 않았고 일상 속에서 문득문득 부지불식간에 떠올라 울컥하는 감정이 쏟아지곤 했다. 선정적인 뉴스가 전국 매체에 경쟁하듯이 횡행할 무렵에 옥천신문은 이를 어떻게 보도해야 할지 고민했다. 단지 단신으로 보도할 수 없는 큰 사건이기에 어떻게 다룰 것인가 심사숙고했다. 평소 가깝게 알고 지내던 사람이어서 그 아픔은 더 컸다.
8년이란 시간이 지났지만, 좀처럼 잊히지 않았다. 다 같이 애도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있었더라면, 함께 슬픔을 토로하고 아픔을 나눴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뭐 좋은 일이라고, 자꾸 꺼내면 생채기만 덧나고 안 좋은 소문만 퍼진다고 애써 사실을 지우려 했던 모습들은 낯설지 않다. 그래 왔으니까. 충분히 슬퍼할 기회와 애도의 시간을 그렇게 지워버렸는지도 모른다.
2년 전 그때도 그랬다. 아이는 평소 친하게 지냈던 1년 후배가 킥보드를 타다가 죽었다며 장례식장에 간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 전 수학여행을 다녀오고 맞이한 추석을 즐겁게 보내야 할 아이가 또 비극적인 사건으로 세상을 떠났다. 우리 지역의 학생들은 또래의 죽음을 벌써 초·중·고에서 세 번이나 겪었다. 지역이 좁고 학생 수가 그리 많지 않다 보니 얼기설기 다 인연이 있어 아픔은 이어지고 있다. 왜 자꾸 우리 지역에 이런 사건이 일어나느냐고 묻기 전에 이에 대해 어떻게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묻는 게 옳다. 곳곳에서 여러 참사가 일어나지만, 나를 비껴갔다는 안도감보다 공감하고 애도하는 마음이 우선해야 한다.
여러 연으로 이어진 작은 지역 공동체에서 아픔과 비극은 서로에게 전이된다. 그 감정을 나눠서 질 때 공동체는 회복할 힘을 얻는다. 애써 끊어내고 단절하며 망각할 때 우린 서로에게 더 깊은 상처를 줄지 모른다.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 묻는 일은 다음이다. 다행히도 정신보건센터와 교육청·학교가 서로 긴밀하게 협조해 학교 안에서 장례식이 치러지는 동안 애도와 함께 아이들이 받았을 정신적 충격에 대해 같이 상담하고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지역 안에서도 같이 추모하는 시간을 가졌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군과 의회도 이를 개별 사건으로 치부하지 않고 공식적인 애도의 입장을 표명하면 어땠을까. 뉴스가 더 꼬리를 물고 확장되지 않기를 바라는지도 모른다.
빨리 잊히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역이 특정 사건으로 각인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함께 슬퍼하고 혼자 그 짐을 짊어지지 않도록 같이 마음을 나누고 보태는 일이다. 슬픔과 아픔을 표백한다고 해서 삶이 완전무결하지 않을 것이다. 그 감정들도 오롯이 같이할 때 지역공동체는 한층 더 성숙해질 수 있을 거라 믿는다.
